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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가족부가 운영하는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e역사관'에 전시된 피해자 김순덕 할머니의 그림. <끌려가는 날>
 여성가족부가 운영하는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e역사관'에 전시된 피해자 김순덕 할머니의 그림. <끌려가는 날>
ⓒ 김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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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아무 설명 없이 저희 어머니를 끌고 갔습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일본군의 팔을 잡고 딸을 풀어 달라 애원했지만 돌아온 건 거친 발길질이었습니다. 땅에 나동그라진 두 분을 뒤로한 채 어머니는 난타오 부근 한 위안소로 끌려갔고, 거기서 1년 8개월 동안 일본군에게 치욕을 당했습니다."

중국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딸 양시우리엔씨는 어릴 적 어머니가 습관처럼 쏟아낸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점차 세상물정을 알아가면서 어머니가 얼마나 큰 한을 삼킨 채로 눈을 감았는지 깨달았다. 풀리지 않은 한은 그대로 대물림 됐다. 양씨는 어머니가 1942년 봄에 당한 일을 증언하며 온 몸을 떨었다.

풀리지 않은 위안부의 한... 2세까지 대물림

13일 김민기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주최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중 협력의 현황과 과제' 토론회. 이날은 처음으로 한-중 피해자와 그 가족, 전문가가 모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논의한 자리였다.
 13일 김민기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주최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중 협력의 현황과 과제' 토론회. 이날은 처음으로 한-중 피해자와 그 가족, 전문가가 모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논의한 자리였다.
ⓒ 손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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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임신까지 했습니다. 위안소에서 아들을 낳고 굉장히 슬퍼했다고 합니다. 아이를 돌볼 마음의 여유는 없었습니다. 결국 아이는 죽었습니다. 이후 자결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발각됐고, 더욱 참혹한 치욕이 시작됐습니다. 몇 차례 탈출 시도 끝에 그곳을 빠져나와 친척집에 숨었지만, 이 사실을 안 일본군은 외가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몇 해 뒤 어머니는 가까스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뒤였다. 같은 동네 청년과 혼인했지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였다. 이때 양씨를 입양했고, 가족과 평온한 삶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사회적 차별과 편견이었다. 양씨는 1960년대 문화대혁명 당시 일본군의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끌려가기도 했다고 전했다. 

13일 오전 김민기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주최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중 협력의 현황과 과제' 토론회에 참석한 양씨 얼굴에 어느새 굵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격앙되던 순간도 여러 번이었다. 또 다른 중국인 위안부 피해자의 아들 조우요린씨도 옆에서 이따금씩 눈가를 매만졌다. 푸른색 한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고 청중석에 앉아있던 한국인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도 손수건을 놓지 못했다.

양씨의 증언은 이용수 할머니에게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 할머니는 과거 또 다른 한국인 피해자의 증언을 듣고 함께 울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양씨의 어머니가 끌려가던 날처럼, 한국에서도 숱한 부모들이 일본군에 팔을 붙들린 딸을 쫓아가다가 발길질을 당하고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이어 할머니는 어린 시절 일본군 300명이 탄 배에 또래 여자아이 4명과 태워졌던 날을 회상하며 "지금도 가만히 있다가 흐느낀다"고 전했다.

이날은 처음으로 한국과 중국의 피해자와 전문가들이 모여 위안부 문제를 논의한 자리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주로 식민지인 조선과 타이완에서 여성을 동원하다, 전쟁이 길어지자 중국 여성들도 위안부로 끌고 갔다. 그 외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미얀마의 여성들까지 합하면 피해자는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전시에 여성을 성노예로 강제 동원한 행위는 국제법상 전쟁범죄임에도 일본의 공식적 사과와 배상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한 자리에 모인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일본의 공식 사죄와 배상을 받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뜻을 모았다. 고령의 피해 당자자인 이 할머니는 "이제는 피해자가 아닌 여성활동가로서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전 세계에 알리겠다"며 주먹을 꽉 쥐었다. 특히 또 다른 중국인 위안부 피해자의 아들인 조우요린씨는 이것이 어머니의 유언이라고 전했다.

"일본의 만행에 늘 분개했던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일본을 상대로 한 배상 요구를 멈추지 말고, 정의를 바로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들로서 어머니의 유언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중국의 많은 인사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썼지만 해결되지 않았고, 그 사이 피해자들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발걸음을 멈출 수 없습니다. 어머니와 모든 피해자들을 위해 정의를 되찾겠습니다."

"70년 동안 외면한 일본... 한·중이 연대해서 압박해야"

13일 국회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중 협력의 현황과 과제에 참석한 중국인 피해자 가족과 피해자 127명의 증언을 책으로 출판한 장솽빙 작가(맨 왼쪽).
 13일 국회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중 협력의 현황과 과제에 참석한 중국인 피해자 가족과 피해자 127명의 증언을 책으로 출판한 장솽빙 작가(맨 왼쪽).
ⓒ 손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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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일본이 오랜 시간 책임을 회피하는 사이 생존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한국은 등록된 피해자 238명 중 남은 사람은 47명뿐이다. 올해만 8명이 사망했다. 남은 생존자도 평균연령 89.1세의 고령자들이다. 90세 이상 초고령자도 19명이나 된다.

중국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지난 1992년부터 피해자 127명과 만나 전해들은 증언을 책으로 출판한 장솽빙 작가는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등 지난 20년 동안 불굴의 투쟁을 벌였던 피해자 100여 명 중 생존자는 불과 11명이며, 겨우 목숨을 유지하는 상태"라고 전했다. 또 "일본정부를 상대로 20여 년에 걸친 소송은 그들에게 위로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상처에 소금을 뿌리 듯 아픔만 상기시키고 말았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날 모인 전문가들은 오랜 기간 풀리지 않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한중 양국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토론자로 참석한 양미강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공동운영위원장은 "위안부 문제를 조금 더 효과적으로 해결하려면 한-중이 연대해 일본을 압박해야 한다"면서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의지가 없어 보이는 양국 정부를 대신해 민간이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 위원장을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과제로 피해자의 증언 등 역사적 자료를 공동으로 연구해 보관하고, 각국의 교과서에 위안부를 기술하도록 요구하자는 운동 등을 제시했다.

일본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를 함께 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장솽빙 작가는 "지난 70년 동안 일본 정부는 전쟁 범죄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여겨온 적 없다"며 "일본으로부터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려면 한-중이 함께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다음 세대들이 치욕적인 역사를 잊지 않도록 위안소를 보존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생존해 있을 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일본 정부에 촉구하는 건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논리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오태규 <한겨레> 논설위원실장은 "우리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고령이고, 몇 년 뒤 살아있는 분들이 거의 없을 것이라며 조속한 문제해결을 촉구 한다"면서 "이런 논리는 자칫 위안부 할머니가 존재하지 않으면 이 문제도 자동 소멸하는 게 아니냐는 인식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위안부 문제는 할머니들의 생존여부와 관계없이 인류 사회의 보편적인 인권문제"라며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철저하고 끈질기게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일본의 사과와 배상이 이뤄지지 않는 한 이 문제가 언제까지고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발목을 잡을 거라는 인식을 갖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태그:#위안부, #일본, #국가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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