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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14년 차. 이름을 대면 알 만한 방송 프로그램을 하나 남겼고, 공동 저자로 된 책 2권을 출간했다. 솔직히 이쯤 되면 내 인생이 조금 달라질 줄 알았다.

하지만 철저히 오산이었다. 여전히 방송국 CP(Chief Producer)의 개인적인 취향에 의해 내 밥줄이 결정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기서 취향이라 함은 업무 능력을 떠나 내가 그에게 얼마나 살갑게 구는지, 내 외모가 얼마나 그의 취향에 맞는지 등을 일컫는다.

세월이 흘러도 어쩔 수 없는 '을'

정작 방송가의 현실에 대해서는 침묵했던 내 노트북
 정작 방송가의 현실에 대해서는 침묵했던 내 노트북
ⓒ 조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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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땅콩 회항'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였다. 2014년 12월 9일, 내가 비행기에 오를 때만 해도 사건 장본인의 주로 여유 있는 웃음을 짓는 자료 화면이 송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여론의 후폭풍은 점점 더 거세져만 갔다.

우리가 그토록 조현아에게 공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현아로 표상되는 우리 주변의 '갑'들 때문이라 함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14년간 방송 작가로 일해 오면서 본 '갑질'에 비하면, 조현아는 양반이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그 분노는 나에게로 향했다. 세상을 바꾸겠다면서 정작 내가 처한 현실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특정 방송사나 방송인을 염두에 두기보다는 방송가에서 간혹 벌어지는 일임을 미리 밝혀둔다.

# 1. 
한 작가가 초등학생의 과제를 하고 있다. 이유인즉슨, 함께 일하는 'PD님 따님'의 숙제이기 때문에.

# 2.  
"퍽퍽." 파티션(칸막이) 너머로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본사 PD가 외주 제작사 PD에게 주먹질을 한 것이라는 후문을 들었으나 사건은 조용히 묻혔다.

# 3.  
서점에 한 방송 프로그램이 책으로 출간돼 누워 있다. 보통 다큐멘터리는 크게 PD와 작가, 카메라 감독 등이 한팀이 되어 프로그램을 만든다. 책이 방송 원고를 바탕으로 쓰였거나, 카메라 감독이 찍은 사진이 쓰이더라도 책의 저자는 오직 PD로만 소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른일곱 노처녀, 유서를 쓰다

전라도 출신, 프리랜서, 여성... 나는 뼛속부터 을이었고, 을로 살아왔다. 그래도 신은 났다. 글쓰기는 내 꿈이었고, 내가 만드는 방송으로 세상을 아주 조금은 바꿀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사실 방송 작가는 정규직 자체가 없다. 자료 조사 1년을 거쳐 '입봉'이란 걸 하고, 연차가 쌓일수록 서브 작가에서 메인 작가로 직책과 원고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경력이 쌓이고 프로그램을 잘 만들 수 있게 되면, 갑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눌 수 있으리라는 생각 속에 14년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은 순진한 착각이었고, 그걸 깨닫는 순간부터 작가로 살아온 자부심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거기에 하나 더! 서른일곱에 아직 미혼인 여성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한민국에서 '루저'가 되기에 충분했다. 14년간 머리가 하얗게 새도록 밤을 불사르며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열렬한 사랑도 몇 번 해보았다. 하지만 번번이 그들은 내 등에 커다란 칼 하나씩을 꽂고 달아났다. 그동안 아무리 열심히 방송을 만들고 또 누군가를 사랑했다 할지라도 세상의 기준에서 '루저'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이대로 살 수도 없고, 이대로 죽을 수도 없는...

어느 시인의 시구가 떠올랐다. 이대로 살자니 너무 불행할 것만 같았고, 이대로 죽자니 그래도 남은 인생이 반쯤은 될 텐데 그 생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 때 문득 아일랜드가 떠올랐다. 저 세상이 아닌, 이 세상에서도 전혀 다른 세상이 존재하지 않던가.

물론 그곳이 왜 아일랜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 <원스>의 나라이자 제임스 조이스와 오스카 와일드 같은 문학계 거장의 나라, 초록 들판으로 상징되는 나라... 그곳에 가면 소위 힐링을 조금 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었나 보다.

만약 내가 이곳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중략)
당신들의 가족으로 태어나 행복했고
글을 쓰며 살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간단한 유서 한 장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기분이 묘했다. 왠지 정말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다시 돌아와서 유서를 보면 어떤 기분일지도 궁금했다. 우습게도 돌아와서 한 TV 프로그램을 보니, 유언장으로 요건을 갖추려면 주민등록번호와 주소, 날인 등이 있어야 했다. 어쨌거나 내게는 이토록 비장하게 떠난 여행이 생에 또 있을까 싶다.

환승하며 혼비백산... 쉬운 일 아니었다

갑을의 나라를 떠나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갑을의 나라를 떠나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 조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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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추운 나라를?"

내가 아일랜드에 간다고 하니, 아이슬란드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아직 아일랜드는 다소 미지의 나라인 데다 직항도 없다. 겁이 많아서 두바이나 러시아에서 환승하는 건 엄두를 내지 못했고, 그나마 유럽 항공사 중에서 비행기 값이 싼 영국 항공을 택했다.

영국까지 비행 시간 12시간 30분. 환승시간 1시간. 영국에서 아일랜드까지 1시간 20분. 내 머릿속은 온통 환승 걱정에 사로잡혔다. 히드로 공항은 입국 심사가 철저하기로 악명 높았다. 그런 내 앞으로 바구니가 쓰윽 밀려왔다. 눈을 들어 올려다보니, 영국의 꽃청년 승무원이다. 바구니에는 조그마한 과자 봉지들이 담겨 있다.

