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김치 먹어봤니?
벌써 익은 것 같더라."


오랜만에 신랑과 단 둘이 점심을 먹고 있는데 걸려온 전화. 시끄러운 식당을 나와 급히 받으니 수화기 너머로 친정엄마의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토요일 새벽 4시에 한 김장이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 익었다는 것이다. 혹시나 김치냉장고에 늦게 넣은 것이 아닌가 싶어 여쭤보니 아니라고 하신다.

그리고는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같이 김장한 친구 집은 김치 맛이 어떤지 한 번 물어보라며 전화를 끊으셨다. 곰곰 생각해 보니 절인 배추가 문제였던 것 같다. 절인 배추를 구입했는데 아침에 받은 배추를 다음 날 새벽 1시가 되어서야 속을 넣기 시작했으니 배추가 절여지다 못해 살짝 익어서 그런 것 같다. 처음 하는 김장이라 나름대로 신경 썼는데 그렇다니 속상하기만 하다.

결혼 후 내가 제일 못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요리이다. 요리는 전기밥솥이 해주는 밥 말고는 참으로 꺼려지는 종목이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음식이라면 타의 추종을 부러워할 만큼 민감한 신랑을 만났으니 요리하는 것이 더 부담스러웠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둘이 함께 잔치국수를 먹으러 들어갔을 때다. 기다리다 나온 국수를 한 젓가락 떠서 입에 넣었던 신랑은 양미간을 찡그리며 "찬물에 빡빡 문질러 씻지 않고 그냥 대충 헹궈서 내 왔나? 밀가루 냄새가 심하네"라더니 주인을 불러서 한 마디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다 먹지도 않고 식당을 나와 버렸다. 당시에는 좀 심하다는 생각만 하고 그냥 넘어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보통 예민한 것이 아니었다.

'요리치'인 나, 올해 김장은 내 손으로!

절인배추
 절인배추
ⓒ Won-Heelee

관련사진보기


요리를 직접 하지는 않으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꼭꼭 집어내는 신랑. 그래서 결혼 직후에는 온갖 정성을 들여 음식을 만들었지만, 신랑의 입맛을 맞추기는 힘들기만 했다. '음식이란 배만 부르면 되지!'라는 신조로 살아왔던 난 점점 의욕을 잃고 지금은 요리라면 멀찌감치 한 발로 밀어 놓고 살고 있다. 그러니 40대 중반인 지금까지도 김장 같은 것은 엄두도 못 내고 늘 친정에서 얻어다 먹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친정 부모님도 점점 나이가 들고 한해 한해 다르게 약해지시니 이 짓도 죄송스러워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이번 김장은 직접 해보려고" 였다. 이 말에 신랑의 눈은 반사적으로 동그래지고 무엇인가 기대에 찬 어조로 "그래 그래 이번 김장김치는 어느 해보다 맛있겠는데? 당신 정성이 듬뿍 들어갔을 테니 맛있을 것 아니겠어?" 하며 웃는다.

내친김에 백김치도 한 번 시도해 보면 더 좋을 것이란다. 말하는 분위기로 봐서는 놀리는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고 아마도 내게 용기를 주어 이참에 불량주부에서 탈피시키고 싶은가 보다. 어쨌든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친구랑 셋이서 하는 것이니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우리 셋 모두 김장은 처음이고 오직 OO 엄마만이 김장은 아니더라도 김치를 몇 번 담가본 상태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 대신 친정엄마의 걱정이 더 컸다. 며칠 상간으로 전화를 하시며 "배추는 어떻게 하기로 했니?", "고춧가루는 샀니?" 등의 전화가 왔으니 말이다.

우리의 김장은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절인 배추에서 시작되었다. 덕분에 토요일에 하기로 한 김장을 금요일에 서둘러 하게 되었다. 게다가 오후에나 올 줄 알았던 배추가 아침 6시에 도착했으니 문제는 더 심각했다. 이유인즉 나머지 두 친구가 직장맘인지라 퇴근 후에야 김장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배추를 받았을 때는 적절히 절여진 것이 꽤 괜찮은 상태였지만 오후가 되자 짜다 못해 소태가 되어 있었다. 절인 배추는 씻지 말고 해야 한다고 하던데 너무 짜서 결국 배추를 씻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밑에 있던 배추는 물에 헹구었음에도 여전히 짜고 위의 것은 싱거웠다. 게다가 어떤 것은 날아서 밭으로 도망가려 하고 있었으니 어디다 간을 맞춰야 하나? 짠 배추에 맞춰야 하나? 아니면 싱거운 것에 맞춰야 하나?

