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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일 후에도 해결 되잖아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의 노숙농성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청소노동자에게 닫힌문이 활짝 열리기를 바랍니다.
▲ 울산과학대 앞에서 1인 시위하는 김순자 청소노조 대표 300일 후에도 해결 되잖아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의 노숙농성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청소노동자에게 닫힌문이 활짝 열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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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파업 승리! 최저임금 1만 원! 영남권 노동자 결의대회 후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 파업 300일 연대의 날 문화제가 있습니다. 함께 참여 합시다!"

지난 11일 오후 2시. 울산 동구 일산해수욕장 작은 공터에서 영남권 노동자 결의대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1.2키로 걸어서 울산과학대까지 갔습니다. 오후 4시경부터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 파업 300일 연대의 날 문화제'를 시작했습니다.

섬과 섬을 잇다.
외딴 투쟁의 섬들을 잇는 희망의 연대

문화제 주제가 그랬습니다. 그 취지에 맞는 네 곳의 노동조합이 소개되었습니다. 먼저, 쥐가 득실대는 환경, 수당도 없는 노예노동, 인간답게 살기 위해 싸우는 부산합동양조 생탁막걸리 노동자들(파업 12개월). 둘째로, 손배가압류! 직장폐쇄! 노조탄압에 맞서 굽힘없이 싸우는 창원 자동차부품 베어링 생산. 창원 KBR 노동자들(파업 12개월). 셋째로, 먹튀자본의 폐업과 해고에 맞서 민주노조 사수와 고용승계를 위해 싸우고 있는. 구미 굴뚝농성 스타케미칼 노동자들. 넷째로, 최저임금 굴레를 벗어 던지고 생활임금을 위해 원청인 대학과 싸우는.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들(파업 300일).

그날(4월 11일 오후 4시) 울산과학대 입구에 있는 분수광장에서 펼쳐진 문화제에선 떡과 음료, 달걀이 공짜로 참석자들에게 제공되었습니다. 음식을 타 들고 자유로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무대 행사를 지켜보았습니다. 노동가요와 율동으로 사전행사를 한 후에 네 곳의 노조 대표가 나와 눈물겨운 파업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모두 힘들고 어렵게 노동자도 사람임을,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한 몸부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노조를 모두 찾아가 그들이 처한 노동현실에 대해 알아보고 싶지만 저 또한 우리 가족의 생존권을 지켜내기 위해서 직장에 얽매여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라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 대신 울산과학대는 우리 마을에 있고해서 피곤해도 시간을 쪼개어 찾아가면 청소 노동자 노조 대표를 만나볼 수는 있었습니다.

지난 11일 '섬과 섬을 잇다'에 청소용역노조 대표가 나와 "한때 정몽준 선거운동을 열심히 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번 만나보고 싶어졌습니다. 허나 청소용역노조 대표가 저와 이야기 나눌 시간이 되는지 또한 마음은 내키는지 그건 알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되거나 말거나 일단 부딪혀 보기로 했습니다.

"옛날엔 노동자들이 데모하는 것 보고 땡깡 부린다 여겼죠"

섬과 섬을 잇다. 소외된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에 함께하는 사람들이 보기 좋았습니다.
▲ 파업 300일 연대문화제 섬과 섬을 잇다. 소외된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에 함께하는 사람들이 보기 좋았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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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장님 이번 금요일 저녁(4월 17일, 20시후)에 인터뷰 좀 하고 싶은데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지난 14일 오후 5시경이었습니다. 울산과학대 청소 노동자가 왜 파업을 하는지 알리려고 승합차에 현수막 두르고 거의 매일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마침 제가 일하는 도로 앞을 지나면서 신호등에 걸려 멈추기에 발빠르게 달려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는 대답을 듣고 그날 저녁에 가겠다고 약속하고 다시 일터로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17일 저녁 그분과 이야기 나누어 보려고 퇴근하면서 바로 울산과학대로 찾아 갔었습니다. 현대에서 만든 대학교라 그런지 학교 건물이 멋지게 잘 지어져 있었습니다. 학교 뒤편에 과학대 청소노동자의 파업농성장으로 보이는 움막이 하나 지어져 있었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청소노동자와 함께 김순자 위원장도 보였습니다.

