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방한중인 리콴유를 만나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
▲ 김대중과 리콴유의 만남 방한중인 리콴유를 만나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관련사진보기


리콴유 전 싱가포르 수상이 타계했다는 소식에 한국 언론은 비교적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더욱이 박근혜 대통령은 직접 장례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싱가포르가 국제적인 영향력이 큰 대국도 아니고 정치, 경제, 군사 등 여러 면에서 한국과 긴밀한 연관성도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특이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죽음에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의 정치사상과 근대화 전략이 아직도 첨예한 논쟁이 이뤄지고 있는 한국의 근대화를 이해하는 데에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한국의 주요 정치지도자들과 직·간접적인 인연을 맺었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갖는 정치적, 학문적 의미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1999년 방한... 김대중 대통령과 격조 높은 이야기 나눠

이와 같은 시각에서 이 글은 리콴유와 김대중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리콴유는 1999년 10월 22일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자문단 일원으로 방한했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회동하였다. 당시 두 사람의 만남을 다룬 기사를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두 사람 사이에 논쟁은 없었고 격조 높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식으로 다룬 기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논쟁'과 '격조 높은 대화'로 상징되는 두 사람의 만남. 당시에 그런 기사가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두 사람은 김대중이 아태재단 이사장 시절인 1994년에 아시아 민주주의 문제를 두고 국제적인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논쟁을 시작한 쪽은 김대중이었다. 리콴유는 1994년 미국의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3~4월호에 실린 인터뷰를 통해서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는 아시아의 민주주의 전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서구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회적 병폐를 지적하면서 아시아 전통 문화가 서구 현대 문명이 초래한 구조적 병폐를 해소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리콴유는 현재 통용되는 민주주의를 서구 문명의 특수성의 산물로서 인식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현대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서구 문명과 결부시켜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리콴유의 시각을 단순히 정치적 독재를 옹호하는 논리로 격하시켜서는 곤란하다.  리콴유는 서구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공동체 해체 현상과 도덕 붕괴 현상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 동양의 가족주의적 문화 전통이 큰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리콴유는 개인화를 초래하는 서구 자유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확장시켜서 자유주의와 함께 발전한 서구 민주주의 사상과 제도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와 같은 시각은 청나라 말기의 중체서용(中體西用)론과 조선 말기에 나타난 동도서기(東道西器)론과 유사해 보이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 김대중은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지 1994년 11-12월호에 '문화란 운명인가?'라는 기고문에서 리콴유의 시각에 대해서 조목조목 반박을 하고 있다. 김대중의 이 글은 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대중은 먼저 리콴유의 주요 견해를 소개하면서 그 내용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고 그 다음에는 아시아 전통 문화에서의 민주주의적 요소를 사상과 제도의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아시아의 민주주의 전통이 전 지구적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김대중은 리콴유의 시각에 대해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판하고 있는데, 리콴유의 입장에 대한 김대중의 시각을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문장은 '리콴유씨의 견해는 잘못된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입지를 위해 견강부회하고 있다고 생각된다'고 썼다. 국제적인 지도자들 사이의 논쟁이므로 표현의 수위를 고려한 것이지만, 이 표현을 단정적으로 한다면 '리콴유의 주장은 잘못되었고 궤변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이 말하는 김대중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러면 먼저 김대중은 리콴유가 무엇이 틀렸다고 판단하고 있는가? 현대 사회의 여러 병폐을 서구 문명의 산물로 인식하는 리콴유와 다르게 김대중은 이를 산업사회의 기본적인 부작용으로 파악한다. 그 근거로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동양문화권 국가에서 서구 사회와 유사한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김대중은 도덕 및 공동체의 약화와 같은 산업사회의 부작용은 자본주의 산업화를 하고 있는 어느 곳에서나 나타나는 보편적인 문제점이라고 지적하고, 싱가포르 역시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 강력한 공권력을 동원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김대중은 '경찰국가'로 불리는 싱가포르의 강력한 통제정책은 문화적 차이가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 김대중은 리콴유의 주장 중에 무엇이 궤변이라고 판단하고 있는가? 김대중은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동양 사상과 문화를 존중하는 것을 지지한다. 그런데 리콴유가 이 논리를 갖고 '민주주의'를 특수한 서구 문화의 산물로서 규정하고 그 외의 통치 사상이나 제도(사실상 독재를 의미)를 동양적 특수성의 산물로서 인식되도록 하는 프레임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김대중은 인식한다.

