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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깨끗하게 단장된 당집에서 바라본 바다 모습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깨끗하게 단장된 당집에서 바라본 바다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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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금오도에서 1박한 후 명품마을로 유명한 안도 동고지 마을을 방문하기로 했다. 안도 소재지에서 동고지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소재지에서 차를  타고 백금포 해변을 거쳐 동고지까지 가는 방법과, 이야포 몽돌해변에서 출발해 해변가를 따라 걸어가는 방법이다. 아름다운 섬에 왔는데 굳이 차를 이용할 필요가 있나? 시간도 넉넉해 해변을 따라 걷기로 했다.

이야포해변에 이르자 50대로 뵈는 동네 주민이 골목길에서 나타나 동고지로 가는 오솔길을 알려주며 "한시간 반은 족히 걸릴겁니다, 어릴적에 학교 다니던 길입니다"라며 자세히 설명해준다. 어림잡아 걸어서 4㎞는 됨직하다. 이야포 해변을 따라 짙게 우거진 숲을 바라보며 1㎞쯤 올라가고 있을 때 방풍밭에서 혼자 일하던 할아버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이! 혼자가요? 혼자가면 짭짭허요. 둘이 가면 이약도 허고 그럴건디."

"예! 감사합니다"라고 건성으로 답하며 산길을 올라가던 내 머리에 퍼뜩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짭짭허요. 둘이가면 이약도 허고"  '혼자가면 짭짭하다'는 말을 던질 수 있는 나이는 80이 넘은 분들이라야 한다. 내 어릴적에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사용하던 말이기 때문이다.  다음 백과사전에서 '짭짭하다'라는 말을 찾아보았다.

① 입맛이 당기며 무언가 먹고 싶은 기분이 있다 ② 난처하거나 못마땅할 때 씁쓰레하게 다시는 소리를 내다

사전적 의미로는 '먹고 싶은 기분'과 '못마땅해 내는 소리'이다. 할아버지가 말한 뜻은 두 번째 의미다. '짭짭하다'라는 말을 두 번째 의미로 말할 수 있는 분은 이야포의 역사도 잘 알 수 있을 것 같아 100여 미터를 다시 되돌아와 할아버지한테 말을 걸었다.

"혼자가면 짭짭허요, 둘이 가면 이약도 허고 그럴건디"

이야포해변에서 방풍 농사를 짓는 83세 할아버지가 6.25당시 미군비행기가  피난민 수송선을 폭격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피난선은  건너편 하얗게 보이는 해변 인근에 정박하고 있었다. 방풍은 3년마다 죽기 때문에 씨를 받아 뿌린다며 씨앗을 보여주셨다.
 이야포해변에서 방풍 농사를 짓는 83세 할아버지가 6.25당시 미군비행기가 피난민 수송선을 폭격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피난선은 건너편 하얗게 보이는 해변 인근에 정박하고 있었다. 방풍은 3년마다 죽기 때문에 씨를 받아 뿌린다며 씨앗을 보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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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어렸을 적부터 이곳에서 살았으면 6.25 때 미군 비행기 폭격으로 피난민 200여 명이 죽은 이야포 사건을 잘 알겠네요?"
"잘 알지요. 그때 내 나이가 9살 10살쯤 됐을 거예요. 피난민을 가득 실은 배가 저기 보이는 이끼 낀 바위쯤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호주기가 뺑 돌아와서 바바바바 하고 폭격을 해서 사람이 많이 죽었어요. 내 나이가 어려서 구해주지는 못했어도 구경은 다했죠. 총을 맞아서 창자가 나온 사람이 물을 달라고 해서 물도 주고 먹을 것도 주고 그랬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전투기만 보면 호주기라고 불렀지만 실제는 동경에서 발진한 미군 무스탕전투기였다는 자료가 있다. "동네주민 중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거의 다 죽고 몇 명 남지 않았다"는 할아버지가 방풍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금오도와 안도에 널려있는 방풍은 중풍, 감기, 두통, 해열, 신경통 등에 특별한 효험이 있는 약용식물이다.