"쿠키랑 감자칩 등등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쿠키를 집는다고 생각하고 집어든 과자봉지 안에는 감자칩이 담겨 있었다. 영국 항공도 칸막이 앞에 앉은 사람들에게는 이 과자를 곱게 접시에 담아 내미려나. 난 그저 꽃청년이 서빙하는 줄에 앉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를 떠올리며 감자칩을 우적우적 씹었다. 나와 성이 같은 조현아가 떠올라서인지 내 입 속의 이빨은 더욱 맹렬하게 움직였다.

두 번의 식사를 하고 와인 한 잔, 커피 두어 잔 등 마신 뒤에야 영국 땅에 다다랐다. 환승 시간 1시간. 잊었던 현실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을 제치고 'TRANSFER(환승)'를 향해 뛰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입국 심사대 앞에 까마득한 줄을 기다려 통과하려는데 너무 서두르다 보니 입국 카드를 적지 않은 것이다. 동동동 발을 구르며 입국 카드를 적고, 또다시 뛰었다. 이번엔 검색대다. 시간은 불과 20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검색대의 줄은 까마득하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15분, 10분... 시간이 다가올수록 회의감이 들었다.

'비행기 놓치기 밖에 더하겠나?'
'그래도 그 비행기 값이 얼마인데...'

혼비백산이 되어 검색대를 통과해 게이트로 달려가니 5분 전. 비행기에 오르니 이륙 2분 전.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런데 이건 또 어찌 된 일. 기상악화인지, 비행 점검 때문인지 그대로 앉은 채 3시간을 흘려보냈다.

아, 미지의 나라에 간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구나. 시간은 이제 겨우 오후 3시 30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창밖은 어둑해지고 있었다. 어둠을 뚫고 작은 비행기가 아일랜드 해를 넘기 시작했다. 거친 바람에 비행기는 자주 휘청였고, 그럴 때마다 유서를 쓰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도 나는 을인가?

딱 인천에서 제주도까지 정도의 가벼운 비행. 불과 오후 5시인데도 깊은 밤인 듯했다. 창밖으로 거센 빗줄기가 나를 맞았다. 17시간 만에 드디어 1년 중 300일이나 비가 온다는 아일랜드에 도착한 것이다.

한국보다 기온은 10도나 높지만, 머리카락을 단숨에 미역 줄기로 만들어 버릴 만큼 비바람은 거셌다. 야상 점퍼를 단단히 여미고, 입국 심사대에 줄을 섰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내가 탄 비행기 탑승자는 전원 백인이었다. 대부분 유럽 사람들로 가볍게 심사대를 통과했고, 자연스럽게 나는 가장 마지막이 됐다.

"왜 왔어?"
"관광하러."
"여기 아는 친구 있어?"
"응."
"누군데?"

'누구인지 알아서 뭐 하려고?'(물론 이 말은 입 속으로 삼켰다.)

순간 어이가 없었다. 내가 여기 관광하러 왔다는데, 친구 이름까지 대야 하나? 까다로워 보이는 여성 심사관은 미덥지 않다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친구 이름을 댔다)!"

탁탁탁. 자판을 힘 있게 두드리며, 여자는 아일랜드 유학생으로 있는 친구의 이름을 검색했다. 그리고는 내게 그 이름을 가진 여자들의 사진을 몇 명 보여줬다. 하지만 친구가 아니었다.

'나를 불법 체류라도 할 것처럼 보는 거 아냐?'

기분이 나빴지만, 더 이상 그녀와 실랑이를 벌이며 시간을 낭비하긴 싫었다. 친구의 번호가 저장된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받아 적을 줄 알았던 그녀는, 그 번호를 그대로 눌렀다.

"○○ 맞니? 조미진이 네 친구인 것도?"

그녀는 길지 않은 통화를 끝낸 뒤, 나를 들여 보내줬다.

"땡큐!"

그녀와 나는 서로의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상처투성이 여행가방과 나, 아일랜드 땅을 밟다
 상처투성이 여행가방과 나, 아일랜드 땅을 밟다
ⓒ 조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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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물을 찾는 컨베이어 벨트를 향해 가는데, 갑작스러운 피로와 허탈감이 밀려왔다. 여기서만큼은 '을'이라는 걸 잊고 싶었는데... 컨베이어 벨트에서 내 여행용 캐리어 가방을 찾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작은 비행기에 탔던 탑승객들은 빠져나간 뒤였고, 달랑 내 가방뿐이었으니까. 그래도 나처럼 수모를 겪지 않고, 한국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아일랜드까지 무사히 와준 가방을 보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가방을 내림과 동시에 '쨍그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내동댕이쳤는지 하드케이스 모서리가 깨져나간 것이다. 마치 그동안 방송판에서 구르고 내동댕이쳐지면서 상처받은 또 다른 나를 보는 것만 같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결국 눈물 바람으로 더블린 공항을 빠져나가며 생각했다.

'나는 과연 아일랜드에 잘 온 걸까?'

덧붙이는 글 | 방송가의 '갑질'은 지금 이 시간에도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나 그렇듯 방송가에도 성인 군자 같은 갑들이 있다. 극히 일부지만 언론인으로서 존경하는 선배님들, 때로는 나를 갑으로 착각하게 만들 만큼 아껴준 갑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또한 이 글이 앞으로의 내 작가 인생에 어떤 불이익을 남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내가 그간 을로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이니까.



태그:#갑을의 나라, #아일랜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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