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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읍사무소 앞에 서 있는 수령 500년이 넘은 왕버들나무. 정유재란 때 구례현청이 있던 자리다. 당시 조선수군 재건길에 찾았던 이순신 장군을 지켜보고 응원했던 나무다.
 구례읍사무소 앞에 서 있는 수령 500년이 넘은 왕버들나무. 정유재란 때 구례현청이 있던 자리다. 당시 조선수군 재건길에 찾았던 이순신 장군을 지켜보고 응원했던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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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로 우리 사회가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각종 행사나 모임이 연기되고 취소되면서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그렇다고 집에서 '시체놀이'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싱그러운 산과 들의 유혹도 견딜 수 없다. 한낮의 햇볕은 뜨겁지만 건강한 햇볕과 공기를 호흡하니 몸과 마음이 한층 밝아진다.

섬진강변에 있는 석주관으로 간다. 지난 14일이다. 석주관은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걸었던 조선수군 재건로의 출발점이다. 개인적으로 지난 겨울에 한 번 훑었던 길이다. 요즘 틈나는 대로 다시 찾고 있다. 황량했던 겨울보다 마음이 한결 홀가분하다. 산천도 초록으로 물들어 눈도 더 호강한다. 진한 밤꽃 향기도 코끝을 간질인다.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 재건로는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기용된 이순신이 조선수군을 재건하면서 걸었던 길이다. 1597년 임금의 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의금부에 투옥됐던 이순신이 4월 1일 풀려나 백의종군을 하던 때였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이끈 조선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에 크게 패했다. 경상우수사 배설과 함께 진영을 이탈한 전선 12척만 겨우 살아남았다.

섬진강변 구례군 토지면에 있는 석주관. 지금은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와 승·의병들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섬진강변 구례군 토지면에 있는 석주관. 지금은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와 승·의병들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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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관 앞에 있는 칠의사의 묘. 정유재란 때 순절한 왕득인 등 7명의 의사와 구례현감 이원춘의 무덤이다.
 석주관 앞에 있는 칠의사의 묘. 정유재란 때 순절한 왕득인 등 7명의 의사와 구례현감 이원춘의 무덤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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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식을 느낀 조정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선전관 양호를 통해 이순신에게 임명장이 전달된 게 그 해 8월 3일(양력 9월 13일)이었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에게 조선의 앞날이 맡겨진 셈이다.

당시 일본군은 경상도 밀양과 김해, 진해, 거제를 유린하고 전라도로 향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밀려드는 일본군의 북상을 막으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수군을 재건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선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긴 이순신은 황대중 등 군관 9명, 병사 6명과 함께 전라도로 향한다. 백의종군 길에 지역의 상황까지도 구체적으로 파악해 둔 터였다. 구례에서 곡성, 순천, 보성, 장흥, 해남, 진도로 이어지는 조선수군 재건의 첫걸음이었다.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명량대첩의 시작이었다.

지난 14일 석주관을 찾은 외국인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석주관은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와 승·의병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지난 14일 석주관을 찾은 외국인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석주관은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와 승·의병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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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관 뒤로 복원돼 있는 석주관성. 임진왜란 때 전라도 방어사 곽영이 쌓아서 구례현감 이원춘에게 방어토록 한 성이었다. 성벽의 둘레가 750m, 높이 1∼1.5m 규모에 이른다.
 석주관 뒤로 복원돼 있는 석주관성. 임진왜란 때 전라도 방어사 곽영이 쌓아서 구례현감 이원춘에게 방어토록 한 성이었다. 성벽의 둘레가 750m, 높이 1∼1.5m 규모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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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석주관성을 지나 섬진강변을 달렸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도계를 이루는 석주관성은 진주에서 구례, 남원을 향해 넘어오는 일본군을 방어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 방어사 곽영이 쌓고 구례현감 이원춘에게 방어토록 한 성이었다. 성벽의 둘레가 750m, 높이 1∼1.5m 규모였다.

지금은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와 승·의병들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사적 제385호로 지정돼 있다. 석주관 앞에는 당시 순절한 왕득인 등 의사 7명과 구례현감 이원춘의 무덤이 있다. 사적 제106호로 지정돼 있다.

'나라를 위한 부름에/승려인들 어찌 가리겠는가/피가 흘러 내를 이루니/푸른 물이 붉게 물들었다//임금을 위해 몸을 버리는 것은/신하된 이의 직분이다/돌조각에 옛일을 새기니/역사에 길이 남으리라'

칠의사 묘의 추모비에 새겨져 있는 글귀다. 원문으로는 '爲國應募(애국응모)/僧侶何擇(승려하택)/血流成川(혈류성천)/爲壁爲赤(위벽위적)'으로 시작된다.