"오늘 제가 방문한 것은요. 뭐 파업에 대해선 언론에서 많이 다룬 거 같아서요. 저는 김순자 위원장님의 살아온 이야기가 궁금해서 들어 보려 왔습니다. 지난번 연대의 날에 위원장님이 정몽준 선거운동 열심히 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어쩌다 지금처럼 노동투사가 되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김순자님은 그러냐면서 차분하게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53년에 언양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울산엔 78년 결혼 후 오게 되었고 동구로는 87년도에 이사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지요. 남편이 몸이 안 좋아 남편 퇴직금하고 집팔아 동구로 왔어요. 동구는 현대중공업이 있으니까 장사라도 하면 잘 될 거 같았어요. 중국요리집도 하고 당구장도 하다가 93년경 남편을 잃었어요. 41살에 홀몸으로 자식을 키웠어요. 2년 동안 아무것도 못하다가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95년부터 사회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때만 해도 조선소가 잘 돌아가야 장사가 잘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땐 데모는 배부르니 한다고 생각했어요."

- 사회활동 하게 된 계기는요?
"93년 남편이 돌아가신 후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사회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95년부터 2003년까지 했었는데 이웃의 어느분이 활동하면 기분 전환도 되고 아는 사람 폭도 넓어진다고 해서 시작하게 되었지요. 제 성격이 가만히 못 있고 나서는 성격이라서 흥미가 생겼어요. 아무것도 모르던 때라 주로 관변단체 활동을 많이 했지요. 바르게살기위원회, 신고계도회(반공멸공회) 같은 곳에서 활동했어요. 경찰서와 연계해 방범활동도 하고, 지역별로 대청소도 하고 탈북자도 돕는 활동이었지요."

김순자님은 현대주부대학 8기라고 합니다. 현대중공업에서 관리하는 한마음회관이 있는데 거기서 운영하는 공부모임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정몽준 국회의원 선거 운동에도 참여하고 한나라당 지역 여성회장도 하면서 선거운동과 정치활동에 눈뜨게 되었다고 합니다.

- 노조활동 하게 된 계기는요?
"저는 처음에 노동자들이 데모하는 것을 보고 일하기 싫어 땡깡 부린다고 여겼어요. 골목골목 다니면서 파손 현장을 구경하기도 했었어요. 그러던 제가 노조활동 하게된 게 생각해보니 젊은 시절부터 그런 끼가 있었나봐요. 70년대 언양 작은 기업 노동자로 2년 다닐 때도 부당한 처우 개선을 위해 앞장서기도 했어요. 전두환 정권 당시엔 비포장 도로라 먼지가 많이 나는 걸 물류기업에 맞서 동네 사람들과 평상으로 길을 막아 물뿌리며 다니기로 합의 본 일도 있고요. 아마 그런 경험이 내 속에서 꿈틀이고 있었나 봐요.

제가 울산과학대에 발을 들여놓은건 2003년 9월경이었어요. 먹고 살려니 뭐라도 해야 했지요. 저는 배우지 못해서 이웃에서 대학에 청소원 모집한다는 소리에 큰 기대를 품고 입사 했지요. 우리 자식같은 대학생들 화장실 청소해 주는 게 신나더라구요. 벽면에 이런 문구를 봤어요. '책을 읽고 지식을 얻는 것은 약한자를 돕고 사랑할 힘을 얻기 위함이니라.' 그 글귀를 보고 감동 받았어요. 햐~ 대학은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당시 월 55만 원 받고 일했지만 대학생과 함께 지낸다는 생각에 마냥 행복했어요."

이웃의 소개로 들어간 대학 청소원. 알고보니 업체를 통한 용역이었습니다. 처음엔 오후 6시 출근하여 다음날 오전 11시 퇴근하는 야간 일을 했었다고 합니다. 3개월 후 방학이 되어 주간으로 옮기고 11명과 같이 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경비와 청소 담당 반장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11명중 관리자만 4명이나 되었고 그들의 감시에 시간이 지날수록 다툼이 생겼다고 합니다.