"서울병원에 가서 아내 병간호하다 집에 돌아오니 방풍이 보잘 것 없이 자랐어요. 많이 심은 사람은 돈벌이가 되지만 나는 심심풀이로 재배합니다. 방풍은 3~5월에 캐서 팝니다."

동고지로 가는 길 내내 보여주는 정겨운 모습의 안도 산책길
 동고지로 가는 길 내내 보여주는 정겨운 모습의 안도 산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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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넝쿨로 둘러싸여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아름드리 소나무들
 담쟁이 넝쿨로 둘러싸여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아름드리 소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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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내수전 해안을 닮은 길을 걷다가 태평양을 향해 뻗어있는 바위를 발견했다
 울릉도 내수전 해안을 닮은 길을 걷다가 태평양을 향해 뻗어있는 바위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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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얘기를 끝내고 해안길을 따라 걸었다. 오솔길이라고 했지만 자동차도 충분히 다닐 수 있을 만큼 넓었고 자동차 바퀴자국도 있다. 시끄럽게 우는 매미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가니 눈앞에 소나무들이 가득하다. 담쟁이 넝쿨을 뒤집어쓴 아름드리 소나무의 높이를 보니 20여 미터는 됨직하다.

소나무와 칡넝쿨사이로 해변의 모습이 보인다. 누에 모습을 한 절벽이 태평양을 향해 뻗어있는 모습이 절경이다. 어디서 본 듯해 기억을 더듬어보니 울릉도 내수전 길이 생각났다.  내수전은 닥나무가 많이 자생해서 저전포라고 불리며, 개척 당시 김내수라는 사람이 화전을 일구고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백나무가 가득해 하늘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비탈진 산쪽을 보니 집 한 채가 보인다. 호기심이 일어 다가가니 다 무너진 집에 솥 하나가 굴러다닌다. 혹시 여기도 김내수 같은 사람이 살았을까? 하는 생각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아무도 없는 이런 곳에서도 터전을 마련하고 살았던 사람에 대한 경외감이 들었다.

"백금포해수욕장, 물이 깨끗하고 조용해서 좋아요"

하늘이 안 보일정도로 울창하게 우거진 동백나무 숲 속에 무너진채 홀로 서있는 집 한채를 발견했다. 철제 솥이 마당에 굴러다니는 것으로 보아 떠난지 오래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늘이 안 보일정도로 울창하게 우거진 동백나무 숲 속에 무너진채 홀로 서있는 집 한채를 발견했다. 철제 솥이 마당에 굴러다니는 것으로 보아 떠난지 오래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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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에서 동고지로 가는 오솔길에는 어른 엄지손가락만한 천선과가 널려 있었다. 천선과는 하늘에 있는 선녀가 먹는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온 야생 과일이다
 안도에서 동고지로 가는 오솔길에는 어른 엄지손가락만한 천선과가 널려 있었다. 천선과는 하늘에 있는 선녀가 먹는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온 야생 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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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한참을 걷고 나니 허기가 진다. 그때다. 내 눈에 좋은 먹거리가 보인다. 하늘에 사는 선녀가 먹는다는 천선과가 널려있다. 크기가 어른 엄지손가락만 하다. 오염되지 않은 천선과를 따면 몇 바구니도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귀를 찢을듯이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나를 깨운다. 할아버지 말씀에 '짭짭하다'고 했는데 아니다. 여치, 귀뚜라미, 벌 나비, 멀리서 고기잡는 배들의 뱃고동 소리에 전혀 짭짭하지 않는데 '짭짭하다'고 하셨다.

