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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공원에 위치한 안국사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낙성대공원에 위치한 안국사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 여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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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관악구에 소재한 고시학원에서 특강을 진행했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특강장소를 가던 중 시간이 남던 차에 낙성대역에서 내려서 낙성대를 다녀오기로 했다. 낙성대역에서 관악구민체육센터 쪽으로 걸어가면 강감찬을 기리는 사당인 안국사와 석탑이 있다. 낙성대는 고려시대 장군인 강감찬이 태어난 곳이다. 낙성대는 별이 떨어진 장소라는 뜻이다. 관악구는 고려시대에는 현재의 시흥시와 더불어서 금주로 불렸다. 신라 호족 가문 출신인 강감찬은 금주에서 태어났다. 강감찬이 태어나던 당시 별이 떨어졌다. 당시 중국 사신이 별이 떨어지는 장소를 찾아가보니 강감찬이 태어난 장소였다는 이야기가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강감찬의 생가를 낙성대로 불렀다.

낙성대 공원에 위치한 강감찬 장군 기마상
 낙성대 공원에 위치한 강감찬 장군 기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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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948~1031년)은 서희와 더불어서 거란족의 외침을 막은 장군으로 유명하다. 그의 시호는 인헌이다. 그래서 관악구에는 인헌초등학교처럼 인헌이 들어간 이름이 자주 눈에 띈다. 강감찬이 살던 고려 초기에는 중국대륙에서는 송과 거란이 전쟁을 하던 시기였다. 거란은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요나라를 건국한다. 이후 고려까지 침범하려는 야욕을 보였다. 거란은 993년 1차 침입을 한다. 고려는 서희의 외교전략으로 거란과 전쟁을 치르지도 않고, 현재의 평안북도의 위쪽에 위치한 강동 6주를 회복한다. 거란은 1010년 2차 침입한다.

당시에는 개경이 함락되고 고려 현종이 나주까지 피란을 간다. 고려는 강동 6주를 돌려주는 조건으로 거란군과의 화친을 맺는다. 당시 고려 장수 양규는 돌아가는 거란군에 대항해서 고려의  수 많은 포로를 구출하던 중 전사한다. 1018년 거란이 3차로 공격한다. 강감찬은 이미 거란이 침입을 예상하고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강감찬은 거란의 장수 소배압이 이끌던 거란군에 맞서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군의 위치인 구주에서 크게 승리한다. 이 전투를 구주대첩(귀주대첩이라고도 부른다)으로 부른다. 이 전쟁으로 거란은 상당한 전력을 상실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후 고려 북방민족은 여진족이 강성하게 된다. 고려 초기 서희, 양규, 강감찬, 윤관, 박서와 같은 이들은 고려가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역사인식으로 거란, 여진, 몽골과 같은 북방민족에 맞서 당당히 싸워나갔다.

안국사 안에는 강감찬 장군의 영정과 강감찬 장군의 출생 신화와 구주대첩 당시의 전투장면 그리고 강감찬 장군의 개선 당시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안국사 안에는 강감찬 장군의 영정과 강감찬 장군의 출생 신화와 구주대첩 당시의 전투장면 그리고 강감찬 장군의 개선 당시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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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를 겸비하여 지략과 용맹으로 거란을 퇴치한 강감찬은 고려의 수호신으로 불린다. 무속 신앙에서도 강감찬은 최영, 남이, 이순신, 임경업 장군과 더불어서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원래 낙성대 위치한 석탑을 낙성대공원으로 이전했다. 고려 백성들이 강감찬 장군을 기려서 '강감찬낙성대’라는 글씨가 새겨진 탑을 세웠다고 한다.
 원래 낙성대 위치한 석탑을 낙성대공원으로 이전했다. 고려 백성들이 강감찬 장군을 기려서 '강감찬낙성대’라는 글씨가 새겨진 탑을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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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구청에는 강감찬의 집터에 있던 향나무 고목이 전시되어있다. 관악구 난곡동에는 강감찬이 지팡이를 꽂으니, 그 지팡이가 나무가 되었다는 굴참나무(천연기념물 제271호)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경수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hunlaw.tistory.com/)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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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힘이 되는 생활 헌법(좋은땅 출판사) 저자, 헌법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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