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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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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란 말 가장 듣기 싫다는 '책사' 윤여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책사'다. 그 말이 듣기 싫어서 오랫동안 인터뷰를 안 한 적도 있는데, 기사 열어보면 책사, 책사…. 애초에는 가치중립적인 단어였는데, '책사'라고 하면 뭔가 어두운 지혜를 담은 사람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향이 생긴 것 같다. 그러나 나에게 그런 걸 기대하면 안 된다."

인물현대사의 6번째 주인공은 '한때 책사라고 불렸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다.

12일 5시간 가까이 그를 인터뷰해 보니 '한국현대사 속에서 드라마가 있는 인물의 생애를 재구성한다'는 본 코너의 취지에 잘 들어맞는 인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린 시절 이승만 대통령과 교류

이제부터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한꺼풀 들춰보려고 한다. 윤여준은 1939년 10월 17일 충남 논산의 대지주 윤석오의 8남매 중 넷째 장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비서이자 총무처 차관으로 8년간 이승만 대통령을 위해 일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별도의 기사로 정리했다.) 덕분에 윤석오는 1948년 가을부터 1950년 6·25 한국전쟁발발 때까지 경무대(청와대) 인근에 살며 이 대통령과 교류하는 인연을 맺게 된다.

"명색이 조선왕족의 후예인데 후사가 없었잖아요? 그래서인지 어린이들을 좋아했고, 저도 귀여워하셨어요. 어머니는 가지 말라고 했지만, 경무대 관저로 따라가서 바나나와 파인애플 얻어먹은 기억, 토요일마다 공보처 직원들이 싣고 온 영사기로 관저 응접실에서 대통령 내외와 영화를 본 기억이 나네요. 한국영화로는 최은희 주연의 '마음의 고향'(1949)이 떠오르고 외국영화로는 미국의 서부극들을 많이 봤어요."

정부수립 직후의 경무대 분위기가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단정수립에 반대하는 남로당 등 좌익들이 북악산에서 무장투쟁을 독려하는 봉화를 올리면 카빈 소총으로 무장한 경관들이 반역자를 체포한다며 산으로 우루루 올라가곤 했다. 이 정도의 '불안한 평화'도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 남침 이후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승만 대통령 부부는 6월 27일 새벽 2시 특별열차 편으로 서울을 몰래 빠져 나갔고, 윤여준 가족도 같은 날 10시 대전행 열차로 피난길에 올랐다. 윤여준이 탄 마지막 열차를 놓친 많은 시민이 이튿날 새벽 폭파된 한강 인도교에서 목숨을 잃거나 서울 수복 이후 부역자로 몰려 고초를 치르게 된다. 1953년 휴전 이후 부친이 총무처 차관에서 물러나면서 이 대통령과의 인연은 끝이 났다.

대학생 때는 이승만 부정선거 항의 시위에 앞장

"고대생들이 자꾸 시위를 미루길래 연세대에 가서 '고대가 안 한다는데 자네들이 먼저 하겠냐'고 물었다. 연대 쪽에서 하겠다는 답을 듣고 이세기 고대 정경대 학생회장에게 전하니 깜짝 놀라면서 '자기네가 먼저 하겠다'고 나섰던 거예요."
 "고대생들이 자꾸 시위를 미루길래 연세대에 가서 '고대가 안 한다는데 자네들이 먼저 하겠냐'고 물었다. 연대 쪽에서 하겠다는 답을 듣고 이세기 고대 정경대 학생회장에게 전하니 깜짝 놀라면서 '자기네가 먼저 하겠다'고 나섰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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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학교 정치학과에 재학중이던 1960년 4월 19일에는 오히려 이 대통령에게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묻는 시위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그때까지 3·15 부정선거 항의 시위에 고등학생들이 주로 나섰기 때문에 "대학생들은 도대체 뭐하냐?"는 비판론이 많았다. 4월 4일 전북대생 300여 명의 시위를 빼고는 대학가의 움직임은 조용했다. 윤여준의 회고다.

"대학생들이 고교생보다 계산이 복잡했겠죠. 일단 시위에 나서면 경찰의 총에 맞을 수 있다는 위험부담 안고 해야 하는 시절이었으니까. 사람인데 두려움이 없었겠어요? 4·19 때 실제로 발포해서 서울에서 수십 명 죽었잖아요?"

