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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에서도 그의 '학구열'은 식을 줄 몰랐다. 동생의 온갖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다섯 시간 동안 꼼짝달싹도 않고 읽고 또 읽었다. 일주일 전 구입한 여행 책자가 너덜거릴 정도가 됐다.
▲ 우리 가족의 여행가이드, 중1 아이 기내에서도 그의 '학구열'은 식을 줄 몰랐다. 동생의 온갖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다섯 시간 동안 꼼짝달싹도 않고 읽고 또 읽었다. 일주일 전 구입한 여행 책자가 너덜거릴 정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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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이슬람 국가가 어디야?"

줄곧 오지 탐험가가 꿈인 큰 아이의 생뚱맞은 이 한 마디 질문에 올 여름방학 여행지가 정해졌다. 어려서는 레고 블록보다 지구본을 장난감 삼고, 학교 들어가서는 사회과부도를 무슨 만화책처럼 즐겨 보더니만, 매일 같이 지도나 여행 관련 서적을 마치 암기라도 하려는 듯 파고 산다. 지도와 여행 책만 있으면 즐겁게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조금은 엉뚱한 중1이다.

명색이 교사인데 아이가 묻기 전까지 이슬람 국가는 아프리카와 중동에만 있는 줄 알았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아이는 아빠와 엄마 앞에서 알은 체 하느라 바쁘다.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리 만무한 아홉 살배기 여동생까지 데려다 앉혀놓고 반드시 들어야 한다면서 지도를 펴놓고 지구본을 돌려가며 설명해주었다. 가족들 앞에서 숫제 강의다.

"우리가 가톨릭 국가로 알고 있는 필리핀도 남부 섬 주민들은 이슬람교를 믿고, 이름이 '~스탄'으로 끝나는 나라는 죄다 이슬람 국가예요. 종교가 서로 달라 인도에서 분리된 방글라데시도 있고, 적도의 섬나라인 인도네시아도, 유라시아 대륙 맨 끝에 고추처럼 매달린 말레이시아도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죠. 멀리 아프리카나 중동까지 갈 것 없다는 말씀!"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것 같이 생긴 아랍어가 세계 5대 언어에 든다더니, 지도를 들여다 보니 과연 이슬람 국가는 적도를 감싸 안 듯 널리 분포돼 있었다. 남북 아메리카를 제외하면 모든 대륙에 두루 걸쳐 있는 셈이고, 사실 우리나라와도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다. 비행기로 불과 네다섯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우리가 그토록 경원시하는 이슬람 국가들이 지천이었다.

단 며칠 동안만이라도 무슬림으로 지내보련다

여행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어김없이 '그림일기'를 쓴다. 하루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걸 남기려는 건데, 여행을 다닐 때마다 쓰다보니 요령도 붙고 그림 솜씨도 제법 늘었다.
▲ 중1 아이의 삐뚤빼뚤 여행일기 여행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어김없이 '그림일기'를 쓴다. 하루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걸 남기려는 건데, 여행을 다닐 때마다 쓰다보니 요령도 붙고 그림 솜씨도 제법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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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끝에 말레이시아로 낙찰됐다. 필리핀 남부와 중앙아시아 등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을 피하려다 보니 가장 가까운 나라가 말레이시아라나? 중간에 베트남 호치민에서 나흘간 스톱오버 하는 보름간의 일정이다. 굳이 호치민를 경유하려는 건 인근에 '까오다이(高臺)교'라는 여러 종교가 융합된 신흥 종교를 접할 수 있어서다. 항공료를 절약하는 건 덤이다.

참고로, 두어 달 전부터 부지런을 떨었더니 30만 원대 중반에 말레이시아 왕복 항공권을 구했다. 스톱 오버 기간을 늘린 탓에 비용이 다소 늘어난 것까지 합해도 그렇다. 항공권 가격이야말로 '고무줄'이라더니, 유가 하락 덕을 감안하더라도 로또 부럽지 않게 산 셈이다. 단체 관광객이 아닌 다음에야, 웬만한 말레이시아 직항 왕복 항공권은 60만~70만 원을 호가한다.