김대중은 격조 높게 '견강부회'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아마 일반 논객이나 지식인이 이 문제에 대응했다면 단박에 '궤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김대중은 리콴유가 정치적 독재를 옹호하기 위해 인과관계가 없는 사안을 무리하게 연결시키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김대중은 아시아 문화와 전통에서 민주주의 사상과 제도의 다양한 내용을 언급하면서 서구에 못지않은 동양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김대중의 이와 같은 인식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김대중은 한국을 포함해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민주화 운동가이자 사상가였다. 아직 그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본격화되지 않아서 그렇지만 다른 민주화 운동가와 큰 차별점을 갖는 부분은 그가 민주주의 이념에 대해서 논쟁을 한 이론가이자 사상가였다는 사실이다.

김대중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먼저 김대중은 서구 대 동양의 이분법적인 구분 속에서 서구 문명만이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는 서구 우월주의적 시각을 비판하였다. 이와 같은 비판은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이후 1973년 8월 망명하기 전까지 1차 망명 기간 동안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김대중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에서의 독재가 지속되고 강화되는 원인으로 반공이라는 미명하에 우익독재정권을 지지하는 미국의 대한정책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들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가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김대중은 지적한다.

이는 서구 사회의 동양에 대한 편견과 무지의 결과로서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라고 김대중은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은 미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한국의 민주주의 전통과 능력을 강조함과 동시에 진정한 반공은 민주주의 강화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점을 역설했었다. 이처럼 아시아 민주주의의 전통을 강조한 것은 미국의 대한정책을 변경시키기 위한 민주화 투사 김대중의 현실 전략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국내적으로 김대중은 권위주의 세력과 논쟁하였다. '민주주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시각은 서구에서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있었다. 리콴유처럼 한국의 권위주의 발전전략을 내세운 세력은 '한국적 민주주의'에서 보듯 민주주의를 유보하고 억압하는 근거로서 '한국적'과 같은 문화적, 국가적 특수성이 개입된 담론을 내세웠다. 이에 대해서 김대중은 서구와 동양을 불문하고 민주주의 전통과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문화적, 민족적 특수성을 내세워 정치적 독재를 옹호하려는 세력을 비판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 속에서 민주주의 근원 찾으려는 김대중의 시도

아시아와 한국의 전통과 문화 속에서 민주주의 근원을 찾으려는 김대중의 시도는 여러 측면에서 전략적이다. 앞에서 '한국적'이라는 수식어에서 보듯 권위주의 세력은 민주주의에 대해서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 프레임으로 접근하여 국민들의 인식에 혼돈을 주려고 한다.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적 감성은 근원적이고 감성적인 성격을 띠게 되므로, 이성적인 근거와 논리만으로 대처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우리의 전통과 역사를 통해서 반박하고 민주주의를 옹호할 수 있다면 가장 최적의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김대중이 이것을 인식하고 이와 같은 전략을 세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치밀한 그의 정치 전략을 고려할 때 충분히 이를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사상가이며 이론가이자 행동하는 실천가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1994년에 있었던 리콴유와 김대중의 논쟁과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김대중의 한국(아시아) 민주주주의론의 이론적, 실천적 성격을 간단하게나마 살펴보았다. 이 글을 마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누구의 입장을 지지하든 말든, 위와 같은 논쟁은 그 자체로 매우 의미가 있고, 공동체 발전을 위한 전략을 모색하는 과정 속에서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렇게 볼 때 요즘은 그와 같은 격조 높은 논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 빈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이념적 낙인과 감성적인 비방뿐이다. 이것은 지극히 소모적이다. 이런 소모적인 쟁투나 할 정도로 현재 우리 사회가 안정적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김대중과 리콴유, 두 정치적 거인 사이의 논쟁을 통해서 든 생각이다.

덧붙이는 글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페이스북에도 올립니다.



태그:#김대중, #리콴유
댓글34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