서울의 대학생 시위를 촉발하려고 고려대와 연세대의 오래된 라이벌 의식을 부추겼다는 그의 증언은 지금 들어도 흥미롭다. 당시 그는 서울시내 운동권들의 연락책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고대생들이 자꾸 시위를 미루길래 연세대에 가서 '고대가 안 한다는데 자네들이 먼저 하겠냐'고 물었다. 연대 쪽에서 하겠다는 답을 듣고 이세기 고대 정경대 학생회장에게 전하니 깜짝 놀라면서 '자기네가 먼저 하겠다'고 나섰던 거예요."

4월18일 오후 1시20분 고려대 교문을 나온 3000여 명의 시위대는 1시간 뒤 서울 태평로 국회의사당(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간다. 윤여준은 이날 현장에서 연세대 친구로부터 "이 자식아, 우리한테 먼저 하라고 해놓고서 고대를 나오게 했냐?"는 책망을 들었다.

그러나 윤여준은 인터뷰에서 "두 학교의 라이벌 의식을 알고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이날의 연좌 농성은 당일 저녁 7시 45분 귀가하던 고려대 시위대를 유지광 등의 정치깡패들이 종로4가에서 습격하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튿날 광화문 네거리에 10만 명의 시위대가 운집하는 4·19 시위의 물결은 4월 27일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나오고서야 진정됐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몰락이 민주주의의 정착과 민생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민주당 정권은 계파 갈등으로 구파(신민당)와 신파(민주당)로 분당되고, '정권교체'의 자긍심에 들떠있던 학생들의 실망감도 폭발했다.

1961년 3월 22일 오후 2시 서울광장에서는 윤길중과 장건상, 조용수 등 혁신계 인사들이 주도하는 반공법-반(反)데모법 2대악법 성토대회'가 열렸는데, 윤여준은 8000여 명의 시위대를 장면 총리의 혜화동 사저로 이끄는 계획에 가담했다.

"혜화동 로터리에 경찰이 포진해있었는데, 상업은행 지점 공사를 한다고 인도에 벽돌을 잔뜩 쌓아놓은 거예요. 흥분한 군중들이 그걸 경찰에 집어던지면서 난리가 난 거죠. 상황이 심각해진다 싶어서 나를 포함해 주동자들이 뿔뿔이 도주했어요. 나중에 경찰에서 조사받는데 내가 현장에 있던 모습을 다 채증해놨더라구요."

윤여준은 "공산주의 포함해서 다양한 이념들이 4·19 이후 분출했다. 학생들로서는 눈앞의 불의를 두고 볼 수 없다는 정의감도 있었지만, 이런 모습이 5·16 쿠데타의 빌미가 된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이후 그는 시위에 앞장서기보다는 막는 쪽의 입장에 서게 된다.

기자 시절 야당 출입하며 김대중·김영삼 취재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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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월 5일 윤여준은 62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동아일보 수습기자로 입사했다. 월간 '신동아'에서 3년 6개월 일한 그를 회사가 사회부에 발령하자 "동기들이 이미 거쳐간 부서 일을 처음부터 다시 할 순 없다"며 1969년 9월 경향신문 정치부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8년 가까이 야당을 출입하며 김대중과 김영삼, 이철승 등 차세대 정치유망주들을 취재하게 된다. 이 시절의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1972년 3월 24일 오전 10시 박정희 대통령은 대구 경북체육관에서 열린 전국교육자대회에서 "내외의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체적 민족사관을 정립해야 한다. 올바른 국가관에 입각한 교육을 지향해야 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분명히 뭔가 있는 것 같아서 '주체적 민족사관'이 무슨 뜻인 것 같냐고 야당의 세 중진에게 물어보니 이철승은 '그게 뭔소리냐'고 되묻고, 김영삼은 침묵하고, 김대중은 감각적인 정치 수사 정도로 받아들이더라. 그해 10월 17일 유신을 선언하고 나서야 박 대통령이 '주체적 민족사관 정립을 위해 유신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한편으로, 여기에 맞설 양 김씨의 식견이 이 정도 밖에 안되나 한숨이 나왔어요."