이슬람교를 비롯해 두 나라에 뿌리 내린 다양한 종교들을 우선 접해볼 계획이다. 단 며칠 동안만이라도 무슬림으로, 불자로, 힌두교도로 지내보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로서 성당 미사에 빠지진 않겠지만, 해 뜰 무렵 코란 읽는 소리에 잠을 깨고, 열심히 모스크를 들락거릴 생각이다. 힌두사원을 찾아 이마에 붉은 점을 찍는 티카 의식에도 기꺼이 참여해 볼 생각이다.

내친김에 '베트남-말레이시아 종교 문화 기행'으로 이름 붙였다. 여러 종교와 관련된 시설과 유적을 주로 찾아다니겠지만, 눈은 항상 종교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할 것이다. 현지인들의 삶과 괴리된 종교는 한낱 우상일 뿐일 테니 말이다. 아울러, 흔히 '인도차이나'로 불리는 그곳에서 말 그대로 인도문화와 중국문화가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지도 살펴볼 참이다.

여행 기간과 거리만큼이나 미리 챙기고 공부해야 할 게 많다. 아이는 7월 중순 기말시험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도와 인터넷을 뒤적여가며 여행 자료를 그러모았다. 자료집 만들 시간이 부족하다며 연신 투덜거렸다. 이게 다 다른 학교보다 한 주나 더 늦게 치른 기말시험 때문이라고 했다. 이번에도 여행 가이드가 돼 줄 분주한 아이 앞에서 도움은 못 줄 망정 부모랍시고 무심코 던진 말이 이랬다.

"그렇게 학교 공부를 했다면 전교 1등 했을 거다!"

오늘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26시간

천신만고 끝에 빨간 '합격 도장'을 받았다. 중동의 여러나라 이름 가운데 우리나라의 이름이 적혀있어 아이는 창피하다고 말했다.
▲ 문제의 '메르스 문진표' 천신만고 끝에 빨간 '합격 도장'을 받았다. 중동의 여러나라 이름 가운데 우리나라의 이름이 적혀있어 아이는 창피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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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3일 이른 아침 인천국제공항. 제 몸만한 배낭을 짊어진 아이의 표정이 조금은 상기돼 있다. 5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말 때문인 듯하다. 가족과 중국, 일본, 대만 등지를 수차례 다녀온 터지만, 그렇게 오래 비행기를 타 본 적은 없다. 공항 내 푸드 코트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도, 수속을 하고 비행기에 탑승할 때까지도 그의 손에는 여권과 함께 직접 만든 자료집과 여행 책자가 들려 있었다.

그의 관심은 온통 이슬람교와 말레이시아다. 밤낮으로 얼마나 읽어댔던지, 불과 일주일 전 구입한 비닐 커버가 입혀진 말레이시아 여행 책자가 헤질 정도가 됐다. 그런데, 당장 며칠간 보내야 할 호치민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경유지일 뿐이라는 생각에다, 지난 겨울 베트남을 보름간 여행했기 때문인지 호치민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그다지 크지 않은 것 같았다.

오전 11시에 이륙해 지구의 자전 방향을 거슬러 적도를 향해 꼬박 다섯 시간을 날았다. 내 손목시계는 오후 4시인데, 호치민의 공항에 걸린 시계는 2시다. 시차 때문이다. 손목시계를 풀어 시침을 현지시간에 맞추려니 '공짜로' 2시간을 번 것 같다. 어차피 돌아갈 때 '반납'해야 할 시간이지만 조삼모사일지언정 당장 기분은 좋다. 오늘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26시간이다.