"저는 대학내 화장실이나 복도 청소만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청소는 4시간 하고 나머지 시간은 화단에 풀도 뽑으라 하고 학생들 책걸상도 나르라 하고 별의 별걸 다 시켜 먹었어요. 나중에 알아보니 직영과 하청이 있었어요. 저는 하청업체 소속된 비정규직임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지요. 직영은 쉬운 일을 했는데 우린 하청이라고 힘든 일만 시켰어요.

우리가 60만 원 월급 받을때 직영 월급을 알아보니 250만 원 정도 되더라구요. 더 힘든일 하는데 임금 차이가 너무 나잖아요. 차이 나는 건 임금 뿐만이 아니었어요. 직영 청소원은 학교 식당에서 밥 먹는데 우린 같은 건물 청소 하면서도 우리끼리 밥을 싸와 먹었어요. 계속 일하다 보니 부당함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지요. 하소연 하면 그만두면 될 거 아니냐고 했어요. 우린 사람이 아니었어요. 파리목숨이었어요.

어느날 청소가운 입고 쉬는데 복장이 불량하다며 반장이 혼내는 거예요. 비참한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났어요. 하루 일 안 나갔어요. 그만두고 싶었지요. 동료가 위로해서 다시 출근했어요. 저는 아마도 노동조합이 아니었더라면 때려 치웠을지도 몰라요. 노조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고 조선소나 자동차 같은 대기업에서나 노조하는 줄 알았거든요."

"우린 밥 달라고 노조 만들었다고 했어요"

새로 달아놓은 현수막을 또 누군가 칼로 그어 놓았습니다.
▲ 또 누군가 훼손한 현수막 새로 달아놓은 현수막을 또 누군가 칼로 그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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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에서 노동조합 조직하러 왔지만 "노조 만들면 잘린다더라"며 대부분 등을 돌리고 있을 때 김순자님은 호기심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민주노총 관계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노조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2006년 6월경 울산과학대 업체소속 경비가 먼저 노조를 만들었고 그후 업체소속 청소노동자도 노조를 결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노조가입해야 해고 안 된단다. 왜 거꾸로 알고 있노? 하면서 동료들을 설득했어요. 그렇게 노조가입을 하고 노조를 결성하게 되었어요. 그때가 2006년 6월경 일이었지요. 노조가입 하고 나니 정보과에서 찾아 왔어요. 대학 건물을 청소하고 있는데 와 밥을 안 주노? 그래서 우린 밥 달라고 노조 만들었다고 했어요. 노조원 끌고가 월급에서 공제하라며 외상 밥 먹었어요. 3개월 그렇게 하니 학교에서 밥 먹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어요."

- 이번 파업을 하게 된 계기는요?
"2014년 3월 중순부터 교섭을 했어요. 하는 일에 비해 월급이 너무 작아요. 그래서 생활임금 달라고 했는데 업체랑 이야기 하라며 교섭을 거부 하잖아요. 이 학교 실세가 정몽준 의원이라 의원실 찾아가 시위도 해보고 했지만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6월 16일부터 파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김순자님은 하청업체 청소노동자로 노조활동 하면서 세상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노동현실에 눈뜨게 되면서 먼저, 지난날 관변단체 활동하면서 받은 갖가지 표창장을 모두 찢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녀를 이렇게 변화 되도록 한 계기는 어느 집회에서 였다고 합니다.

"2006년에 노조가입만 하고 눈치만 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날 민주노총에서 장애인 이동권 궐기대회 한다고 가자고 했어요. 거기 가보니 여러 부류의 장애인들이 많이 나와서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어요. 장애인들은 사회에서 편견이 많잖아요. 그래서 시설에 가둬 놓거나 집에 있거나 하잖아요. 장애인 있다고 하면 결혼도 못해요. 짐이고 부담으로 인식되고 있잖아요.

