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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하는 날, 분주히 움직이는 손
 김장하는 날, 분주히 움직이는 손
ⓒ 권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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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김장의 계절이 다가왔다. 남편의 4남매가 모두 모여 김장하는 날은 명절 때 만큼이나 북적이는 날이다. 모두 결혼을 하여 가족을 이루었고, 남편과 결혼한 덕분에 나 역시 그 가족의 일원이 된 지 벌써 햇수로 5년차이다. 그 5년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하자면 한도 끝도 없고 짙었던 기억도 많이 퇴색되었다.

첫 김장은 시집 온 지 얼마 안 되었던 터라 적응하느라 애썼던 게 전부였다. 김장 일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아 일을 잘 할 줄도 몰랐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두 번째 김장 시즌엔 첫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불룩 나온 배를 보자니 안 그래도 바쁜 와중에 심란하기 그지없던 시어른들과 형님들은 내게 찧다 만 마늘을 마저 찧으라고 한 일 외엔 거의 일을 주지 않았다. 세 번째 김장 때엔 태어나 자라고 있던 큰 아이 외에 뱃속에 작은 아이를 임신 중이라 또 일을 못했다. 네 번째 김장 때엔 지금보다 더 아기였던 두 녀석 추워 감기 걸릴까봐 오지 말라고 하셔 신랑 혼자 다녀와 김치만 받아먹었던 기억이다.

아이들도 어느덧 조금 컸고, 올해는 아이들 잘 달래가며 김장 일을 많이 도울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몇 달 전부터 있었다. 약 한 달 전부터 4남매가 모여 김장하는 날을 상의하여 정했다. 우리 가족은 토요일에 근무가 있는 남편의 일정이 끝나면 아이들까지 데리고 쏜살같이 가려고 했다. 그런데 토요일 아침 일찍 시골 시댁에서 전화가 왔다.

"니들 언제 올 거니?"

시아버지 전화였다.

"저희 신랑 근무 끝나면 바로 가려고 했는데, 왜요?"
"니들 그냥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식전에 와."

시어머니가 곁에서 뭐라고 거드시는 듯 하더니 이내 전화를 바꾸신다.

"야 니들 그냥 일요일에 애들 깨자마자 밥 먹지 말고 차에 태워서 와라. 지금 큰 애들까지 다 와서 애기들 잘 데도 없고, 불편하다잉. 아침에 집에 와서 밥 먹어."
"전날에 가서 일 해야 하지 않아요?"

"뭔 일을 혀. 전날 와서 할 거 없고 그냥 아침에 와."

장성한 시조카들이 김장 일을 도우러 많이 내려와서 집이 좁기도 했고, 우리 애들이 불편할까봐 배려해 주신 것이다. 올해는 그동안 쌓여있던 부채의식을 덜고자 열심히 일하려고 했지만 물 건너 간 셈이다.

일요일 아침 일찍 도착한 시골은 이미 모인 식구들 전부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가 가져온 김치 통 5개를 밖의 수돗가에서 씻어 닦고 있으니 시어머니께서 한 통을 더 얹어 주셨다. 다른 가족들 통엔 이미 꾹꾹 눌러 담은 김장 김치가 가득했고, 우리 몫은 남은 양념들로 김치 속을 넣어 가져온 통에 담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작은 시누이의 도움으로 6개의 통엔 금방 맛있는 김치가 가득 찼다.

고단한 부모의 삶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일찍부터 우리에게 챙겨줄 음식들, 식재료들을 챙기시는
시어머니.

"어머니, 저희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이따가 제가 가기 전에 잘 챙길게요. 좀 쉬세요."
"가만 있어봐. 니들 또 이것저것 다 빼먹고 그냥 갈까봐 그런다."

한참을 부산스레 움직이던 시어머니께서 잠깐 쉬고 계시는데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아줌니, 계셔?"

또 벌떡 일어나 나가시는 시어머니 뒤를 따라 가니 동네 아주머니들이 와 계셨다. 밭에 남아있던 배추와 무를 잔뜩 뽑고, 남은 김치 양념까지 챙겨주시는 시어머니. 따스한 정 때문에 시골 살이 한다는 어떤 이의 말처럼 그런 광경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 어머님은 언제부터 그렇게 다른 사람 챙기는 것에 익숙해지신 걸까? 처음부터 익숙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다보니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된 것이다. 세월의 깊이는 마음씀씀이에서도 드러난다.

자식들만이 대상이 아니라 동네에서도 다른 사람들 배려하고 챙기기에 유명한 시어머니의 건강은 그리 좋지 못하다. 연로하신 시아버지께서도 김장 때문에 신경 쓰셔서 더 힘드셨는지 심한 감기에 앓아 누우셨다. 허리는 점점 안 좋아지셔서 이젠 걷는 것도 버거워하신다. 그런 상황에서 아직도 자식들 위해 밭에서 일하시고 수확물 거두는 일을 놓지 못하고 계시다.

"네 아버지가 엊그제 밤에 그러더라.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아파서 고생하냐고."

시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그저 묵묵히 김치 속 넣는 일만 계속 했고, 작은 시누이는 한숨 쉬며 힘없이 말했다.

"엄마 아빠가 무슨 죄를 지어. 평생 자식들 거둬 먹인 죄 밖에 없지."

그 말에 먹먹해진 가슴은 지금도 저릿하다. 농사꾼의 삶은 쉽게 펴지지 않는 살림에 몇 배는 더 고단했을 것이며 부모로 사는 삶은 자식들만 바라보다가 허리가 꺾였다. 뒤늦게 생의 후반부를 함께하는 막내며느리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자주 찾아뵈어 어린 손자 손녀 얼굴 보여드리는 것 밖에 없다.

김장하는 날인데 이번에도 김치뿐만 아니라 쌀이며 고기며 잔뜩 차에 싣고 돌아왔다.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 차 떠나기 직전까지 집안 곳곳을 누비시던 시어머니, 가는 손자 손녀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 아이들 앉아있는 자리의 차창 밖에서 서성이시던 시아버지.

두 분들 손길이 들어간 재료들로 정성껏 담긴 김치가 올해도 우리 집 김치냉장고에 꽉 찼다. 두 분께 세월이 조금이라도 비껴갔으면 하는 바람이 너무 헛된 바람이라도 바라고 싶다. 춥디 추운 김장의 계절은 어김없이 또 왔지만 마음만은 따스하다.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 http://blog.naver.com/rnjstnswl3 중복게재



태그:#김장, #김장하는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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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문화, 다양한 사회현상에 관해 공부하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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