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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청소년 특별면 <너, 아니?>에 실렸습니다. <너, 아니?>는 청소년의 글을 가감없이 싣습니다. [편집자말]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길거리에서 지(知)를 설파하고, 지구 반대편 주나라에서는 공자가 인(仁)을 가르치던 기원전 5세기 무렵, 유럽대륙은 새로운 변화의 물결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 시작은 바로 유럽의 서북부에 살고 있었던 켈트족(Celts)이었다. 라 텐(La Tène)이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철기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켈트족은 처음에 게르만족의 침략을 피해 이동을 시작했지만, 순식간에 영국, 프랑스,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로마인들은 이렇게 켈트족들이 정착한 지역, 또는 켈트족 그 자체를 갈리아(Gallia, Gaul)이라고 불렀다. 갈리아 지역에는 수십 개의 켈트 부족이 무리를 이뤄 살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기원전 3세기경 센 강 유역에 정착한 파리지(Parisii)였다.

파리지 사람들은 비옥한 늪지로 둘러싸인 센 강변에서 농경과 목축, 무역에 종사하며 빠르게 번성했고, 얼마 뒤에는 시테 섬(Île de la Cité)에 자신들의 요새 도시(Oppidum), 뤼코테시아(Lucotecia)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훗날 카이사르는 이곳을 루테시아(Lutetia)라 칭했고, 그것이 프랑스어로 옮겨지며 뤼테스(Lutèce)가 됐다.

이 단어는 라틴어로 진흙을 말하는 루툼(Lutum), 그리고 갈리아 언어로 늪을 말하는 루토(Luto)에서 비롯되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센 강 주변의 지리적 특성을 굉장히 잘 드러내는 지명이었던 것이다.

1550년 제작된 루테시아의 지도
 1550년 제작된 루테시아의 지도
ⓒ Sebastian Mun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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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승승장구하고 있던 파리지족에게 위기가 닥친 것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작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B.C. 52년이었다. B.C. 58년부터 이미 크고작은 전투를 통해 갈리아의 여러 부족들을 복속시킨 카이사르는 아르베르니족(Arverni) 족장 베르킨게토릭스(Vercingetorix)를 중심으로 뭉친 갈리아 연합군을 격퇴하기 위해 프랑스 중남부 게르고비아(Gergovia)로 향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카이사르는 자신의 가장 믿음직한 지휘관 티투스 라비에누스(Titus Labienus)를 루테시아로 보냈다. 파리지족은 라비에누스를 맞이해 최선을 다해 싸웠고, 처음 며칠간은 대등한 전투가 이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로마 병사들이 늪지대에 익숙해지자 더 이상 버티기는 쉽지 않았다. 벼랑 끝에 몰린 파리지의 지도자들은 최후의 전술을 쓰기로 마음먹었고, 루테시아의 모든 것을 불태운 뒤 센 강변의 가라넬라 평원(La plaine de Garanella)에서 결사항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4개의 보병연대와 1개의 기병부대를 거느린 라비에누스가 총공세를 퍼부은 끝에, 결국 파리지와 루테시아는 로마군의 손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전투가 치러진 가라넬라 평원을 '전쟁의 땅(Champ-de-Mars)'이라 명명했고, 이 자리엔 현재 에펠탑이 솟아있다.

파리지가 정복당한 몇 달이 지나, 로마 군대와 모든 갈리아 연합군의 최후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난 번 게르고비아 전투에서 패배한 카이사르는 이번만큼은 베르킨게토릭스를 사로잡으려 벼르고 있었고, 베르킨게토릭스도 필승을 다짐하며 알레시아 요새로 철수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8000명의 파리지 병력을 포함해 갈리아 전역에서 지원군이 밀려들었고, 로마 진영에도 카이사르의 든든한 오른팔 라비에누스가 합류했다.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곳에서마저 연합군이 패하며 베르킨게토릭스는 포로로 끌려갔고, 갈리아는 완전히 로마의 수중에 들어갔다.

전쟁을 마친 카이사르는 자신이 점령한 지역을 한데 모아 '장발의 갈리아(Gallia Comata)'라 이름 붙였는데, 이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거치며 갈리아 지역은 다시 세 개로 나뉘게 된다.

이 세 개의 속주는 남서부의 아키타니아(Aquitania), 루아르 강과 센 강 사이의 루그두넨시스(Lugdunensis), 센 강 이북에서 라인 강까지의 벨기카(Belgica)로 구성되었고, 여기에 남동부(지중해와 맞닿아 있는)의 나르보넨시스(Narbonensis)를 더해 갈리아 지방에 위치한 로마의 속주는 총 4개가 되었다.

1886년 제작된 로마시대 갈리아의 지도
 1886년 제작된 로마시대 갈리아의 지도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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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지의 루테시아는 이 중 루그두넨시스에 편입됐다. 로마인들은 전쟁 이후 폐허가 돼버린 이 도시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새롭게 재건하기 시작했다. 도시는 시테섬뿐만 아니라 강의 좌안으로 확장되어 생쥬느비에브(Sainte Geneviève) 언덕에까지 이르렀고, 이런 까닭에 이곳은 오늘날까지도 라틴구역(Quartier latin)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편, 강의 우안은 늪이 지나치게 많다는 이유로 도외시되다 14세기에 이르러서야 수도사들에 의해 간척과 경작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런 연유로 오늘날 파리 3구와 4구에 걸쳐 있는 마레지구(Le Marais)의 명칭이 탄생하게 되었다. '마레(Marais)'란 불어로 '늪'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클뤼니 박물관의 로마 목욕탕 터
 클뤼니 박물관의 로마 목욕탕 터
ⓒ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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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족속은 빠르게 로마화되기 시작했고, 이 두 갈래가 융합되어 갈로-로망(Gallo-Raman)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탄생했다. 오늘날 파리에서 우리는 조금이나마 이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첫 번째 장소는 바로 클뤼니 박물관이다. 중세 시대 유물이 주로 전시되어 있는 이곳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로마의 목욕탕 건물이다.

로마시대의 목욕탕은 공공시설이었는데, 단순히 목욕만 하는 곳이 아닌 중요한 사교 공간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곳에 목욕을 하러 오기도 했지만, 자신의 사업을 확장하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 혹은 사회적으로 회자되는 사안에 대해 토론을 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많게는 하루 500명이 방문하곤 했다는 이곳은 그 커다란 규모로 고대 로마의 부와 풍요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뤼테스 원형경기장
 뤼테스 원형경기장
ⓒ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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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로-로망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두 번째 장소는 바로 뤼테스 원형경기장(Arènes de Lutèce)이다. 오늘날 파리 시민들이 한가로이 앉아 여유를 즐기고 있는 이곳은, 로마 시대 당시 약 1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경기장이었다. 굶주린 곰과 사자들이 빗장 뒤 우리에 갇혀 있었고, 검투사들은 이 맹수들을 상대로 자신이 최강의 검객임을 증명해보여야 했다.

이렇게 루테시아는 갈로-로망의 중심지이자 명실상부 로마 도시의 하나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 2편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임하영 기자는 지난 6월 1일 파리로 출발, 현재 유럽에 머물고 있습니다.



태그:#여행,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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