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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전쟁을 소재로 다룬 kbs 대하드라마 포스터
▲ 징비록 조일전쟁을 소재로 다룬 kbs 대하드라마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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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한반도에 전쟁이 터졌다. 조일전쟁이다. 헌데 조선의 사대부들은 임진왜란(亂)이라 격하했다. 감히 상국이 우리나라를 도와주러 와 피를 흘린 싸움인데 어찌 조선과 일본이 붙은 전쟁이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전쟁터가 된 한반도에서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이 맞부딪친 국제 전쟁인데 란(亂)이라 칭하면서 스스로 기었는지 모르겠다. 겸손도 과하면 보기에 딱하다.

1950년에도 전쟁이 터졌다. 당시 전쟁을 수행한 위정자들은 '6.25 동란'이라 불렀다. 분명 유엔 16개국이 참전하여 중공, 소련, 북한 연합군과 벌인 국제 전쟁인데 동란이라 의미를 축소한 것이다. 같은 듯 다른 전쟁이지만 맥을 같이 한다.

조일전쟁과 한국전쟁

북으로 피난 가던 선조가 임진강에 도착했을 때 해가 떨어졌다. 마음이 급한 선조는 일본군에게 잡힐까봐 정자를 불태워 횃불삼아 강을 건넜다. 현 정자는 율곡 이이의 후손들이 복원했다.
▲ 화석정 북으로 피난 가던 선조가 임진강에 도착했을 때 해가 떨어졌다. 마음이 급한 선조는 일본군에게 잡힐까봐 정자를 불태워 횃불삼아 강을 건넜다. 현 정자는 율곡 이이의 후손들이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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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휩쓸고 지나간 국토는 황폐했다. 백성들은 죽고, 다치고 끌려갔다. 의주로 몽진 떠난 임금이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들어갈 집이 없었다.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 간 임금을 향하여 '백성 버리고 떠난 놈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며 저주를 퍼붓던 백성들이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을 불살라 버렸기 때문이다. 월산대군 후손이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갔다. 경안궁이다.

전쟁이 끝났지만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였고 사대부들은 공황에 빠졌다. 이들의 빈 공간을 채워준 것이 '재조지은(再造之恩)'이다. 무너지는 나라를 다시 세워준 명의 은혜를 받들어 모시자는 것이다. 최근 미국을 방문해 넙죽 절하며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한 자가 이들의 유령이 빙의됐는지 모르겠다.

조선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일전쟁에 참전한 명나라의 속내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이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경구를 중국 사람들은 존중한다. 국익이다.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군대는 적극적인 전투를 피한 채 기회를 엿보았다. 휴전이다.

의병들의 결기를 꺾어 버리고 분전하는 이순신 장군의 발목을 잡았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은 '항미원조(抗米援朝)'라고 명분을 내세웠다. 조일전쟁과 한국전쟁, 시공을 뛰어넘는 전쟁이지만 일맥상통한다.

'백세청풍'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있다
▲ 백세청풍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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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청운동 왕회장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오른쪽에 자그마한 단독주택이 있다. 그 집 울타리 안쪽 바위에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고 안내판이 길바닥에 누워 있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곳은 김상용이 살던 곳이다. 원래 대명일월 백세청풍(大明日月 百世淸風)이라 새겼으나 일제시대 주택을 지으면서 훼손되어 지금은 백세청풍이라는 글씨만 남아 있다.'

'백세청풍'은 은나라가 망하자 '의롭지 못한 주나라 곡식을 먹을 수 없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캐먹다 굶어 죽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따라서 백세청풍이란 영원토록 변치 않는 선비의 지조를 기린다.

조선 사대부들에게 각인된  백세청풍은 함안 서산서원에도 있고 해주 수양산과 금오산에도 있다. 안중근 의사도 즐겨 썼다. 백세(百世)는 일백 세대를 칭한다. 30년을 1세대로 치면 3천년이 되나 구체적 햇수가 아니다. '오랜 세월'을 말한다.

