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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장준하 선생(왼쪽)
 생전의 장준하 선생(왼쪽)
ⓒ 장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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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단언컨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님의 삶은 그 자체가 대한민국 광복 70년의 '한 페이지' 역사였다. 1918년 평북 삭주에서 태어나 이후 광복군으로, 언론인으로, 그리고 국회의원과 재야 민주주의 지도자로서 살아온 그의 만 57년간의 삶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역동적이었고 찬란한 업적이었다.

특히 독재자 박정희가 18년간 1인 장기 독재를 이어가던 유신 독재하에서 장준하 선생님의 민주화 투쟁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었다. 결국 그러한 노력이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벌어진 비극을 앞당기는 촉매제가 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진실은 파묻힌 채 장준하의 의문사는 이렇게 40년 세월을 보냈다. 한편 그 40년 전인 그때, 1975년 8월 18일부터 21일까지 치러진 장준하의 5일장은 엄숙하면서 동시에 슬펐다. 장준하가 허망하게 숨을 거뒀다는 비보를 접한 각계 인사들은 장준하의 좁고 허름한 상봉동 전셋집으로 몰려 들었다.

좁고 허름한 상봉동 전셋집으로 몰려든 조문객들

제일 먼저 찾아온 이는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이어 함석헌 선생과 문익환 목사, 그리고 평생의 동지였던 김준엽 전 고대 총장과 백기완 선생 등이 눈물과 함께 찾아왔고 이들은 장 선생의 5일장 기간 내내 빈소를 지켰다고 한다. 뒤이어 야당인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1971년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통일당 당수 양일동, 이대 총장 김옥길과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 등이 조문하러 들어섰다.

이처럼 장준하와 함께했던 동지들이 전국 경향 각지에서 찾아왔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생전 인사는 나누지 못했으나 평소 장준하를 흠모해온 이름 없는 이들도 이 좁은 상봉동 상가로 구름처럼 몰려 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며 애를 태우던 이가 있었다. 바로 장준하 선생님의 아내 김희숙 여사였다.

이유는 찾아온 조문객에게 접대할 음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장준하가 남기고 간 재산은 아무것도 없었다. 장준하 선생 내외와 5명의 자녀가 함께 사는 방 3개 짜리 전셋집이 남긴 재산의 전부였다. 청빈하고 정직했으나 그 외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찾아오는 조문객에게 무슨 돈으로 음식을 대접할 수 있을까.

결국 조문객들은 자신들이 돈을 내어 직접 술과 안주를 사와 나눠 먹으며 장준하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그러다 밤이 깊어지면 여기저기서 울분과 눈물이 터져 나왔고 누군가는 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증오와 저주로 욕설로 하기도 했다. 그렇게 장준하의 5일장이 치러졌다고 한다.

다행인 것은 장례 비용을 대주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돈이 없어 어디에 모셔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김수환 추기경은 천주교 재단이 소유하고 있던 파주 나자렛 공원 묘지를 마련해 주는 한편 명동성당에서 영결식을 할 수 있게 배려해 줬다. 장준하 선생님의 가족이 김수환 추기경에게 고마움을 갖는 이유였다.

장준하 선생 '추모 40주기 위원' 함께 해달라

장준하 선생님은 이처럼 초라하게 세상과 작별했다. 어느덧 그 일이 올해로 40년 세월을 헤아린다. 누군가는 쿠데타와 독재로 높은 탑을 쌓아 그 덕으로 국립묘지 넓은 땅 위에 거대한 묘역으로 남았다. 하지만 조국의 광복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진짜 애국자' 장준하 선생님은 그렇지 못했다. 이것이 대한민국 광복 70년 역사중 또 하나의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극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세월만 40년이 흘렀을 뿐 그때나 지금이나 불의가 융성하고 진짜 애국은 초라한 현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는 기막힌 말까지 쏟아내며 독재자 박정희는 많은 지지자에게 추앙되는 한편에서, 장준하 선생님의 40주기 추모제를 준비하는 실태는 너무도 민망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장준하 선생님의 40주기 추모제를 준비하고 있는 '장준하 특별법 제정 시민행동'에 따르면 8월 10일 마감인 추모위원 모집에 참여 의사를 밝힌 이들은 8월 7일 현재 모두 130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는 한국과 일본 대항 축구가 열리면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치며 응원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진짜로 모셔야 할 이 나라 애국자를 위해서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뜻있는 이들에게, 그래서 호소하고 싶다. 장준하 선생님의 추모 40주기 위원으로 부디 함께 해달라.

추모 위원으로 참여하는 데 그리 큰 부담도 없다. 누구나 할 수 있다. 공무원도 할 수 있고 학생도 할 수 있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10만 원을 추모 기금으로 송금한 후 간단한 내용으로 구성된 추모위원 신청서를 메일로 발송하면 된다. 마감은 오는 8월 10일까지이다.

장준하 선생님은 생전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고 하셨다. 그는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단 한치도 독재자와 타협하지 않았다. 37번 연행되고 그중 3번 구속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아도 굴복하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누군가의 고난에 대해 '훗날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그래서 나는 기대한다. 장준하 선생님의 업적을 이제 우리가 역사로서 평가해 달라. 자신의 전부를 바쳐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장준하 선생님을 위해 많은 이들이 40주기 추모위원으로 참여해 준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런 대한민국 이야말로 진짜 우리가 원하는 '광복 70년' 역사가 아니겠는가.

민족지도자 장준하 선생 서거 40주기 추모위원 모집 포스터
 민족지도자 장준하 선생 서거 40주기 추모위원 모집 포스터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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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장준하 선생님 40주기 추모위원으로 함께 하실 분은 (사)장준하기념사업회로 10만 원을 입금 후 추모위원 신청서(http://www.who-how.or.kr/bbs/board.php?bo_table=news&wr_id=62)를 다운받아 메일 (who_how@naver.com) 이나 팩스 (02-363-7415)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문의 : 장준하 특별법 제정 시민행동 02-362-0817



태그:#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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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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