'하늘이 보고 싶어 탈출 했어요. 우리도 사람입니다.'라고 뇌성마비를 가진 한 장애인이 이야기 하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눈물이 얼마나 쏟아지던지요. 그때 속으로 장애인도 자기주장 하면서 열심히 사는데 나는 50대까지 살아오면서 참는 데 길들여져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육신은 장애지만 정신은 나보다 낫구나 하면서 그분들이 훌륭하게 보였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많이 반성도 하고 제 인생이 달라졌어요."

지금은 학교 건물 뒷편에 작은 천막을 치고 파업중입니다.
▲ 울산과학대노조 파업 300일 지금은 학교 건물 뒷편에 작은 천막을 치고 파업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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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일 그 후 상활과 희망은요?
"지난 4월 11일 우리가 파업해온 지 300일이 되었어요. 학장이 커터칼로 우리가 붙여놓은 현수막을 난도질 하러 다니고 학생들 학점과 취업을 미끼로 리본 뜯기 작업을 시키기도 했지만 얼마전(300일 전) 동구청에서 대학 관계자와 업체 대표, 노무사가 모여 교섭하자고 모인 적이 있어요. 대학 총장이 아버지라면 우리 청소원들은 자식일 수 있잖아요. 자식이 배고픈지, 어디 아픈지 좀 돌봐주는 게 아비된 도리 아닌가요?

노조활동 하면서 해고되고 권리 찾고 하는 과정에서 노조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청소원 되기 전에는 개인이기주의고 나밖에 모르던 게 연대하는 사람들 많이 나서서 도와주는걸 보고 많은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추울 때도 함께하고 기금도 모아 주는거 보고 함께사는 사회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정당하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길 가야 제대로 된 권리를 쟁취할 수 있습니다. 짓눌리던 지난날 관리자 눈치볼 때보단 요즘이 마음이 편합니다. 그것이 노동조합의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참 당찬인생인 거 같았습니다. 김 대표는 지난 2012년 대통령 선거 때 현직 청소노동자로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대통령 후보로 나서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저는 노조활동에 전념하고 있었어요. 어떻게 하면 청소노동자 권리 찾을까만 고민하고 있었지요. 청소노동자 권리를 위해 적합한 정당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정치활동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지요. 어느날 한 정당에서 "우리 당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청소노동자 투쟁을 이끌고 있는 김 위원장님을 이번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어요"라고 하대요?

처음엔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했죠. 계속 함께 해보자고 했지만 거절했어요. 그러다 알바 노동자도 힘들게 살고 있음을 알고 알바들의 현실을 이번 기회에 알려보자고 결심을 하게 된 거죠. 그때 우리가 들고 나온게 알바 최저시급 1만 원이었어요. 지금 알바노조가 그것을 이어받아 열심히 투쟁하고 있어요. 저는 그랬어요. 청소노동자. 비정규직,불완전 노동자도 대통령 후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정치 별거 아니라고요. 기득권자나 부자만 하는 게 아니라구요. 국민 안중에도 없는 정치현실에 도전장 내민거죠. 청소노동자가 살기 좋으면 세상이 살기 좋아집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청소노동자도 대통령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 서민들에게 주고 싶었어요."

그때 몇개월간 진행했던 대통령 후보 운동으로 그녀는 경제공부와 정치공부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고생은 많았지만 좋은 공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날 밤과 아침에 저는 김순자 청소노동자로부터 진솔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현대미포조선 한 하청업체가 60여 명의 직원 임금을 떼어먹고 도망 갔다고 하네요. 그 노동자들이 지금 농성을 시작했는데 밥을 굶고 있답니다. 노동자는 연대를 해야해요. 여기 쌀이 있으니 국하고 해서 가져다 줘야겠어요."

김순자님은 다른 조합원과 함께 미포조선 농성장으로 가져갈 밥과 국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그분들의 연대를 보면서 그곳을 조용히 빠져 나왔습니다.

대통령 후보 7번에 김순자 위원장이 보인다.
▲ 2012년 대선 포스터 대통령 후보 7번에 김순자 위원장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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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울산과학대, #비정규직, #울산 동구, #파업 300일, #인간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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