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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 생활 26년만에 고향 면장으로 부임했다.
 공직 생활 26년만에 고향 면장으로 부임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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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이런 행사를 봤던 적 있는데, 요즘도 이런 거 하네요."

귀농을 한 듯 보이는 한 아주머님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들어섰다.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삼일1리 출신이 면장으로 부임했다. 지난 8월 29일 이 마을에서 환영행사를 열었다. 주민 15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화천군수(최문순)까지 초대한 잔치. 국민의례를 시작으로 신임면장 약력보고, 꽃다발 증정, 노인회장님을 비롯한 군수 환영사에 이은 주인공 면장 인사 말씀까지 준비한 것으로 보아 이미 조촐한 수준을 넘었다.

내 공무원 생활 26년. 처음 공직에 첫발을 디딜 때 뚜렷한 목표를 정하진 않았지만, 면사무소 계장 자리에 오른다면 성공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면장이 된 거다.

마을잔치. 최문순 화천군수, 박광재 삼일1리 노인회장, 김창덕 이장, 류희상 군의회 부의장, 최진규 의원, 김경이 명예면장, 이대섭 번영회장, 김순성 주민자치위원장 등 주요인사들이 자리를 같이 했다(우측은 우리 부부).
 마을잔치. 최문순 화천군수, 박광재 삼일1리 노인회장, 김창덕 이장, 류희상 군의회 부의장, 최진규 의원, 김경이 명예면장, 이대섭 번영회장, 김순성 주민자치위원장 등 주요인사들이 자리를 같이 했다(우측은 우리 부부).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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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첫 발령을 강원도 정선으로 받았다. 화천이 고향이면서 그곳을 택한 건 순전히 자존심 때문이었다. 화천을 지망했을 경우 사내면사무소 근무는 불가피할 것 같았다. 군청도 아닌 지역 면사무소에서 일한다는 게 왠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히 아주 멀리 가고 싶었다.

"이래서 지역에서 공직생활을 해야 하나 보다." 

2년 뒤, 8급 진급자를 발표했다. 유심히 보니 40명 동기 중 36명만 진급되고 4명이 빠졌다. 그 4명 중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패배감. 이유가 뭘까. 정답은 아주 쉽게 나왔다. 그곳 출신이 아니라는 것.

동기들보다 6개월 혹은 그 이상 늦어버린 상황.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그들과 경쟁에서 뒤처질 건 뻔했다. 고향 화천으로 연고지 신청을 하게 된 결정적 이유다. 1993년, 우여곡절 끝에 고향 화천으로 전출이 이루어졌다.

'빽(배경)이 있느냐'는 소리 듣던 나, 그게 아니었다

1999년 <경향신문>에서 내 기사가 대서특필 되기도 했다. 이 일을 계기로 정보통신부 장관상을 받고 신지식인에 선정됐다.
 1999년 <경향신문>에서 내 기사가 대서특필 되기도 했다. 이 일을 계기로 정보통신부 장관상을 받고 신지식인에 선정됐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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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내 공직생활은 참 순탄했다고들 주위에서 말한다. 결과만 놓고 보면 그럴 수 있다. 화천군으로 전입 이후 22년간 줄곧 군청에서 근무했다. 읍면 근무경력은 전혀 없었다. 진급하면 으레 읍면으로 나가는 게 관례로 되어있는 시골 공직풍토에서 예외적인 경우다. 특히 계장으로 진급하면 모두 읍면으로 나가는데 나만 지역개발과 주무담당인 지역경제 계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쟤 대체 뭐냐? 뭔가 상당한 빽(배경)이 있는 게 분명하다."

많은 공무원은 시기와 질투를 넘어 나를 적대시했다. "너 주무계장으로 절대 인정 못 한다"는 노골적인 말도 들었다. 사실 (사내면 출신)선배 공무원이 있어서 나를 돌봐준 일도 없었고, 특출한 고향 출신 의원이 있어 나를 밀어준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나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다.

무언가 있다면, 내 고향을 위해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자부심에 다소 엉뚱한 일도 서슴없이 했던 것일 게다.

1999년, 군 단위 지자체 홈페이지가 없던 시절. 사이트 하나를 개설해 수년간 군청 홈페이지를 대신했다. 3개 사단 군 장병 면회객을 위한 다양한 정보제공과 숙박, 음식업소 안내에 중점을 뒀다. 예상은 적중했다. 접속자가 하루 1천여 명이 넘었다. 그 사건(?)으로 경향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정보통신부 장관상 수상에 이어 신지식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중앙정부로부터 지방 교부세를 더 얻어내기 위해 군 장병도 지역 인구수에 포함해야 한다는 논리도 폈다. 이를 위해 엑셀로 분석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전차 등 군 장비 이동 시 훼손된 도로복구와 환경정비를 위해 군인도 주민 수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억지에 가까웠지만, 지휘부 입장에선 긍정적으로 평가했었나 보다.

