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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환 화백의 화실 내부에 걸려있던 연구소 간판. 건곤감이가 잘못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태극기 그림이 선명하다.
 김두환 화백의 화실 내부에 걸려있던 연구소 간판. 건곤감이가 잘못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태극기 그림이 선명하다.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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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양 화가 1세대 설봉 김두환(1913~1994) 화백의 아뜰리에와 활동 자료를 등록문화재로 지정하고 문화 자원으로 보존,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난달 서울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에서 열린 설봉 김두환 작품전에 1941년작 100호 크기의 가족 그림과 해방 전부터 김 화백의 화실에 걸려있던 '예산향토문화연구소'현판이 공개돼 큰 관심을 모았다.

가족그림에는 화백의 어머니와 본인과 부인, 장남 기원(1932년생), 장녀 기풍(1937년생), 차녀 기강(1940년생)씨가 등장한다. 현재 유족대표인 차남 기융(1943년생)씨가 태어나기 전이다. 현판은 김 화백이 직접 쓴 글씨에 태극기까지 그려있어 일제강점기에 우리 향토사와 우리 문화를 보존연구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작품 소장자와 유족대표 기융씨는 전시회가 끝난 직후인 8월 27일 충남 예산군 예산리에 위치한 김두환 화백의 아틀리에를 방문해 시멘트로 덧입혀 있던 벽화의 복원 가능성을 살펴본 뒤, 가족 그림과 간판, 아틀리에에 대한 등록문화재 지정 신청 계획을 알렸다.

화실 용도로 지어 김두환 화백이 사망하기 전까지 작품활동을 했던 건물이 위태로운 모습으로 버티고 있다. 붉은 벽돌과 원형창의 건축디자인이 특이하다.
 화실 용도로 지어 김두환 화백이 사망하기 전까지 작품활동을 했던 건물이 위태로운 모습으로 버티고 있다. 붉은 벽돌과 원형창의 건축디자인이 특이하다.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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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장자는 "1940년대 초에 그려진 100호 크기의 가족 그림은 대한민국에 두 작품 뿐이어서 미술계에서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구매를 원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화백의 고향에서 설봉기념관이든 미술관이든 관련사업을 하게 되면 그때 활용돼야 한다는 생각에 응하지 않았다. 빠른 시일 안에 사업이 진행된다면 기증할 의사가 있다"면서 "당시 유명 화가의 아틀리에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곳은 없다. 더구나 설봉선생이 직접 그린 벽화를 충분히 복원 가능할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된다면 우리 미술사에서도 의미있는 일이고, 예산군에도 귀한 자원이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아틀리에가 영업장으로 임대된 뒤, 인테리어를 하면서 페인트칠을 하지않고 미장을 한 게 오히려 다행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화물감과 시멘트가 분리돼 그림이 드러난 곳을 보니 색채며 그림의 형태가 충분히 복원 가능할 것으로 확신한다"라고 덧붙였다.

1948년작 자화상(유화, 50호). 배경에 화가의 아뜰리에에서 작품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았는데, 손수 그린 벽화의 일부가 그대로 묘사돼 더 유명한 작품이다.
 1948년작 자화상(유화, 50호). 배경에 화가의 아뜰리에에서 작품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았는데, 손수 그린 벽화의 일부가 그대로 묘사돼 더 유명한 작품이다.
ⓒ 작품 소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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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실은 한국 최초 여성서양화가인 나혜석과 거장 이응노 화백이 기거하며 김두환 화백과 교류했던 장소이기도하다. 복원 관리한다면 문화재적 가치 뿐만 아니라, 한국예술 거장들의 활동 공간으로 스토리텔링해 도심 재생 콘텐츠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와 관련 기융씨는 "어머니로부터 나혜석씨가 일본에서 들어온 뒤 수덕여관으로 가기 전에 우리집서 지냈다고 들었다. 당시 발레그림을 선물로 받았다는데 훗날 막내동생 등록금이 없어 판매해 여러 사람을 거친 뒤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전시할 때, 나에게 '김두환 화백 화실에서 나온 그림이라고 하는데 맞느냐'는 확인 전화가 온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응노 화백은 나도 어릴 적에 뵀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가 닭백숙을 해드리려는데 닭을 잡지 못하자 직접 나서 잡아주고, 화선지에 동양화를 많이 그리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증언했다.

1970년대 언론에 게재됐던 김두환 화백 부부 사진. 화백의 화실에서 찍은 것으로 뒤에 벽화가 보인다.
 1970년대 언론에 게재됐던 김두환 화백 부부 사진. 화백의 화실에서 찍은 것으로 뒤에 벽화가 보인다.
ⓒ 김기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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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면서 유화물감과 시멘트 성분이 분리돼 손으로 툭 쳐도 시멘트 조각이 떨어지면서 벽화가 그대로 드러난다.
 세월이 흐르면서 유화물감과 시멘트 성분이 분리돼 손으로 툭 쳐도 시멘트 조각이 떨어지면서 벽화가 그대로 드러난다.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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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현판과 관련해서는 "화실 밖에는 '문화의집'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었고, 이번에 공개한 현판은 내부 현관 안쪽에 걸려있던 것이다. 아버님께서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직후인 1940대 초에 제작해 거신 것으로 들었다. 아마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 건물 안에 걸어놓은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는 아틀리에와 현판, 가족그림 등을 등록문화재로 지정신청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재 충남도 등록문화재는 모두 43건으로 예산군은 수덕사 만공탑 1건만 지정받았다.

이에 대해 (사)한국미술협회 예산지부 이영옥 지부장은 "무너져 가는 김두환 화백의 생가 바로 뒤로 추사의 거리가 조성되고 추사의집이 신축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착잡하다. 한국화단의 거장이고, 워낙 이야기가 많은 화가여서 원도심의 문화콘텐츠로도 충분히 활용가치가 있는데 자꾸 시간만 흐르고 있다"고 안타까워하면서 "수원의 나혜석 거리, 제주도의 이중섭거리처럼 김두환 화백은 예산읍 원도심에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좋은 인물 자원이며, 대가이다. 미술계의 일로만 생각하지 말고 예산읍내 주민과 행정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한편 2013년 설봉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특별전시회와 관련 세미나 등이 열려 묻힌 인물자원에 대한 조명사업이 시작되는가 했지만, 반짝 관심으로 그치고 말았다.

1941년, 김두환 화백이 자신의 가족을 모델로 그린 100호짜리 대작 <가족>.
 1941년, 김두환 화백이 자신의 가족을 모델로 그린 100호짜리 대작 <가족>.
ⓒ 작품 소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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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신문>과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김두환 화백, #김두환 아뜰리에, #김두환 작품, #등록문화재,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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