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서울시는 청계천 복원 10주년을 맞아 시민걷기대회를 비롯한 다양한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 복원 10주년을 맞은 청계천. 서울시는 청계천 복원 10주년을 맞아 시민걷기대회를 비롯한 다양한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 전상봉

관련사진보기


청계천이 복원된 지 10년이 지났다. 서울시설공단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청계천을 다녀간 방문객은 1억9145만 명에 달한다. 하루 평균 5만4천 명, 연평균 1천800만 명의 내·외국인이 즐겨 찾을 정도로 청계천은 서울 도심의 명소가 됐다.

청계천 복원은 다음 네 가지의 목적 하에 추진됐다. 청계고가의 노후화에 따른 안전문제의 근원적인 해소, 환경 친화적인 도시 공간의 조성, 광교·수표교 등 서울의 역사성과 문화성 회복, 낙후된 청계천 주변지역의 개발을 통한 강북과 강남의 균형발전 도모가 그것이다.

2003년 7월 1일부터 2005년 9월 30일까지 진행된 복원공사에는 연인원 69만4천 명과 3867억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복원공사는 2003년 7월부터 9월까지 청계고가와 청계로를 철거한 후 2003년 10월부터 2005년 9월까지 청계천의 물길과 주변을 복원하는 순으로 진행되었다. 그런 다음 2005년 10월 1일 '청계천 새물맞이' 행사를 통해 복원된 청계천이 시민들에게 첫선을 보였다.

청계천, 개발독재의 상징이 되다

‘청계천 복원 10주년 기념 걷기대회’에 참가한 시민이 청계천 옛 모습 앞을 지나고 있다.
▲ 청계천 옛 모습. ‘청계천 복원 10주년 기념 걷기대회’에 참가한 시민이 청계천 옛 모습 앞을 지나고 있다.
ⓒ 전상봉

관련사진보기


한반도는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이다. 이에 반해 내사산(북악산, 남산, 낙산, 인왕산)에 둘러싸인 한양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청계천은 서울 서북쪽에 위치한 인왕산과 북악산, 남산 기슭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청계천의 발원지는 인왕산 자락 백운동천과 북악산에서 흘러내리는 삼청동천이다.

청계천의 옛 이름은 개천(開川)이다. 기록에 따르면 1411년 조선 태종은 개거도감(開渠都監)을 설치하고 이듬해 정월 개천을 정비했다고 한다. 세종 23년(1441년)에는 수표를 설치하여 개천의 수량을 측정하기도 했다. 개천의 대대적인 준설은 영조 36년(1760년)에 이루어졌다. 영조는 그해 20만 명을 동원하여 57일간 준설공사를 실시했다. 준설공사 후 영조는 준천사를 설치하고 개천의 개수와 준설을 담당토록 했다.

청계천이라는 이름은 1916년부터 사용됐는데 인왕산 자락의 청풍계천(淸風溪川)에서 유래했다. 한양 도심을 흐르는 청계천은 이름과 달리 생활하수가 흘러드는 더러운 하천이었다. 일제는 1918년부터 청계천 정비사업을 시작한다. 정비사업은 일본인의 위생문제와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식민지배의 중추기관을 청계천 이북으로 옮기기 위한 목적의 일환이었다.

원래 위치에서 155m 상류에 복원된 광통교는 청계천을 22m 정도의 넓이로 복원한 결과 변형된 모습으로 복원됐다.
▲ 복원된 광통교. 원래 위치에서 155m 상류에 복원된 광통교는 청계천을 22m 정도의 넓이로 복원한 결과 변형된 모습으로 복원됐다.
ⓒ 전상봉

관련사진보기


1925년 상류 지천인 옥류동천과 사직동천을 복개(지금의 서울 서촌일대인 신교동에서 도렴동까지)하면서 청계천 복개가 시작됐다. 그후 1937년 청계천 본류인 태평로(청계광장)에서 광통교까지 복개공사가 추진되어 1942년 완공됐다.

청계천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오염이 더욱 심해졌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청계천 주변은 판잣집이 밀집된 서울의 대표적인 빈민촌이 되었다. 빈민촌이 형성되고 오염이 극심해지자 이에 대한 대책으로 청계천 복개공사가 재개된 것이다.

1955년 광통교 상류 136m를 복개한 다음 1958년 5월부터 1961년 12월까지 광교에서 청계6가(동대문운동장)에 이르는 도심 구간이 복개됐다. 그후 1965년부터 1967년 청계6가에서 청계8가(신설동)까지, 1970년부터 1977년에는 청계8가에서 신답철교까지 복개공사가 진행되었다.