청풍(淸風)의 청(淸)은 눈이 시리도록 맑고 높다는 뜻이고 풍(風)은 바람이 아니라 군자(君子)의 덕과 절개를 뜻한다. 따라서 군자의 절개는 눈이 시리도록 맑고 높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청운동 바위에 새겨진 글씨 중 훼손된 '대명일월'은 송시열의 글씨요 '백세청풍'은 주자의 글씨라는 설이 있지만 글씨에 뛰어난 김상용의 친필인지 아닌지는 여기에서 중요하지 않다.

김상용은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호종하여 강화도에 들어갔다. 정묘호란 때처럼 무사할 것이라고 믿었던 강화도가 뚫렸다. 청나라 군이 쳐들어오자 화약에 불을 당겨 순절했다. 척화론자 김상헌의 형이다.

세 번 절하고 절 할 때마다 이마를 세 번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는 인조 부조
▲ 삼전도 항복 세 번 절하고 절 할 때마다 이마를 세 번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는 인조 부조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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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떠났다. 시신이 도처에 나뒹굴었고 가족을 잃은 백성들은 실성하여 거리를 헤맸다. 세자 없는 대궐은 적막했고 사대부들은 공황에 빠졌다. 하늘처럼 받들던 임금이 오랑캐 앞에 무릎 꿇다니?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 시쳇말로 '멘붕'이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소현세자가 심양으로 끌려간 후, 조선 강토에는 대명일월 백세청풍(大明日月 百世淸風) 풍조가 들불처럼 번졌다. 오늘날에도 경상북도 깊은 마을에 가면 대명대(大明臺)가 있고 사명대(思明臺)가 있으며 사명단(思明檀)과 심지어 대명동(大明洞)이 있다. 모두가 명나라에 뿌리가 닿아 있다.

뼛속까지 사대

명나라를 생각하자는 비석.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 세상인데도 숭정 연호가 새겨져 있다.
▲ 사명대 비석 명나라를 생각하자는 비석.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 세상인데도 숭정 연호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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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일월(大明日月)'은 그냥 밝은 해와 달이 아니다. 명나라 세월로 반드시 되돌아가야 할 그날이다. 우리가 매우 진보적인 당대의 엘리트로 알고 있는 연암 박지원마저 병자호란 140년 후까지 명나라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연암은 그의 저서 '열하일기' 첫 부분 도강록 서(渡江錄 序)에서 청나라에 들어가는 소회를 스스로 자문자답하며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후(後)는 무슨 뜻인가?
숭정(崇禎) 기원 뒤를 말함이다.

삼경자란 무슨 말인가?
숭정 기원 후 세 돌을 맞이한 경자년을 말함이다.

무엇 때문에 숭정 연호를 쓰지 않았는가?
장차 강을 건너려니 이를 잠깐 피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를 피했는가?
강을 건너면 곧 청인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가 모두 청의 연호를 썼으매 감히 숭정을 일컫지 못함이다.

어째서 드러내놓지는 못하면서도 숭정이라고 부르는가?
황(皇)은 중화인데 우리의 상국은 명(明)인 까닭이다.
숭정 156년 계묘년 열상외사쓰다."

열상외사는 연암 박지원의 또 다른 호다. 후삼경자(後三庚子)는 정조4년(1783) 청 건륭 45년이다. 140년 전에 망한 나라, 명나라를 흠모하고 있다. 무섭다. 소름이 끼치도록 섬뜩하다. 지구상에서 사라진 나라를  흠모하고 있다. 뼛속까지 사대다.

최근 여당 대표가 '은혜를 잊지 않겠다'며 큰절을 올렸다. 태평양을 건너서 미 대륙과 한반도에서 유령이 떠도는 것 같다.

미국을 방문 중인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동행 의원들이 25일(현지시간) 워싱턴D.C 더블트리 바이 힐튼호텔에서 열린 한국전참전용사 만찬에서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유가족들에게 감사의 큰절을 올리고 있다.
 미국을 방문 중인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동행 의원들이 25일(현지시간) 워싱턴D.C 더블트리 바이 힐튼호텔에서 열린 한국전참전용사 만찬에서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유가족들에게 감사의 큰절을 올리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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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무성, #연암박지원, #대명일월, #백세청풍, #재조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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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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