사실 아이가 짠 계획대로라면 공항을 빠져나와 시내 숙소를 찾아 체크인만 하면 끝나는 일정이었다. 아무튼 계획에 없던 2시간의 여유가 생겼으니 그동안 어딜 더 둘러볼까 아이와 상의를 하며 입국심사대로 걸어갔다. 굳이 배낭에서 여행 책자를 꺼낼 필요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관광지나 교통, 숙박 등에 대한 정보가 데이터베이스처럼 구축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입국심사대에 미처 닿기도 전에 사달이 났다. 영상 장비로 열을 측정하는 등의 보통의 경우와는 다른 '특별한' 검역 절차가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 관광객들에게는 중점관리대상이라도 되는 듯 엄격했다. 공항에서 곧장 다른 도시로 가는 연계 항공편을 이용하려는 환승객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지만, 입국심사를 받고 공항을 나서는 경우는 예외가 없었다. 바로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때문이었다.

문제는 기내에서 사전 안내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데다 검역 절차가 즉흥적인 대응이라 여겨질 만큼 엉망이었다는 점이다.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승객들을 관계자 두세 명이 두 팔 벌려 다짜고짜 막아서더니, 탑승권을 일일이 확인하며 환승객과 호치민이 목적지인 사람들을 가려냈다. 수백 명이 동시에 몰린데다 검역이 워낙 더디다 보니 마치 창구가 모래시계의 잘록한 허리마냥 어처구니없는 풍경이 연출됐다.

본의 아니게 새치기까지 하며 간신히 순서가 돌아왔지만 쉽사리 통과되지 못했다. 문진표 같은 서류를 쓰는 게 만만치 않았다. 그 자리에서 직접 작성한 뒤 직원에게 확인 도장을 받아야 했는데, 안내문은 한글이 병기돼 있었지만 정작 뒷면의 기입해야 할 항목은 베트남어로만 적혀 있어서 일일이 물어가며 쓸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서로 잘 통하지 않는 영어로 말이다.

이름과 여권번호, 비행기 편명은 그렇다 쳐도, 좌석 번호에다 묵을 숙소까지 찾아 적어야 했다. '로마의 법'을 따르는 심정으로 또박또박 빠짐없이 적었건만 번번이 퇴짜를 당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유인즉슨 숙소의 이름뿐만 아니라 주소까지 써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 와중에 버젓이 뇌물을 요구하나 싶은 엉뚱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1시간을 허비했다.

천신만고 끝에 받은 합격증

세계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크다는 '마지드 압둘 아지즈'의 모습. 50미터가 넘는 돔이 푸른 빛을 띠고 있어서 '블루 모스크'라고 불린다. 워낙 커서 웬만한 광각 카메라로도 전체를 다 담을 수 없다.
▲ 아이의 최종 목적지, 샤알람 블루 모스크 세계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크다는 '마지드 압둘 아지즈'의 모습. 50미터가 넘는 돔이 푸른 빛을 띠고 있어서 '블루 모스크'라고 불린다. 워낙 커서 웬만한 광각 카메라로도 전체를 다 담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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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만고 끝에 큼지막한 도장이 찍힌 '합격증'을 받고 흡사 도떼기시장 같은 그곳을 벗어났다.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보니 여전히 족히 백 명은 돼 보이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웅성거리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융통성 없고 불친절한 직원들에게 화가 나 씩씩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는 되레 그들 앞에서 창피했다면서 빨리 나가자며 소매를 잡아 당겼다.

"저 사람들도 저러고 싶겠어요. 어떻든 메르스 막아내자고 발버둥치는 건데, 이 정도 불편은 이해할 수 있다고 봐요. 그보다는 안내문에 메르스의 발원지인 중동 여러 나라들 가운데 한국이라는 이름이 '자랑스럽게' 적혀 있어 정말 창피했어요. 우리나라에 대해 잘 모르는 이가 본다면, 한국을 중동 어디쯤에 위치한 나라로 여기게 될 것 아니에요."

입국심사를 마치고 공항을 막 벗어나니 어느새 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공짜로' 번 2시간이 그렇듯 허망하게 흘러버렸다. 아이는 '사전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는 셈 아니냐'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순간 이번 여행에는 '변수'가 참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화창했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스콜이었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태그:#가족여행, #말레이시아,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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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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