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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과 인접해있고, 많은 일자리가 있어, 돈을 벌고 성공하기 위해 쉽게 정착했다가 떠날 수 있는 도시로 인식돼왔다. 기회의 땅이지만, 뿌리를 내리고 살고 싶은 도시는 아니었던 셈이다. 돈 벌고 출세해 더 좋은 환경의 서울로 가거나, 고향으로 다시 갈 수 있는 도시로 인식됐다.

그래서 '주인 없는 도시'란 오명을 받기도 했다. 중앙정치는 인천을 찬밥 대우했다. 이는 지금도 이어진다. 부산 아시안게임과 비교되는 인천 아시안게임 국비 지원, 수도권매립지로 인한 주민 피해에도 불구하고 지원은 인색한 정책, 화학발전소와 엘엔지(LNG: 액화천연가스) 인수기지 등 각종 유해하고 위험한 시설 입지와 확장 정책은 대표적인 예이다. 현 정부는 동남권 신공항 건설 추진을 이야기하고, 부산과 광양만 중심의 투-포트(two-port) 항만정책을 지속해, 인천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더디다.

그렇다고 인천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힘은 87년 민주항쟁 이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굴업도 핵 폐기장 지정' 철회 운동이다. 20년 전 12월 22일은 정부가 굴업도 핵 폐기장을 지정한 날이다.

'굴업도 핵 폐기장 지정'과 이를 철회하기 위한 인천시민들의 운동을 다시 돌아보고자 한다. 당시 분출된 인천시민들의 저력을 상기해보면서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산적한 문제들의 해법을 찾아본다. - 기자말

 천혜의 섬 굴업도.<시사인천 자료사진>
천혜의 섬 굴업도.<시사인천 자료사진> ⓒ 한만송

문민정부를 표방했으나 김영삼 정부는 1980년 국민을 총칼로 죽이고 정권을 찬탈한 군사독재 정권을 승계한 정권이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탄생했을 뿐 아니라, 권위주의 정권의 인적·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했다. 김영삼 정권의 핵 폐기장 정책은 비민주 그 자체였다. 굴업도 핵 폐기장 지정은 전혀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기획연재 첫 회에서도 언급했지만, 굴업도는 애당초 핵 폐기장으로 지정될 때부터 선정기준이나 배경이 모호했다. 타당성 여부를 논쟁할 수 있는 기초 자료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1991년 자원연구소 조사 보고서가 유일한 자료였다. 이 보고서는 굴업도를 핵 폐기장 부지로 '부적합' 지역이라고 판정했다. 굴업도의 면적이 좁고, 단층·지하수·접안시설 등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보고서 작성 후 3년 만에 '부적합' 지역이 '최적'의 후보지가 된 것이다.

여기다 굴업도는 지질학적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다. 정부는 강철·콘크리트·시멘트 등 인공적인 방벽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으나, 굴업도의 지질은 단층이 쌓여있고 절리가 발달돼 핵 폐기장 부지로 적합하지 않다. 이런 문제점을 환경 전문가들이 지적했지만, 정부는 외면했다.

굴업도는 섬이라 핵폐기물 해상 운송의 위험도 심각하다. 중·저준위 핵폐기물을 모두 배로 운송해야 하는데, 대다수 핵발전소는 굴업도와 아주 먼 지역에 위치해있다. 굴업도는 안개 다발지역이고 수심이 깊을 뿐 아니라 파도가 거세고 암초 등이 발달해 사고 발생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이뿐이 아니었다. 굴업도는 섬 면적이 작아 안전관리에 필요한 각종 시설이 제대로 들어서기가 어렵고, 육지로부터 떨어져있어 핵 폐기장 운영을 민간이 감시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긴급사고 발생 시 해상 조건에 따라 접근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인천시민의 동의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작게만 봐도 굴업도와 인근 섬 지역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추진됐다. 당시 '방사성 폐기물 관리사업 촉진을 위한 특별법'에 의해 정부는 의사 수렴 지역 범위를 '읍·면·동'으로 규정했다. 외국처럼 '주' 단위로 결정 범위를 넓혀야 했다.

덕적면은 1995년 3월 1일자로 인천시에 편입됐고, 인천지역사회가 굴업도 핵 폐기장 반대에 한 목소리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 전혀 관계없는 지역으로 만든 것이다.

