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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한 언론사에서 인턴기자로 활동했던 적이 있다. 개인용 노트북과 취재수첩을 지급받았고, 사무실의 빈자리에 앉았다. 첫날 내게 '기사쓰기' 교육을 해준 이는 취재기자 선배가 아니라, 나보다 한 달 정도 먼저 입사했다는 인턴 동료였다. 그가 유력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조금씩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동료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서로 겹치면 안 되니까 (실시간 검색어) 고르시면 저희(인턴)들한테 쪽지로 바로 알려주세요. 타사 기사는 너무 똑같이 베끼면 안 되니까 문단이나 문장 순서, 아니면 어투만 조금씩 바꿔서 올려주시면 돼요. 한두 번만 해보시면 어렵지 않을 거예요."

교육은 회사의 기사 입력기 프로그램 활용법을 포함해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배운 방법으로 인터넷에 등록되는 기사의 작성 시간도, 한 건당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기사가 등록되는 과정에서 사실관계의 확인 과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저 사진과 기사 본문의 저작권 침해 혹은 표절 여부뿐이었다. 기사는 쓰이는 족족 그대로 인터넷에 노출됐다.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기사들이 '온라인 팀'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하루에도 수십 건씩 쏟아져 나왔다.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뛰쳐나왔다. 취재해서 기사 쓰라고 지급받은 노트북이 사무실 안에서만 그렇게 쓰이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저 인터넷에서 눈으로 보기만 했던 '누리꾼들의 반응은…' 따위의 문장을 차마 직접 적을 수가 없었다. '기사 좀 쓴다'며 이전에 기사 작성법을 배운 적 있는지 묻던 팀장의 칭찬이, 도무지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어디 가서 '나 기사 쓴다'고 이야기할 수조차 없었다. 저마다의 사실과 보도 가치를 지녔을 기사가, 마치 영업사원의 그것처럼 '하루 몇 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적응할 수 없었다.

잠시나마 '기레기'였던 추억, 왜 이렇게 겹쳐보일까

미국의 명문 하버드 대학과 스탠퍼드 대학에 동시 진학했다는 미국 유학 여고생 김(18)양의 주장에 대해, 하버드 대학본부의 공보담당자는 9일(현지시간) "김양 가족이 제시한 합격통지서는 위조(forgery)된 것"이라고 답변했다.
 미국의 명문 하버드 대학과 스탠퍼드 대학에 동시 진학했다는 미국 유학 여고생 김(18)양의 주장에 대해, 하버드 대학본부의 공보담당자는 9일(현지시간) "김양 가족이 제시한 합격통지서는 위조(forgery)된 것"이라고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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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나마 이른바 '기레기'(기자+쓰레기의 합성어)로 전락해버렸던 지난해의 그 일주일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최근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천재소녀의 몰락'을 보면서다. 미국 교민신문인 <미주 중앙일보>의 한 객원기자는 지난해 12월 한국인 김아무개씨가 각각 미국의 명문사학인 하버드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고, 올해 6월에는 스탠퍼드대에도 합격해 두 대학의 줄다리기 끝에 전례 없는 '양교에서 2년씩 수학'이라는 쾌거를 이뤘다고 보도한 바 있다.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일이 미국으로부터 전해지자 언론들은 너도나도 이를 빠르게 받아 적어내기에만 급급했다. 유력한 중앙일간지부터 자잘한 가십 전문지에 이르기까지, 예외는 없었다. 단순히 내용을 요약하거나 핵심만 살짝 돌려 타 언론의 기사를 베끼는, 언론계 은어로 이른바 '우라까이'가 빛을 발한 것이다.

김아무개씨 본인이 출연한 라디오 인터뷰는 물론, 신문 지면과 심지어 공중파 방송뉴스에서까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기적같은 이야기'는 절정을 이뤘다. 뉴스의 무차별적인 확대재생산은 김양에게 '천재소녀'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수여했고, 소녀를 입지전적인 인물로 치켜세웠다.

이 소식을 처음 보도한 <미주 중앙일보>는 소녀와 가족의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고 보도했고, 수많은 언론들이 그것을 다시금 철석같이 믿고 보도했다. 문제는 이렇게 끝을 알 수 없는 '우라까이'가 지속되는 동안 그 어떤 언론에서도 '사실관계의 확인'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학교 측에 합격 여부를 확인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다양한 차원에서의 교차 검증, 즉 '크로스 체크'가 전무했던 것이다. 일부 언론의 독자를 비롯한 누리꾼들의 의혹 제기가 이어진 후에야, 소녀의 놀라운 이야기는 '위조'와 '오보'로 점철된 소동이었음이 드러나면서 초라하게 끝을 맺었다.