10월 유신 이후 정치가 마비된 시기에는 야당 정치인들 집에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다가 군대 시절 상관으로부터 "내부 회의에서 '기자 한두 놈 손봐야 한다. 경향신문 윤여준이라고 있다'는 말이 나왔다. 쓸데없는 짓 하지말라"는 경고를 받기도 했다.

기자 일에 흥미를 잃던 차에 김성진 문공장관(한국일보·동양통신 기자 출신)이 1976년 "언론사 선배들 상당수가 이미 해외공보관 일을 하고 있다. 함께 할 생각 있느냐?"고 제의했다. 대한적십자사 섭외부장이던 손윗누나 윤여훈씨가 같은 해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으로 발탁됐기 때문에 정부 일을 하는 것에도 큰 거부감은 없었다.

그는 1977년 3월 1일 경향신문을 퇴사한 뒤 8월부터 주일본대사관 공보관에 임용됐다. 그의 주업무는 문화 활동 홍보와 조총련의 반(反)한 활동을 모니터하는 것이었다. 박정희의 몰락과 전두환의 권력 장악은 두 번째 임지였던 싱가포르에서 지켜봤다. 윤여준은 "싱가포르 언론들은 한국관련 소식을 잘 안 싣는데 1980년 5·18이 터졌을 때는 신문과 방송이 1주일 내내 톱뉴스로 보도했다"고 회고했다.

1983년 2월 귀국한 그에게는 '문공부 홍보조정실 보도담당관'이라는 직책이 주어졌다. 정권의 입맛에 맞게 각 언론사의 보도를 통제하는 자리였는데, 더구나 그의 출입처가 얄궂게도 '친정' 동아일보였다.

"(편집부국장이었던) 남시욱 선배가 대놓고 말해요. '너, 이거 하면 안된다. 네가 해외에만 있어서 잘 모른다. 너는 이걸 공무집행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고심 끝에 야당 출입기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채문식 국회의장 공보보좌관으로 (1983년 5월 경에) 옮겼죠."

그러나 채문식 의장은 더 이상 야당의 중진의원이 아니었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던 여당(민정당) 소속 국회의장이었다.

전두환·노태우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언론 담당

윤여준은 1984년 1월 4일부터 국회의장실에서 청와대 공보수석실로 근무지를 옮긴다. 대통령의 경제분야 지시사항 및 부인 이순자씨에 대한 공보 관리가 그의 주요 업무였다. 이 시절의 그에 대해 "전두환 부인 이순자가 시중에서 웃음거리로 오르내리니까 이순자의 언론 노출을 조정하는 '이순자 전담 비서관'에 윤여준을 앉힌 것"(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라고 비난하는 이도 있다. 윤여준도 이런 비판을 애써 부인하지는 않았다.

"이순자 여사의 공식 일정이 많았는데, 그걸 다 보도하더라. 내가 들어가서 그걸 1/4로 줄였고, 전 대통령도 '잘 했다'고 했다. MBC에서는 문화부 박영선 기자가 이순자 여사를 담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도량이 줄어드니 이 여사가 처음에는 섭섭해하다가 'KBS와 MBC 보도 내용이 각각 다르니 좋다. 그런데 대통령 관련 보도는 바뀌는 게 없냐'고 한마디 하시더라. 그게 될 리가 있나요?"

윤여준은 "1979년의 10·26은 작게는 유신, 크게는 권위주의 체제의 종말을 의미했는데 전 대통령은 그 의미를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집권 기간에 권위주의 체제를 답습하려고 한 것"이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1987년 전두환 대통령의 철권통치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해 4월 13일 대통령직선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기존 헌법대로 체육관에서 대선을 치르겠다고 하자 반대여론이 비등했다. 그 다음날 청와대 회의에서 이종률 공보수석이 비서관 한 명 한 명에게 4·13 조치에 대한 생각을 묻자 윤여준은 "4·19 이후 가장 광범위하고 강력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고 답했다. 원하던 답이 안 나오자 이 수석은 삿대질을 하며 "청와대 비서관이 그 따위 생각을 하냐? 당신은 청와대 있을 자격 없으니까 나가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석달 뒤 이종률 수석은 정무장관에 임명돼 청와대를 나가지만, 정작 윤여준은 노태우 정부 출범 후 정무비서관으로 이동해 청와대 근무를 계속했다. 최병렬과 최창윤 두 정무수석을 거치는 동안 그의 주요 업무는 대언론관계 조율이었다.