간을 어디에 맞춰야 하지? 시간은 계속 흐르고

배추 속 넣기에 몰입
 배추 속 넣기에 몰입
ⓒ Emily Barney

관련사진보기


이런저런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 속을 조금 싱겁게 하기로 했다. 양념만 했을 뿐인데 저녁 9시가 훌쩍 넘었다. 친구네 것부터 하고 우리 집 것을 하기로 했는데 그럼 우리 것은 언제 하나? 슬슬 걱정이 앞선다. 다들 얼굴은 벌겋고 아픈 허리 이리저리 뒤틀어 가며 바쁘게 속을 넣었다. 그렇게 60포기를 끝내고 드디어 우리 집 김장을 할 때는 새벽 1시. 이제 얼굴이 하얗다.

다들 말도 줄었다. 지칠 대로 지쳐서 오로지 이 김장을 끝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정신없는데 아이만 신이 났다. 하루 종일 롯데월드에서 놀다 밤 11시에 와서는 지치지도 않는지 옆에서 김장을 거들겠다고 왔다 갔다 하며 친구와 내 입에 먹을 것을 넣어준다. 그날 재미있게 놀았던 것을 신나게 떠들어 대며.

드디어는 보는 것에 만족 못 하고 직접 김장을 하겠다며 앞치마를 꺼내 입고 고무장갑까지 낀다. 그리고 떡 하니 한 자리 차지한 아이. 배춧속 4개 넣고 옷 한 벌에 고춧가루 여기저기 묻히더니 새벽 3시가 되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우리한테는 치러야 할 1년 행사인데 아이에게는 마냥 즐거운 체험인가 보다. 이렇게 모든 것을 끝내고 뒷정리까지 하고 나니 새벽 5시다.

그날 우리 신랑은 뭐 하고 있었을까? 늦어도 11시면 퇴근해서 집에 도착했을 시간인데 아직도 오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해 보니 혀가 꼬부라져 있다.

"아~ 김장한다고 다들 와 있는데 몸도 못 가누고 들어오면 싫은데..."
"어~ 어~ 걱정하지 마. 다 끝나면 전화해 그때 들어갈게."

이건 무슨 분위기? 뭔가 꼭 기다렸다는 듯이 다 끝나면 들어오겠단다. 이번 기회에 편하게 술 마시며 놀다 들어오겠다고 미리부터 계산한 건가? 아침에 전화로는 갑자기 김장을 하게 되어 힘들겠다며 고생한다고 하더니 친구랑 술을 건하게 마시고 있구나! 이럴 때 일찍 와서 도와주면 참 예쁠 텐데.

어쨌든 김장을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또 매년 친정에서 얻어다 먹던 것을 반대로 드리니 뭔가 모르게 자식 노릇 하는 것 같아 뿌듯하기까지 하다. 친정부모님도 처음으로 딸한테 김치를 받아가시는 것이 신기한지 고생했다는 말씀을 몇 번이고 하신다.

김장의 마무리
 김장의 마무리
ⓒ Hidoodoo

관련사진보기


김장 당일 날은 드셔 보시더니 맛있다고도 하셨다. 그 말씀에 아픈 어깨도 허리도 위안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맛에 요리를 하나? 신랑은 고생했다며 일요일에는 아이가 교회 간 사이 둘이서 오랜만에 외식을 하잖다. 식사하는 동안 김장을 한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며 나를 한껏 치켜세워주기까지 한다.

"어제 좀 도와주지 그랬어. 배추가 얼마나 무겁던지 정말 힘들었다고."
"알았어. 미안해. 그런데 당신이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난 일부러 자리 피해 준 건데."
'에이 이제부터 좀 주부다운 주부가 되어볼까 했는데 요렇게 나오면 다시 생각해봐야 겠는데.'

식사 중에 걸려온 친정엄마의 전화에 내가 걱정을 하자 신랑은 "경험이야 경험. 괜찮아 다음에 더 맛있게 하면 되지" 하며 괜찮단다. 이 한마디 말에 전날 술 마시고 외박한 일에 대한 서운함이 사라진다. 진작 이렇게 좀 이렇게 해 주지 그러면 그동안 요리를 멀찌감치 한 발로 구석에 밀어두고 지금처럼 등한시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맛있는 냄새가 풍기면 집이 훈훈해진다'는 말이 있다. 이제는 정말 요리에 취미까지는 아니더라도 신경을 써야겠다. 언제까지 친정에서 얻어다 먹이고 생식 수준에 가까운 반찬으로 식사를 대신할 수 없지 않은가. 나도 이제 불량주부를 탈피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김장, #김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