청계천 복개는 서울 도심 구조를 바꿀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복개공사와 함께 주변 판잣집들이 대대적으로 철거되었고 중학천, 청운천, 오장천, 성북천 등 청계천 지천의 복개가 이어졌다. 또한 청계천 복개에 자극을 받아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대전 등지에서도 도심 하천의 복개공사가 잇달았다.

청계고가도로의 처음 이름은 3.1고가도로였다. 1984년 11월 청계고가도로로 이름이 변경되면서 3.1고가도로는 청계고가에서 남산1호터널 방향으로 연결되는 고가를 가리키는 명칭이 됐다.
▲ 철거되기 전 청계고가 모습. 청계고가도로의 처음 이름은 3.1고가도로였다. 1984년 11월 청계고가도로로 이름이 변경되면서 3.1고가도로는 청계고가에서 남산1호터널 방향으로 연결되는 고가를 가리키는 명칭이 됐다.
ⓒ 최인기

관련사진보기


복개공사와 함께 고가도로 건설도 추진되었다. 1966년 취임한 김현옥 서울시장은 '돌격 건설' 구호를 외치며 도로를 뚫고, 높은 건물을 짓고, 한강에 제방을 쌓는 등 건설공사에 몰두했다. 제3항만사령부 사령관 출신인 김현옥에게 도로는 종교와 같았다. 김현옥 전 시장은 도로를 사람의 혈관에 비유, 도로가 막힘없이 잘 뚫리면 국가와 도시가 부강해진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에 기초하여 도로를 확장하고 육교와 지하도, 입체교차로 건설에 주력했다.

서울시는 1967년 벽두 삼각지, 광희동, 연희동에 입체교차로 건설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에 입각하여 1968년 8월 15일 광교에서 용두동을 잇는 고속고가도로 기공식이 개최되었다. 청계천 위로 설계된 청계고가도로는 토지 매입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경제성과 대통령 박정희의 워커힐호텔 왕래의 편의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건설됐다.

청계고가도로는 1971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서울 중구 광교에서 성동구 마장동을 잇는 청계고가도로는 폭 16m, 길이 5650m에 이른다. 이렇게 건설된 청계고가는 박정희 정권의 조국 근대화를 선전하는 홍보물이자 개발독재를 상징하는 구조물로 각인되었다.

거대한 인공어항의 탄생

"1991년 봄 공학자인 필자(노수홍 교수)와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역사학자인 이희덕 교수와의 우연한 대화가 청계천 복원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복개 전 청계천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가진 노교수는 필자에게 현대 첨단기술로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구조물을 걷어내고 맑은 물이 다시 흐르는 청계천으로 복원할 수 있는지 문의하였다.

… 필자는 1998년 봄에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께 청계천 복원의 가능성을 설명할 기회가 있었다. 박 선생님은 청계천은 서울의 얼굴이며 상징이므로 꼭 복원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 후 박 선생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복원의 당위성을 강조하여 공론화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 노수홍 연세대 교수 기고문 '청계천의 미래' 일부(서울신문 2006년 1월 23일)

이렇게 시작된 청계천 복원 문제는 2000년 9월 1일 강원도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제1회 청계천살리기 심포지엄'이 개최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이날 심포지엄에는 서울시정개발연구원(현 서울연구원)의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등 청계천 복원의 당위성과 공감대를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1년이 되자 청계천 복원은 사회적 이슈로 부상한다. 한해 앞으로 다가온 서울시장 선거와 맞물리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시민들의 의견 또한 청계천 복원에 우호적이었다. 한겨레신문이 2002년 4월 8일 보도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청계천 복원에 찬성한 의견은 75%나 됐다.

2002년 6월 13일 치러진 서울시장 선거는 청계천 복원 문제가 승패를 갈랐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민주당 김민석 후보는 청계천 복원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이명박 후보는 민자를 유치해서라도 청계천을 복원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포명했다. 반면 김민석 후보는 제반 여건을 감안할 때 청계천 복원은 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선거 결과 청계천 복원을 공약한 이명박 후보가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이명박 서울시장은 2002년 7월 2일 취임식에서 청계천 복원을 공식 천명했다. 7월 13일에는 청계천복원추진본부(본부장 양윤재)를 설치하였고, 9월에는 시민단체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가 출범했다.

해가 바뀐 2003년 6월에는 청계천복원종합상황실을 설치하여 청계천 주변 상인들을 전담하도록 했다. 그런 다음 2003년 7월 1일 오후 2시 '청계천 복원공사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들어갔다.