특히 KBS의 경우 서영훈 사장의 취임(1988.11.04) 이후 방송민주화의 물결이 밀려왔지만, 그는 이 물결을 막아서는 '악역'을 맡아야 했다.

"홍성철 청와대 비서실장 주재로 삼청동 안가에서 대책 회의가 열렸어요. 장관, 수석들 모두 별 문제없다고 넘어가는데 홍 실장이 '업무 맡을 사람은 당신이니까 의견 얘기해보라'고 해서 저는 반대한다고 했어요. 물론 그동안 억누른 게 있으니 방송 모르는 사장이 오면 언론자유의 신장에 도움 되는 측면도 있겠지만 KBS라는 방만한 조직을 운영하다가 문제가 생길 것으로 본 거죠. 그런데 그 소식을 나중에 들은 서 사장이 누님(윤여훈)에게 '당신 동생 때문에 사장 발령이 안 나고 있다'고 항의전화를 하고… 그래서 다음 회의에서는 아무 말 안 하고 넘어갔어요.(웃음)"

KBS '대검 꽂은 진압군' 보도, 궤변해 가며 막으려 했지만...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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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훈 체제의 KBS는 1989년 3월 8일 '광주는 말한다' 방영으로 정치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특히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착검 상태의 M16 소총을 들고 시위대를 쫓는 진압군의 사진은 "대검을 총에 꽂은 일이 없다"는 진압군 대대장의 광주 청문회 증언(1988.12.20)을 거짓말로 만들었다.

"최창윤 정무수석(육사 18기)은 '방송 나가는 걸 막아야 한다. 그게 안되면 내용이라도 고쳐야 한다'고 해서 내가 어쩔 수 없이 KBS 간부와 PD들을 만났어요. '이게 나가면 국가에 무슨 이익이 있냐'는 궤변까지 동원해서 설득했어요. 특히 홍 실장과 최 수석 모두 '대검 착검' 사진은 '무조건 빼야한다. 안 되면 윤 비서관이 방송국 기계 앞에 들어가서 앉으라'는 입장이었어요. 하지만 나도 PD들 만나서 그 부분은 길게 얘기 안 했어요. 한 걸 안 했다고 청문회에서 위증한 거 아니예요?"

보다못한 정권이 1990년 2월 감사원을 동원해 회사 비리를 들쑤시는 방식으로 서 사장의 사표를 받아냈다. 이명박 정부가 2008년 8월 정연주 KBS 사장을 몰아낸 방식의 원형이 바로 1990년의 '서영훈 모델'이었다.

그해 4월 들어 KBS 창사 이후 첫 파업이 벌어지자 사태 수습의 책임이 그에게 떨어졌다. 윤여준은 "나는 막아야 하지만, 내가 기자라도 그런 운동을 안 할 수 있겠냐는 심정이었다"고 회고했다.

"4월 30일 저녁 노조원 농성 해산하려고 경찰 투입하기 전에 내가 관할 영등포서장에게 이런 지침을 줬어요. 3배수 병력 투입하되 신속히 끝내라, 단순 가담자들은 빠질 수 있도록 퇴로는 열어줘라, 직원들 감정 자극하지 않도록 경어를 사용하라. 노조 지도부는 이미 피신했지만 수배령이 떨어져 있어서 가족들에게 일일이 전화 걸어서 '죽을 죄 지은 것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시국 때문에 그러니 조금만 참으라'고 안심시켰다."

더 나아가 그는 안면을 튼 KBS 간부를 통해 수배중인 노조 간부들의 도피 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고 한다. 윤여준은 자금 출처에 대해서는 "대통령 통치자금도 업무추진비도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친구들에게 돈 필요하다고 하니 큰돈은 아니지만 선뜻 주더라"며 입을 닫았다.

"기자들이 무슨 돈이 있냐? 도망다니더라도 밥 먹고 여관에서 잠은 자야할 것 아니냐? 당시 상황이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지만, 이미 파업 전에 몇 차례 만나서 막걸리도 한잔 하면서 굉장히 친해진 상태였다. 그들도 청와대 비서관이 아니라 인간 윤여준을 보고 (돈을) 받은 것이다. 수배자들에게 자진 출두를 계속 설득해서 원만하게 상황을 풀어갔다."