내가 지나가기를 바랐던 것 처럼 죽은척하고 있었던 살모사. 한발만 더 내디뎠더라면 살모사한테 물릴뻔했다. 쉿쉿하며 쫒았지만 꼼짝않고 있엇던 녀석에게 돌을 던지자 휙 돌아서며 날카로운 이빨을 보였다. .
 내가 지나가기를 바랐던 것 처럼 죽은척하고 있었던 살모사. 한발만 더 내디뎠더라면 살모사한테 물릴뻔했다. 쉿쉿하며 쫒았지만 꼼짝않고 있엇던 녀석에게 돌을 던지자 휙 돌아서며 날카로운 이빨을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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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하게 우거진 숲을 지나 백금포해수욕장이 보이는 곳까지 오니 곳곳에 빈집이 서 있다. 어떤 집은 칡넝쿨이 지붕 끝까지 덮어버렸다. 인간이 자연을 이길 것 같았는데 자연의 힘은 위대하다. 해수욕장으로 가는 지름길로 고구마 밭이랑이 보여 몇 발짝 들어서다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살모사 몸통과 꼬리가 보였기 때문이다. 쓰레기와 함께 있어 죽은 뱀 같았지만 혹시 몰라 "쉿쉿" 소리를 내며 쫓아도 반응이 없어 지나가려다 죽은 걸 확인한 후 건너가고 싶어 사진을 찍고 돌을 던지자 고개를 홱 돌려 물려다가 도망가 버린다.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했다.

고운모래로 덮인 백금포해수욕장으로 들어서니 대여섯 명의 외국인이 캠핑을 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온 존(John)과 친구들은 모두 여수 인근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원어민 교사들이다. 이곳이 처음이라는 그들에게 백금포해수욕장에 대한 소감을 묻자 "물이 깨끗하고 사람이 얼마 안 돼 조용해서 좋다"는 얘기다.

백금포해수욕장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외국인들. 여수 인근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원어민 교사들이다. 물이 깨끗하고 조용해서 좋다고 말했다.
 백금포해수욕장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외국인들. 여수 인근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원어민 교사들이다. 물이 깨끗하고 조용해서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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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소재지로 돌아와 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5~6년 전에 들렀던 당집에 들렀다가 실망했다. 잘 보존돼왔던 당집은 어디로 가고 마을 유래를 알리는 유래비 비석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당집 주변은 잘 다듬어져 깨끗한 산책로가 되어 보기는 좋았다.

섬에 있는 당집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로부터 어부들을 보호해달라고 빌었던 곳이다. 천재지변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소원을 빌었던 성소였지만 약간 으스스한 기분이 나는 곳이다. 주민들이 당집을 얼마나 신성시했을까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유래비에 기록되어 있었다. 유래비의 주요 내용이다.

"안도는 선사시대의 많은 유물이 발견되고 장보고 선단이 오가는 길목이다. 당시 장보고의 보호를 받으며 불법을 공부했던 일본 승려 옌닌이 머물고 가기도 했다. 1860년 대화재로 300여 호가 전소되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경찰주재소와 심상소학교까지 있었던 요지이다. 여순사건에 이은 6.25 전쟁 때는 피난민 수송선의  폭격으로 수많은 인명이 산화한 곳. 사라호 태풍 때는 100여 호가 침수 소실되기도 해 아픈 역사를 간직한 섬이다." 

안도 소재지 뒷동산에 있는 당집으로 몇년전까지만 해도 보존되어 있었다. 지금 당집은 없어지고 유래비만 남았다. 유난히도 대형사고를 많이 당한 안도주민들이 신성시하며 모셨을 곳인데 안타깝다.
 안도 소재지 뒷동산에 있는 당집으로 몇년전까지만 해도 보존되어 있었다. 지금 당집은 없어지고 유래비만 남았다. 유난히도 대형사고를 많이 당한 안도주민들이 신성시하며 모셨을 곳인데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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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문화는 사라지고 비석만 세워져 있어 혀를 차다가 마을로 내려와 한 할머니(87세)에게 "왜 당집을 없애 버렸습니까? 이곳 섬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 아닙니까?" 하고 묻자 대답이 돌아왔다.

"내 남편이 10번도 넘게 제주가 됐어요. 당제가 있기 3일 전부터 밥도 굶고 목욕재계한 후 몸을 정갈하게 유지하고 그랬었는데 교회 믿는 이장이 없애버려 난리가 났어요."

깨끗한 산책공간도 좋지만 전통과 문화를 보존할 방법은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섬은 어디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안도의 해변길도 비렁길 못지않은 절경이었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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