이래 놓고 정부는 거짓 선전으로 주민 70%가 핵 폐기장을 찬성한다는 등의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 법에 규정된 공청회 역시 경찰관을 대거 동원해 인천시민의 참여를 막고, 여론을 조작했다. 여기다 권력 지향적 보수 언론은 덕적도 주민 100%가 핵 폐기장 건설에 찬성한다는 허위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정부기관과 언론을 통해 굴업도가 핵 폐기장으로 최적지인 것처럼, 핵 폐기장을 반대하면 지역 이기주의인 것처럼, 반정부 인사인 양 엄포와 호들갑을 떨던 정부는 결국 굴업도에서 활성단층이 발견됐다며 핵 폐기장 지정·고시를 해제했다. 인천시민들의 저항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이 집회를 준비하던 7일 오전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당시 서정화 국회의원한테서 '정부가 굴업도 정밀 지질조사 중 활성단층을 발견해 핵 폐기장을 추진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부는 이날 핵 폐기장 예정지인 굴업도 반경 3lm 이내에 최소 2열의 활성단층을 발견했다고 발표했고, 11월 30일 굴업도 핵 폐기장 지정·고시를 철회했다.

이에 앞서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 지구로 지정된 굴업도의 지질특성을 조사하던 한국자원연구소는 10월 4일 굴업도 주변에서 활성단층 징후를 발견하고 이를 한국원자력연구소에 보고했고, 한국원자력연구소는 6일 과학기술처에 보고했다.

3월 18일부터 중구 답동성당 안에 설치·운영된 천막농성장은 잔칫집으로 변했다. 최기선 인천시장과 신맹순 시의회 의장도 10월 17일 농성장을 방문해 격려하며 농성장 철거를 요청했다.

 1995년 10월 동인천역 광장에서 열린 ‘핵폐기장 건설 강행 저지 인천시민궐기대회’ 모습. 
핵 폐기장 저지 운동을 벌이던 인천환경운동연합, 인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민주주의민족통일인천연합, 인천부천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 등은 ‘인천 앞바다 핵 폐기장 대책 범시민협의회(이하 핵대협)’에 가두 투쟁을 제안했다. 이에 핵대협은 ‘굴업도 핵 폐기장 결사반대 덕적면 투쟁위원회’와 함께 10월 7일 동인천에서 집회를 열기로 했다. 경찰과 충돌이 불가피한 집회였다.
1995년 10월 동인천역 광장에서 열린 ‘핵폐기장 건설 강행 저지 인천시민궐기대회’ 모습. 핵 폐기장 저지 운동을 벌이던 인천환경운동연합, 인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민주주의민족통일인천연합, 인천부천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 등은 ‘인천 앞바다 핵 폐기장 대책 범시민협의회(이하 핵대협)’에 가두 투쟁을 제안했다. 이에 핵대협은 ‘굴업도 핵 폐기장 결사반대 덕적면 투쟁위원회’와 함께 10월 7일 동인천에서 집회를 열기로 했다. 경찰과 충돌이 불가피한 집회였다. ⓒ 한만송

한편, 덕적도 주민들은 12월 22일, 굴업도 핵 폐기장 최종 후보지 확정 발표 1주년을 맞아 덕적면사무소에서 기념식을 열고 사태 수습 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핵 폐기장 지정은 철회됐지만, 주민 간 갈등의 골이 깊었기 때문이다. 친형제처럼 서로 의지하며 살았던 주민들은 핵 폐기장 찬반을 놓고 이념 갈등보다 심한 갈등을 겪어야했다. 정부가 덕적발전복지재단이라는 것을 설립해 발전기금 500억 원을 지원하기로 하면서 갈등은 심해졌다.

당시 유명한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덕적도에 하나 있는 이발소 주인은 찬성파이다. 그래서 덕적도 주민은 머리 깎기가 싫다. 집안 식구에게 머리를 맡기거나 차라리 기르고 만다. 이발을 위해 인천으로 가기엔 뱃삯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불편하다. 언제까지 이 불편을 참아야하나'

국가권력의 무책임한 정책이 낳은 참상이다.

국민이 위임한 권력과 세금으로 잘못된 정책을 강행해 국민에게 온갖 피해와 고통을 안기고도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권은 진정이 담긴 사과나 위로의 말조차 하지 않았다. 굴업도 핵 폐기장 지정으로 조용한 섬 덕적도는 1년 이상 전쟁을 치렀고, 이 과정에서 이웃이 원수가 되기도 했다. 그 감정의 골은 지금도 메워지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인천(isisa.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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