검찰은 노조 간부들을 불구속 기소했지만, 이들은 이듬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전원 해직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윤여준은 1991년 7월 정무장관 보좌관, 1992년 3월 안기부장 특보를 거쳐 1994년 12월 23일 청와대 대변인 겸 공보수석으로 다시 발탁됐다.

1994년 6월 남북정상회담 실무준비회담에서 안기부 대표로서 북측 대표를 상대하는 모습이 김영삼 대통령의 눈에 들었다고 한다. 정상회담 자체는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무산됐지만, 윤여준의 관운을 이어주는 데는 큰 기여를 한 셈이다.

대통령 '김현철 국정개입 사과' 담화문 작성

"오래 전 일이라서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김 대통령의 성격으로 봐서는 당연히 화를 냈겠죠. (전두환의) 유치한 도전 아닙니까? 하지만, 그런 사건이 터질 때 대통령의 반응을 즉각즉각 알리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했어요. 나도 말이 안 되는 줄은 알지만, 사실대로 얘기하면 그게 또 다른 파장을 낳을 것이고."
 "오래 전 일이라서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김 대통령의 성격으로 봐서는 당연히 화를 냈겠죠. (전두환의) 유치한 도전 아닙니까? 하지만, 그런 사건이 터질 때 대통령의 반응을 즉각즉각 알리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했어요. 나도 말이 안 되는 줄은 알지만, 사실대로 얘기하면 그게 또 다른 파장을 낳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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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대변인의 가장 큰 고민은 거짓말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린다는 점이다. 1995년 12월 2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에 반발해 연희동 골목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던 날 윤여준 대변인은 "대통령은 TV를 안 봤고,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정말 그랬을까?

"오래 전 일이라서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김 대통령의 성격으로 봐서는 당연히 화를 냈겠죠. (전두환의) 유치한 도전 아닙니까? 하지만, 그런 사건이 터질 때 대통령의 반응을 즉각즉각 알리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했어요. 나도 말이 안 되는 줄은 알지만, 사실대로 얘기하면 그게 또 다른 파장을 낳을 것이고."

청와대 대변인 시절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은 1997년 2월 25일 오전 9시 30분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 4주년 특별담화였다. 김 대통령은 이날 "아들의 허물은 아비의 허물"이라며 차남 현철의 국정개입을 사과해야 했다. 대통령이 읽고 싶지 않았던 이 담화문의 필자는 윤여준이었다.

윤여준은 김영삼정부의 마지막 환경부 장관으로 행정부 일을 마치게 된다. 그는 "장관 임명장을 받고 김 대통령과 악수하는데, 대통령이 다른 장관 안 들리게 작은 소리로 '재밌어?'라고 할 정도로 인간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김영삼에서 김대중으로 정권은 교체됐지만, 그의 정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1998년 설 연휴(1.27~29)에 이회성(이회창의 동생)의 주선으로 97년 대선에서 떨어진 이회창씨를 만났다. "장관을 마치게 되면 도와달라"는 말에 그는 두 말 없이 응했고, 이회창은 그해 8월 31일 전당대회에서 한나라당 총재로 선출됐다.

경선 득표율 정확히 맞춰 이회창 신임 깊어져

이회창의 경선 캠페인을 기획한 윤여준은 이때 득표율을 정확히 맞췄고, 이 총재의 신임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나라당 이회창 체제가 들어선 다음날 국세청 세풍사건 수사의 한파가 몰아쳤다. 이 총재는 98년 9월 15일 대구를 시작으로 99년 1월 24일 마산, 1월 31일 구미 장외집회를 이어가며 지지층을 결집했다.

"총재 주변의 중진들 대부분이 영남이었고, 당의 지지기반이 주로 그쪽이다 보니 (영남으로만) 계속 가더군요. 내가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 말렸지만 이 총재는 '김대중정부가 탄압하는데 우선 살고봐야 하지않냐'는 거였어요."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이른바 '금요대학살'로 당내 중진들을 대거 탈락시키는 물갈이 공천을 단행했다. 그 중에는 청와대 시절부터 그를 이끌어줬던 민정계의 중진 김윤환 의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총선 승리와 함께 '이회창 대세론'도 공고화됐다. 그러나 2002년 대선의 해가 되자 이 때문에 하순봉 양정규 신경식 등 실세 측근들의 집중견제에 시달리게 됐다. 이회창 측근 그룹에서 밀려날 때 이회창의 부인 한인옥씨 입김이 작용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윤여준은 "한인옥씨가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고 하면서도 더 이상의 언급을 피했다.