면장이 할 일, 신발 굽이 닳도록 주민을 찾아다니는 것

친구 녀석들은 이런 현수막을 걸어 나를 축하해 줬다.
 친구 녀석들은 이런 현수막을 걸어 나를 축하해 줬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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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자리구나!'

지자체에선 매년 2번에 걸친 정기인사를 단행한다. 진급자, 오랜 기간 한 자리에서 근무한 사람, 담당 업무가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 등 많게는 150여 명이 한꺼번에 자리를 옮긴다. 가는 사람에 대한 아쉬움, 오는 사람을 위한 환영. 인사가 있을 때면 지역 식당가는 들썩인다.

인사이동은 사실 새로운 업무를 할 수 있다는 기대감보다 원인 모를 설렘이 들뜨게 한다. 내게 그런 행운(?)은 거의 오지 않았다. 한번 자리를 옮기면 보통 3년을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지역경제, 홍보, 관광기획, 군정 기획. 12년간 계장직책으로 딱 4번 자리를 바꿨다. 지휘부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란 쪽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면장으로 승진했을 땐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읍면은 종합행정을 처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축하기념사진. 가운데 최문순 화천군수, 옆의 스님은 아버지 같이 나를 이끌어 준 형님이다.
 축하기념사진. 가운데 최문순 화천군수, 옆의 스님은 아버지 같이 나를 이끌어 준 형님이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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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이런 행사는 처음 봅니다. 신 면장이 어르신들 따뜻하게 잘 모시고, 사내면을 활기 넘치는 지역으로 만들 겁니다."

최문순 화천군수는 "마을 사람들이 면장 취임축하잔치를 열고, 많은 현수막을 붙인 경우는 처음이다"라고 말했다.

사내면은 2개 사단이 주둔해 있다. 이들 부대 때문에 지역경제가 좌우된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지역 상인들과 군부대 간 갈등도 있을 수 있다. 국방부 방침도 바뀌었다. 부대 인근 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던 위수지역이 유사시 정해진 시간대에 복귀 가능한 지역으로 확대 변경됐다. 면회객이나 장병들은 인근 춘천시까지 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들을 우리 지역에 머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가장 큰 과제인 듯 보인다.

어르신들의 행정기관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도 좁혀야 한다. '제가 이번에 새로 온 면장입니다'라고 소개를 드릴 때 어르신들이 먼저 허리를 90도로 굽히신다. 왜일까. 우리나라는 1945년 광복됐다. 이후 38선이 그어지면서 화천은 이북 땅이 됐다. '공산치하에서 살아남으려면 기관원 말 잘 듣고, 많이 굽히는 게 최고였다'는 어느 할머님 말씀에서 당시 상황을 짐작게 했다.

습성화된 탓일까. 이곳 어르신들은 관공서 출입을 꺼리신다. 시내에 나올 일이 있으면 면장실에 들러달라는 말에 "우리가 어떻게"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뜻밖에 많다. 직접 자주 찾아뵙는 게 최선일 듯싶다.

"젊으신 군인가족 분들 낮에 주로 뭐 하세요?"

이곳은 군인 아파트가 유독 많다. 아파트 단지 하나가 1개 리(里)를 이루는 곳도 있다. '글쓰기 무료강좌'를 열어 보겠다고 했더니, 이장님은 쾌히 승낙했다. 지역 상인들을 대상으로 '장사 잘하는 법' 토론회도 구상 중이다. 앉아 기다리는 행정이 아닌 주민들 속으로 파고드는 면정을 펼쳐 나가기로 했다.

아내는 '홀아비 냄새' 타령... 든든한 면장이 되겠습니다

사내면 지역에만 10개의 현수막이 걸렸다. 열심히 일하라는 주민들의 주문으로 받아들였다.
 사내면 지역에만 10개의 현수막이 걸렸다. 열심히 일하라는 주민들의 주문으로 받아들였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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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되지 않았는데 홀아비 냄새 만들어 내는 것도 타고난 능력이야."

(화천읍내에 있는)집에서 이곳까지 차량으로 40여 분 걸린다. 면사무소 관사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관사라고 해봐야 방 두 칸에 TV와 냉장고가 전부다. 빨래 때문에라도 일주일에 한두 번 집에 들르겠다는 말에 아내가 직접 들어오겠단다. 못 이기는 체 그러라고 했더니 오자마자 홀아비 타령이다.

"선 조치 후 보고. 보고서는 타이핑치지 마라. 그냥 내가 이해하기 쉽게 연필로 그려 설명하면 된다."

면장으로 오자마자 직원회의를 소집했다. 주민들 처지에서 생각하고 주민들 생활과 직결된 사안이면 일단 시작한 다음 보고해 달라고 했다. 보고서 만드느라 시간 허비하지 말자고 말했다. 들은 내용은 내가 정리하면 된다.

저녁 시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면장실에 남아 있기로 했다. 면사무소에 불이 켜져 있어야 주민들 마음이 편안할지 모른다. 마치 순찰을 하는 경찰차가 보일 때 안심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신광태 시민기자는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장입니다.



태그:#사내면장, #화천군 사내면,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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