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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명리학, 인문학과 만나다.
▲ <나의 운명사용설명서> 표지 사주명리학, 인문학과 만나다.
ⓒ 이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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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설마'가 사람을 잡고, 무엇을 상상하든지 '그 이하'를 보여주는 참혹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살기 위해' 허공에 매달리고 차가운 바닥을 온몸으로 기어야 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세월호'의 그 때에서 한치도 변하지 않았다.

말로만 국민을 떠드는 정치권의 '뻥카'와 '뻘짓'에도 지쳤다. 잊을만 하면 들려오는 무슨 추락사건, 화재사건, 흉기난동사건 같은 인명 참사 소식에 절망은 더 깊어만 간다. 대체 나라꼴이 이게 뭐란 말인가. '진짜 국운이 어찌되려는지 점이라도 쳐봐야 하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피식'하고 웃음만 나온다.

나는 점이나 운명 같은 것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신문 귀퉁이 '그날의 운세'나 연초 '토정비결' 같은 것에도 별 흥미를 못 느낀다. 인생을 우연적인 요소에 내 맡기는 것 같아서 찝찝하고,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내 삶이 영향을 받는 것도 수용하기 영 껄끄럽다. 특히 사회과학적 바탕 위에 서 있는 진보와 점, 운명 따위는 애시당초 '코드'부터가 맞지 않는다.

이런 내 생각이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책이 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나의 운명사용설명서 : 사주명리학과 안티오이디푸스>. 이 책을 통해 본디 '사주명리학'은 단순한 '숙명론'이 아니라 음양오행이라는 개념적 도구를 통해 인생과 우주의 비전을 탐구하는 독창적인 학문체계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아가 진보와 사주명리학의 '크로스오버'를 통해 세상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구원하는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매력이다.

"운명을 안다는 건 '필연지리'(必然之理)를 파악함과 동시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당연지리'(當然之理)의 현장을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해진 것이 있기 때문에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우연일 뿐이라면 개입의 여지가 없다.

또 모든 것이 필연일 뿐이라면 역시 개입이 불가능하다. 지도를 가지고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명을 따라가되 매순간 다른 걸음을 연출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운명론은 비전탐구가 된다. 사주명리학은 타고난 명을 말하고 몸을 말하고 길을 말한다.

그것은 정해져 있어서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최대한으로 누릴 수 있음을 말해준다. 아는 만큼 걸을 수 있고, 걷는 만큼 즐길 수 있다. 고로, 앎이 곧 길이자 명이다!" (31쪽)

혁명과 구도(求道)는 어떻게 조우하는가?

사주명리학은 어떻게 진보와 소통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 진보의 영역에서 '운명'이라는 키워드는 정말로 불필요한 것인가?

진보가 위기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본질적인 것 한 가지를 선택하라면 '사람의 위기'를 꼽겠다. 학생운동의 붕괴로 인해 젊은 활동가들을 수혈할 길이 막힌 지 오래다. 게다가 변화된 시대의 감수성과는 동떨어진 낡은 사고와 조직 문화를 고수하고 있는 사회단체들의 현주소도 그다지 바뀐 것 같지 않다.

지금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삶의 질'은 평균 이하다. 개인적 삶을 희생하는 고난을 감수하면서 오직 '각오'만으로 버티던 시절은 지났다. 자신의 삶은 불행한데, 사회의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바쳐야 하는' 모순. 이 박탈감과 우울감을 떨쳐내지 못하면서, 세상을 향한 외침에 어떻게 '진정성'이라는 무게가 실릴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다. 저자가 '운명'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진보의 길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활동과 일상, 명분과 현장 사이의 간극, 그리고 이 간극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진보의 타성 때문이다. 저자는 "이 간극을 통찰하지 못하면 진보든 혁명이든 별무소용이다. 그때의 진보나 혁명은 오직 물질적 분배, 제도적 서비스, 시스템의 문제로 환원되어 버린다"고 지적한다.

또한 "단체와 조직은 진화하는데 거기에 속한 개인들이 불행해진다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럼에도 운동단체들은 이런 문제들과 직접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며 "실무적 투쟁이 중심이지 인생과 자연, 몸과 우주에 대한 공부를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마치 그것은 노동자나 여성들, 기타 소수자들과는 무관한 것인양, 또 그런 것을 하면 마치 정치적 의식이 퇴행하기라도 하는 듯이"(29쪽)라고 개탄한다.

동양의 사상은 '마음의 혁명', 곧 '구도'(求道)를 설파해 왔다. '도'(道)란 마음과 우주가 하나임을 깨달아 존재를 완벽하게 탈바꿈하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이보다 더 파격적이고 전복적인 사유는 없다. 그런데 왜 그것은 역사를 뒤엎고 사회를 바꾸는 혁명의이념과 만나지 못하는가?

