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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가사 中

"집에서 1시간 30분이 넘는 거리를 매일 출퇴근 했다."
 "집에서 1시간 30분이 넘는 거리를 매일 출퇴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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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을 또래 친구들과 달리 '백수'로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 하기 전 취업했던 직장을 4개월 만에 그만두고, 학교 졸업을 기다리면서 백수로 놀고 있었다. 그때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 많았다. 학생 신분이지만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 있는 백수'였다. 우리는 매일 같이 모여서 할 일 없이 노닥거리곤 했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그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에 진학했다. 진학도 취업도 하지 않은 나는 혼자 집에서 TV만 보며 허송세월 하였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그 친구는 '2+1' 취업으로 멀리 평택까지 다녔던 친구였다. 그런데 어느새 그 회사를 그만두고 부산에 있는 벤처기업에 다닌다고 했다. 게다가 생산직이 아닌 사무직이란다.

그 회사는 내가 만난 친구 아버지의 친구분이 운영하는 회사였다. 친구도 우연한 계기에 아버지의 도움으로 그곳에 취업을 했다. 당시 백수로 놀면서 조그만 공장 몇 곳을 돌며 전전긍긍하던 나였다. 그렇기에 그 친구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 나도 취직을 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때마침 사람이 한 명 더 필요해 "친구 한 명 더 데리고 오라"고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친구의 도움을 받아 '낙하산' 입사로 간신히 스무 살의 백수를 탈출할 수 있었다.

내가 취업한 회사는 당시 'IVTS(Info Vision Terminal System)'를 개발했다. 부산 지하철 1호선 전동차에 설치하고 IVTS의 액정화면을 통해 광고, 실시간 뉴스, 문자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회사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당 회사의 계열사였다. 모 회사에서는 IVTS의 개발과 광고영업, 생산 등을 담당하고 있었고 우리 회사는 IVTS의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회사였다.

회사는 부산 동래구에 있었는데, 경영을 담당하는 몇 명의 직원들만 그 곳에 근무했다. 회사 대부분의 사원이 소속된 기술지원팀은 노포동에 있는 부산 지하철 1호선 차량기지창 검수부에 별도 사무실에서 근무했다. 지하철 전동차에 설치된 IVTS의 빠른 유지보수를 위해 차량기지창에 상주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연봉 1080만 원, 인생 첫 '백수' 생활은 끝났다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한 뒤 집이 갑작스럽게 김해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나는 김해에서 부산 동래구까지 먼 길을 통학했다. 다행히 집 앞에서 학교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어서 그나마 고생을 덜 했다. 배차시간이 40분이었던 김해 8번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를 달려야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취업한 회사는 고등학교 다닐 때보다 훨씬 더 먼 거리인 노포동이었다. 집에서는 끝에서 끝인 거리다.

당시 출근 시간이 9시였다. 집에서 노포동까지 가려면 학교를 다닐 때 타고 다니던 8번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를 달린다. 그리고 부산 동래지하철역에 내려서 지하철로 다시 20분을 가야 한다. 출근길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노포역에 내려서 드넓은 차량기지창을 지나서 사무실까지 들어가려면 10분은 더 걸어야 했다. 서울도 아닌 지방에서 이 정도면 절대 만만치 않은 출근길이다.

지금은 부산, 김해간 '광역 환승'이 되기 때문에 김해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부산 지하철을 타면 환승 적용이 된다. 하지만 내가 노포동에 출퇴근하던 2001년에는 광역 환승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왕복 버스비와 지하철 요금을 고스란히 다 내야 했다.

당시에는 주5일 근무제도 시행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토요일까지 다 출근했으니 한 달 교통비만 해도 10만 원 정도는 들었다. 당시 내 연봉은 1080만 원이었다. 한 달에 90만 원, 세금을 내고 나면 80만 원이 채 안 됐던 것 같다. 한 달에 80만 원이 손에 들어오는데 교통비로 나가는 돈이 10만 원이었으니 엄청난 부담이었다.

두번째 직장에 출근, 계약서에 서명하다

"연봉 1080만원, 내 인생 두번째 직장에 취업했다."
 "연봉 1080만원, 내 인생 두번째 직장에 취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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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첫날 7시에 집에서 나가 노포동 사무실에 도착했다. 날 소개해준 친구를 노포역에서 만나 함께 사무실까지 걸어 들어갔다. 도착한 기술지원팀 사무실은 크지 않고 아담했다. 노포 사무실에는 우리팀 수장이었던 송 과장님을 비롯해 나를 포함 7명의 직원이 근무를 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우측에 IVTS가 설치되어 작동되고 있었다. 친구와 나는 주로 거기에 붙어서 IVTS를 뜯어보고 만져보며 실전 감각을 키워갔다.

친구 소개로 입사하게 된 거라 면접 절차도 없이 바로 출근을 했다. 그래서 첫날은 친구와 함께 회사 구경을 갔다. 먼저 금사동에 있는 모 회사로 들어가 사장님을 만나 잠깐의 미팅을 하고 사옥을 구경했다. 금사동에 있는 모 회사 사옥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회사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건물 외벽에는 회사의 로고이자 부산의 상징인 '갈매기' 50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아주 인상적이었다.

모 회사에서 회사의 근무복과 가방을 받았다. 가방은 샐러리맨의 상징과도 같은 서류가방이었다. 가방 앞에는 모 회사의 회사 로고가 박혀 있었다. 아침마다 그 가방을 가지고 출근하면 왠지 나도 TV에 나오는 멋진 직장인 중에 한 명이 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금사동 모 회사를 나와 동래에 있던 회사 사무실로 갔다. 도착한 사무실엔 경영지원팀장님과 경리분, 딱 2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어있는 임원실이 전부였다. 빈 임원실에 들어가 경영지원팀장님과 연봉 계약서를 썼다. 내 연봉은 고졸 신입사원 초봉인 1080만원이었다.

그 연봉 계약서에 싸인을 한 날은 2001년 3월 19일이었다. 내 인생 첫번째 '백수' 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두번째 직장생활이 시작됐다.

덧붙이는 글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듣는 곳
http://www.bainil.com/album/365



태그:#백수탈출, #취업, #연봉계약, #IVTS, #지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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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콘텐츠 대표 문화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주로 하고 있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자 히어로 영화 매니아, 자유로운 여행자입니다. <언제나 너일께> <보태준거 있어?> '힙합' 싱글앨범 발매 <오늘 창업했습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갑상선암 투병일기> 저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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