철거와 복원 순으로 진행된 복원공사는 2003년 10월 5일 청계고가도로의 철거를 완료했다. 청계천 복원공사는 3구간으로 나누어 진행됐다. 1공구는 태평로입구~광장시장(2km), 2공구는 광장시장~난계로(2.1km), 3공구는 난계로~신답철교(1.7km)였다.

도심 하천공원으로 설계된 청계천은 구간에 따라 하천폭 19∼113m, 수로폭 6∼72m, 고수부지폭 2∼72m, 고수호안 높이 3∼7m, 저수호안 높이 1∼3.7m로 복원되었다. 총 22개의 다리(인도교 7개, 차도교 15개)가 놓였고, 하루 평균 4만㎥의 한강물을 끌어와 40cm 정도의 수심을 유지하는 도심 하천으로 거듭났다.

청계천이 복원되자 시민들은 환호했다. 개장 직후인 2005년 10월에만 640만 명의 시민들이 다녀갈 정도로 반응은 뜨거웠다. 청계천은 서울 도심의 명소로 자리 잡았고 빛초롱축제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는 상징적인 공간이 됐다. 또한 청계천이 복원되자 전국의 복개천이 연쇄적으로 복원될 정도로 그 파급 효과는 엄청났다.

그러나 복원된 청계천은 시민들의 환호에도 가릴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첫 번째는 하천의 직선화이다. 시민들이 즐겨 찾는 청계1가에서 청계7가까지의 청계천은 폭 22m의 직선하천으로 복원되어 역사성과 생태성이 단절되고 말았다. 집중호우와 교통문제를 고려한 결과라고 하지만 하천의 직강화는 광통교와 수표교의 복원을 어렵게 만들고, 자연생태성을 단절시키는 결정적인 장애 요인이다.

두 번째는 영조 때 조성된 호안석축의 파괴이다. 복원공사를 벌이던 중 발견된 장통교, 수표교, 하량교, 효경교, 마전교, 오간수교, 연도교 기초석과 호안석축 유구는 영조 때 조성된 청계천의 유적들이다. 이명박 시장은 공기 단축과 산책로 조성을 이유로 청계천의 호안석축을 발굴하지 않고 뚝섬 야적장에다 방치하여 역사유적을 훼손했다.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로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진 수표교는 광통교와는 반대로 다리길이가 길어 원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진 수표교.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로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진 수표교는 광통교와는 반대로 다리길이가 길어 원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 전상봉

관련사진보기


세 번째는 광통교와 수표교를 온전하게 복원하지 않은 점이다. 길이 12.3m, 폭 14.4m의 광통교는 육조거리-운종가-숭례문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중심통로에 위치한 다리로 1958년 청계천과 함께 복개되었다. 본래의 위치에서 155m 상류에 복원된 광통교는 하천폭이 너무 넓어 왜곡된 모습을 하고 있다. 반면 청계3가에 있던 길이 27.5m, 폭 7.5m의 수표교는 하천폭이 너무 좁아 청계천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장충단공원에 방치해 둔 상태다.

네 번째는 거대한 인공어항으로 복원된 청계천은 상류지천과 단절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청계천은 직강화의 문제뿐만 아니라 지천들과의 연계를 고려하지 않고 복원되어 자연생태성을 살리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한강물을 끌어와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복원, 연간 18억원의 용수비용이 지출되고 있다. 상류 지천과 단절된 청계천은 15분당 3mm의 비가 내리면 자동으로 수문이 열린다. 이때 빗물과 함께 오염물질이 청계천에 유입되어 물고기가 집단폐사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청계천의 물고기 집단폐사는 2006년 6월 8일 첫 발생 이후 2015년 8월까지 6차례 발생했다).

이상과 같은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서울시는 2012년 3월 청계천시민위원회를 구성, 청계천 개선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청계천시민위원회는 2014년 3월 '청계천 역사성 및 자연생태성 회복' 계획을 수립하고, 2050년까지 장기적으로 청계천의 역사성과 자연생태성을 복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럼에도 인공어항으로 복원된 청계천의 근원적인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워 보인다.