만나기는 커녕 서로를 배척하는 관계가 되어 버렸는가?(54쪽) 저자는 자연과 역사, 개인과 사회, 실존적 자유와 역사적 해방 등 모더니즘의 '양분법'으로 인해 혁명과 구도가 양극단으로 물러나게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혁명과 운명애, 변혁과 영성, 평행선처럼 달려온 이 두쌍을 음양오행이라는 매트릭스 안에서 조우하는 것(56쪽)이야말로 운명에 대한 비전 탐구, 사주명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이다.

저자는 공적으로 표방하는 명분과 내밀한 욕망 사이의 이중 플레이를 벗어나 '내가 나를 구원하는 혁명'을 하자고 한다. 내가 나를 구원하는 혁명이라야 남도 구원할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 본디 '깨달음'이란 '깨다'와 '도달하다'의 합성어다. 무엇을 깨고 어디에 도달할 것인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사유의 확장'이 필요하다. 사회과학적 담론에 자연의 이치를 더해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고 '앎의 지평'을 열어나가야 한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어떤 조건, 어떤 열악한 상황에 있더라도 자신에 대한 존중감을 버리지 않을 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저항과 투쟁이 있겠는가.

어떤 권력이나 자본도 그런 존재를 회유하거나 훼손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운명애'야 말로 구원과 혁명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구도의 열정과 혁명적 분노가 함께 갈 수 있는 길! 그렇다면 운명을 사랑하는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흐름에 참여할 수 있을 때, 그것이 곧 혁명이 아닐까. 거꾸로 혁명에 대한 열정이 있다면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바꾸려는 투지로 불타는 사람이 자신에 대한 긍지와 존중감이 없다면 그건 '비슷하지만 가짜'다." (56쪽)

고난의 무게가 커질수록 '수승화강' 필요하다

권력의 사유화와 자본의 독점이 심화되고 비상식이 상식을 전복하는 시대, 진보의 앞날은 고난의 연속이다. 이럴 때일수록 원인과 해법을 찾기 위한 시선은 '밖'이 아닌 '안'을 향해야 한다.

저자는 "어떤 사건도 자신의 내부에 단서나 원인이 없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운명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 내부가 마주치는 지점에서 만들어진다. 이 원리를 깨우치지 못한면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일정한 조건만 주어지면 동일한 욕망과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반복하는 리듬과 강밀도, 이것이 바로 팔자다. 해서 팔자를 고치려면 자기 안에 있는 단서나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242쪽)고 강조한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 동시에 정신적 자유도 만끽하는 시대가 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도 전 세계인들이 모두. 만약 그런 시대가 온다면 지구의 생태적 자산은 완전히 거덜나고 말 것이다. 이런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 바로 '명리학'이다.

천지만물의 원리를 바탕으로 욕망의 배치를 근원적으로 바꾸는 것, 이보다 더 능동적인 실천은 없다. 아울러 역사가 '모두가 다 잘사는'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간다는 관념은 '지금, 여기'는 물론, 이전의 모든 시대를 과도기요 이행기로 간주하는 사유를 낳게 된다. 이거야 말로 소외의 극치가 아닐까. 스티븐 호킹이 말했듯 우주에는 중심이 없다. 우주의 끝을 향해 가다 보면 결국 자신이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중요한 건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 것 뿐이다.

역사적 실천의 원리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해방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 그 자리를 해방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것 - 이보다 더 혁명적인 실천은 없다." (99쪽)

동의보감의 '양생술'에서 생명의 핵심은 '수승화강'(水昇火降) 이다. 물기운은 오르고 불기운은 내린다는 뜻이다. 물기운과 관련된 신장과 불기운과 관련된 심장에 문제가 생기면 수승화강이 안되면서 건강에 적신호가 온다. 사회운동도 마찬가지 아닐까.

독재시대로 회귀한 듯한 비이성적인 정치가 진보의 날개를 꺾으려 할 때마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우직하게 진지를 구축하는 뚝심이 필요하다. 또한 맹목적인 희생과 강요된 각오가 아니라 사회운동의 길에서 삶의 궁극적인 자유와 행복을 찾아가는 열정도 필요할 터이다. 고로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덧붙이는 글 | <나의 운명사용설명서>(고미숙 지음/북드라망 펴냄/2013.12.30./280쪽/1만3000원)
이 글은 제 블로그 http://blog.yes24.com/xfile340 에도 게재했습니다.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고미숙 지음, 북드라망(2012)


태그:#사주명리학, #인문학, #진보, #운명애,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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