석주관 칠의사의 묘 추모비. ‘나라를 위한 부름에/승려인들 어찌 가리겠는가/피가 흘러 내를 이루니/푸른 물이 붉게 물들었다'로 시작되는 추모비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석주관 칠의사의 묘 추모비. ‘나라를 위한 부름에/승려인들 어찌 가리겠는가/피가 흘러 내를 이루니/푸른 물이 붉게 물들었다'로 시작되는 추모비를 볼 수 있는 곳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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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변을 따라 용호정 앞으로 지나는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 재건로의 구간이다. 강변을 따라 둑방과 나무 데크로 길이 이어진다.
 섬진강변을 따라 용호정 앞으로 지나는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 재건로의 구간이다. 강변을 따라 둑방과 나무 데크로 길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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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풍경이 빼어났지만 이순신은 한눈을 팔 여유가 없었다. 바쁜 걸음에 초가을 더위마저 느껴졌지만 강바람에 땀을 식힐 겨를도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수군을 재건해야 하는 중압감에다 일본군이 바로 뒤를 쫓아오고 있어서 다급하기도 했다.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의 마음가짐으로 강변길을 따라간다. 한낮의 찌는 더위도 견딜 만하다. 강변에 원추리꽃도 하나씩 피어 반겨준다. 흐드러진 개망초도 눈길을 끈다. 지금의 토지초등학교, 운조루, 용호정, 서시교를 거치는 노정이다.

운조루는 '타인능해(他人能解)'를 써놓은 뒤주로 마음속까지 따뜻해지는 옛집이다. 용호정은 섬진강변 용두마을에 있는 정자다. '절명시'로 알려진 매천 황현의 제자들이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다.

섬진강변 둑방을 따라가는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 재건로의 구례 구간. 운조루를 보고 용호정으로 가는 구간이다.
 섬진강변 둑방을 따라가는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 재건로의 구례 구간. 운조루를 보고 용호정으로 가는 구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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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변 용두마을에 자리한 용호정. ‘절명시’로 알려진 매천 황현의 제자들이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다.
 섬진강변 용두마을에 자리한 용호정. ‘절명시’로 알려진 매천 황현의 제자들이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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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강변을 달려 단숨에 구례현청에 도착했다. 당시 현청은 돌로 쌓은 읍성이 둘러싸고 있었다. 둘레 1350m, 높이 4m 가량 되는 성이었다. 성안에는 객관, 봉서루, 봉서헌 등과 우물이 9개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청의 위치는 현재 구례읍사무소가 있는 자리다. 시가지로 개발되면서 읍성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다만 500살 된 왕버들나무와 느릅나무 3그루가 남아있을 뿐이다. 한눈에 봐도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나무다. 당시 이순신을 묵묵히 지켜보며 응원했던 나무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자태가 의연하다.

구례읍사무소 앞에 명협정도 복원돼 있다. 당시 구례현청에 있던 모정이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머물면서 체찰사 이원익과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생각을 나눴던 공간이다.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 재건로의 구례구간 현황판도 여기에 세워져 있다.

구례읍사무소 전경. 정유재란 당시 구례현청이 있던 자리다. 시가지로 개발되면서 읍성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구례읍사무소 전경. 정유재란 당시 구례현청이 있던 자리다. 시가지로 개발되면서 읍성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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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현청에 도착한 이순신은 먼저 군자감 군관 손인필과 그의 아들 손응남을 만났다. 손인필은 군자감에서 군수품 조달과 군인을 모집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의금부에서 풀려나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지금의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도계를 이루는 밤재까지 달려와 맞아 준 이도 그였다.

이순신은 구례현청에서 손인필 부자, 구례현감 이원춘 등과 함께 일본군을 물리칠 작전회의를 하며 밤을 지새웠다. 회의에서는 내륙의 옛 관아를 찾아 물자를 보충하고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빠르게 이동하는 전략을 짰다.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매 순간 긴박할 수밖에 없었다.

손인필 부자는 이순신과 함께 이듬해 노량해전에 참가해 일본군을 무찌르다가 순절했다. 구례읍사무소에서 구례공설운동장으로 가는 길목에 손인필의 비각이 있다. 이 비각을 중심으로 지금 조선수군 출정장 조성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구례읍사무소 앞에 복원돼 있는 명협정. 정유재란 당시 구례현청에 있던 모정이다. 백의종군하고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자주 머물던 공간이다.
 구례읍사무소 앞에 복원돼 있는 명협정. 정유재란 당시 구례현청에 있던 모정이다. 백의종군하고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자주 머물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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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읍에 있는 손인필의 비각. 이 비각을 중심으로 지금 조선수군 출정장 조성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구례읍에 있는 손인필의 비각. 이 비각을 중심으로 지금 조선수군 출정장 조성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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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석주관 찾아가는 길
호남고속국도 석곡나들목에서 18·17번 국도를 번갈아 타고 압록, 구례구역을 거쳐 구례읍까지 간다. 구례읍에서 하동 방면으로 운조루와 토지초등학교를 지나면 왼편에 석주관이 자리하고 있다.



태그:#조선수군재건로, #이순신, #명협정, #석주관, #손인필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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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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