김아무개씨의 가족이 갖고 있던 합격증이 위조됐음을 단독 보도한 <경향신문>이 나서지 않았다면, 소녀는 수많은 언론에 의해 아마 훨씬 더 오랜 시간을 '천재소녀'로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가지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점은, <경향신문>마저도 애초에는 정확한 검증 없이 기존의 내용을 그대로 보도했다는 점이다. 그래도 <경향신문>은 늦게나마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았다는 역할을 해냈고, 지면을 통해 오보에 대해서도 사과한다는 입장을 덤덤히 전해 나은 편이라 할 수 있겠다.

종합편성채널 채널A의 한 뉴스 프로그램에서는 김아무개씨의 이야기가 절대 거짓이 아니라며 확언을 아끼지 않았다. 도리어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에 대해 '질투' 등까지 언급해가며 김씨를 감싸고 나서기도 했다. 근거는 그저 김씨가 하버드대의 교수로부터 받았다는 이메일의 주소, 그리고 영어로 된 본문을 우리말로 번역한 내용뿐이었다. 애당초 위조된 이메일이 소녀의 진실을 입증할 증거로 활용되는 촌극이 빚어졌다.

한편 <경향신문>의 단독 보도가 나가자, 채널A 측은 당일 방송에서 진행자의 '시청자들께 사과드리겠다'는 짤막한 한 마디와 함께 바로 빠른 '태세 전환'을 보였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소녀의 거짓을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소녀의 입장을 옹호하던 전날의 방송 분량은 삭제돼 지금까지도 다시보기 서비스가 불가능한 상태다. 스스로도 부끄러운 줄은 알지만, 곧이곧대로 잘못을 인정하는 것까지는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비단 채널A 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언론들이 제대로 된 사과조차 없이 '우라까이'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냈다. 말 그대로 '아니면 말고' 식이다. 최소한의 검증도 없었다. 공통의 원칙이 아직까지도 바로 서지 못했다는 의미다. 언론은 어떤 논란이 있다면 그저 '논란이 있다'고만 전달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확인해줄 수도 있어야 한다. 오보가 있었다면 지면이든 방송이든 충분한 영역을 할애해, 혼란스러울 독자와 시청자에게 무거운 마음으로 사과해야 한다. '아, 그래? 미안해!' 식으로 무책임하게 사과하려면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천재소녀 양산한 언론, 세월호에서 무엇을 배웠나

미국 하버드 대학과 스탠퍼드 대학의 동시 입학을 주장했다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미국 토머스제퍼슨 과학고등학교 3학년 김양이 12일 오후 마스크를 쓴 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 지인의 보호를 받으며 공항을 빠져나가고 있다.
▲ '미 명문대 동시 입학 거짓' 김양 입국 미국 하버드 대학과 스탠퍼드 대학의 동시 입학을 주장했다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미국 토머스제퍼슨 과학고등학교 3학년 김양이 12일 오후 마스크를 쓴 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 지인의 보호를 받으며 공항을 빠져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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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년 하고도 2개월이 더 지났다. '학생 전원 구조'라는 사상 최악의 오보가 있던 날로부터 말이다. 그러나 당시의 풍파를 겪고도 언론은 사실관계의 확인보다는 속보와 특종 경쟁에만 매몰돼 있는 모양새다.

당장 4일 전만 해도 <한국일보>는 메르스 사태와 관련, 의사인 35번 환자가 뇌사 상태에 빠졌다고 보도했고, YTN은 해당 환자가 사망했다고 보도했지만 오보로 판명됐다. 언론은 또다시 단순한 말 한 마디로 생사를 좌지우지하려 했다.

결코 고의는 아니었으리라 믿는다. 충분히 '믿을 만한 소식통'이 있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차분히 보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원하는 언론은 그러한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믿을 만하더라도 한 번씩은 더 확인하고, 진위여부에 관계없이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참된 언론의 모습일 것이다.

지난 여름 직접 체험한 것처럼 '한두 번 해보면 어렵지 않은' 수준의, 마치 기계로 기사를 찍어내는 것 같던 그 모습은, 결코 언론이라 할 수 없을 것이라 믿는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태그:#천재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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