청계천으로 흥한 사람들과 망한 사람들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청계천 주변에서 생계를 이어가던 1만여명의 노점상과 3만여명의 점포상인들은 생계의 벼랑으로 내몰리고 잊혀져갔다.
▲ ‘청계천 복원 10년, 잊혀진 사람들’ 기자회견(10월 1일) 모습.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청계천 주변에서 생계를 이어가던 1만여명의 노점상과 3만여명의 점포상인들은 생계의 벼랑으로 내몰리고 잊혀져갔다.
ⓒ 최인기

관련사진보기


청계천이 안고 있는 근본 문제는 도심 하천공원을 빨리 만들어야한다는 관점에서 비롯됐다. 복원된 청계천은 이명박 전 시장의 신개발주의의 산물이다. 이명박 전 시장의 신개발주의는 전시행정과 성장주의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1960~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개발주의와 맥을 같이한다. 차이가 있다면 박정희의 개발주의가 자연과 역사를 노골적으로 파괴하는 방식이라면, 이명박의 신개발주의는 녹색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처럼 위장한다는 점이다.

신개발주의에 기초한 청계천의 복원은 여러 문제와 갈등을 야기했다. 복원공사가 한창이던 2004년 3월 5일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의 주요 인사들이 청계천에서 발견된 문화재의 파괴를 이유로 이명박 전 시장과 양윤재 본부장을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한 사건은 그 단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청계천은 도심 휴식공간이 태부족인 상황에서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청계천이 복원되자 주변의 대기질이 개선되었고, 소음은 줄어들었다. 열섬현상의 약화는 눈에 띄게 나타난 청계천 복원 효과다. 기상청 산하 기후연구소가 발표(2005년 10월)한 자료에 따르면 복원 전 청계천 주변지역의 기온은 서울 평균보다 약 2.2도까지 높았으나 복원 후 1.3도 낮아졌다.

복원되기 전 청계천로 주변에는 6만여개 점포와 22만명에 달하는 상인, 1500여명의 노점상이 장사를 하는 대형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 복원 공사 직전의 청계천 모습. 복원되기 전 청계천로 주변에는 6만여개 점포와 22만명에 달하는 상인, 1500여명의 노점상이 장사를 하는 대형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 최인기

관련사진보기


이 대목에서 짚어봐야 할 것이 있다. 청계천의 복원으로 발생한 편익이 공평하게 나눠졌느냐이다. 복원 후 청계천변 가게들의 매출은 크게 올랐고 땅값은 뛰었다. 시정개발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복원 후 1년 동안 청계천 주변 땅값은 최대 50%, 아파트 매매가는 25% 이상 올랐다.

반면 청계천에서 생계를 이어가던 1만여 명의 노점상과 3만여 명의 점포상인들은 생계의 벼랑으로 내몰리고 잊혀갔다. 노점상의 경우 서울시의 말만 믿고 동대문풍물시장으로 이전했다가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건설되면서 황학동으로 내몰렸다.

3만여 명의 청계천 상인들 중 서울 송파구 문정동에 조성된 가든파이브에 입주하겠다고 의사를 밝힌 사람은 6천 명 정도였다. 2010년 가든파이브가 개장되자 실제 입주한 상인은 2천여 명뿐이었고, 현재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사람은 100여 명에 불과하다.

청계천 복원의 혜택을 본 사람 중 이명박 전 시장을 빼놓을 수 없다. 이명박 시장은 2006년 6월 퇴임한 다음 청계천 복원이라는 치적을 앞세워 2007년 12월 19일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역설적이게도 청계천이라는 성공 신화는 대통령 이명박에게도, 그 참모들에게도 독이 되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청계천 신화의 재현을 위해 4대강 사업을 추진하여 온 국토를 파헤치고 국고를 탕진했다. 청계천 복원에 참여했던 양윤재 청계천복원추진단장을 비롯한 연구자들은 떼를 지어 4대강으로 날아가 파괴적인 후과를 남기는 데 가담했다.

후임 서울시장에게도 청계천 신화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이명박 시장의 뒤를 이은 오세훈 시장은 청계천 신화를 코스프레하기 바빴다. 오세훈 전 시장은 뉴타운사업을 확대하여 부동산 투기붐을 부채질했고, 디자인 서울과 한강르네상스사업을 추진하여 서울 곳곳을 파헤쳐 놓았다.

이처럼 청계천은 눈에 보이는 장밋빛 신기루와 보이지 않는 아픔을 안고 오늘도 흐르고 있다. 청계천 복원 10년. 이제 우리는 청계천의 화려함과 함께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왜 쫓겨났고, 청계천 복원의 성공 신화가 왜 4대강과 서울 곳곳을 파헤치는 달콤한 독이 되고 말았는지 차분하게 돌이켜 볼 때가 되었다.

○ 편집ㅣ홍현진 기자

덧붙이는 글 | 전상봉 시민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칼라밍(www.columning.kr)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태그:#청계천, #청계천복원10년, #이명박, #오세훈, #박경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