"로비스트 최규선으로부터 윤여준 의원이 미화 20만 달러를 받았다"는 설훈 의원의 폭로 기자회견(4.19)도 그의 입지를 축소시켰다. 최씨와 몇 차례 만난 것을 들어 수뢰 의혹을 제기하자 그는 1주일 동안 단식농성을 했다. 대법원이 설 의원의 허위 폭로를 유죄로 확정한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의 일이었다.

"단식농성 할 때 아들들에게 전화가 왔어요.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저희는 아버지를 알잖아요. 100% 신뢰하니까 소신대로, 생각대로 하세요'라고. 그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될 수 없더라."

2012년 대선을 9일 앞두고는 이회창 후보가 그를 수배해 선거대책회의에 긴급 투입했다. 당시 한나라당 대선 캠프의 투톱은 정형근 전략기획팀장과 김무성 미디어대책본부장이었는데, 윤여준은 "첫날 회의 들어가보니 일은 자기들이 다 해놨는데 '이제 와서 왜?'라는 표정이었다. 더 이상 안 갔다"고 말했다. 이회창 후보에게 더 이상 대통령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오세훈-문재인-안철수... 선거 때마다 활약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2012년 대선캠프 참여할 때부터 '박정희 묘소 참배해야 한다'고 계속 얘기했는데 '맡겨달라'는 말만 하고 끝내 안 했다. 지금이라도 한 걸 보니 본인도 생각이 많이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잘한 것이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2012년 대선캠프 참여할 때부터 '박정희 묘소 참배해야 한다'고 계속 얘기했는데 '맡겨달라'는 말만 하고 끝내 안 했다. 지금이라도 한 걸 보니 본인도 생각이 많이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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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도 정치권은 선거 때마다 그를 찾았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부산 지역구로 내려간 김형오 사무총장을 대신해 서울의 한나라당 선거대책본부를 이끌었다. 그해 4월 15일 인터뷰에서 그는 한나라당의 예상의석수를 113∼115석으로 잡았는데, 이틀 뒤 선거 결과는 121석이었다.

당의 주류로 막 떠오른 박근혜 대표를 포함해 윤여준을 찾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지만, 그는 5월 30일 국회의원 임기 종료와 함께 한나라당에 탈당계를 제출했다. 2006년 오세훈 서울시장 캠프 공동선대위원장,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 국민통합공동위원장, 2014년 안철수의 새정치추진위원회 의장 등이 이후에도 그를 따라다닌 직함들이다.

많은 이들이 지금도 그에게 정치적 난국을 헤쳐 나갈 비책이나 책략을 주문하지만 "하늘 아래 그런 건 없다"는 게 그의 일관된 답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2012년 대선 이후 한국정치를 이끌어온 세 인물에 대한 약평을 부탁했다.

윤여준이 본 박근혜·문재인·안철수

박근혜 대통령 - 모든 문제는 대통령 리더십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분의 폐쇄적, 권위주의적 리더십이 시대와 충돌할 거라는 얘기를 오래 전부터 수도 없이 했다. 해법은 다 알지 않나? 본인이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아무 일도 안될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 2012년 대선캠프 참여할 때부터 '박정희 묘소 참배해야 한다'고 계속 얘기했는데 '맡겨달라'는 말만 하고 끝내 안 했다. 지금이라도 한 걸 보니 본인도 생각이 많이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잘한 것이다. 대선 당시 보수는 정권을 절대 내주면 안된다는 위기감이 강했는데, 진보는 젊은 층만 뭉치면 이긴다는 착각에 젖어 있었다. 이 틀을 깨야 한다.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의원 -  재도전 의지는 있는 것 같은데, 본인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면 국민들은 '정치 처음 하니까 실수할 수도 있지, 뭐'하며 한번쯤은 기회를 주지 않을까 싶다. 대통령이 되는 게 목적인지, 한국 정치를 바꾸는 게 목적인지 원점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으로는 어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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