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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침마다 글똥누기를 쓴다.
 나도 아침마다 글똥누기를 쓴다.
ⓒ 고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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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침에 학교에 도착하면 매일 아이들의 짧은 '글'을 읽는다. 아이들과 내가 처음 만났던 3월 2일 다음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해오는 일이다. 글에는 어떠한 정해진 주제도 규칙도 없다. 맞춤법 검사도 글씨 타박도 없다. 그냥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써서 나에게 보여주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이렇게 내가 아침마다 아이들의 글을 읽게 된 것은 지난 겨울에 있었던, 신규교사 연수 덕분이었다. 나는 그 연수에서 이영근 선생님을 만났다. 짧은 강의 시간이었지만 선생님에게서 아이들을 위한 사랑과 노력을 읽어내기에 충분했다. 선생님은 초보 선생님들을 위한 많은 노하우를 선물하셨다.

선물 중에 나는 '글똥누기'에 마음이 갔다. 똥을 누는 것처럼 매일 배변하듯 글을 쓰자는 의미에서 '글똥누기'란다. 왠지 이름도 아주 마음에 든다. 쉬는 시간, 이영근 선생님께서 직접 아이들과 했다는 글똥누기 수첩을 열어볼 수 있었다. 솔직한 마음이 담긴 글들이 가득했다. 나는 우리 반 아이들과 따뜻하고 솔직한 마음을 공유하는 행복한 상상에 빠졌다.

글똥누기의 시작, 괜히 짜증만 났다

연수를 마치고 3월, 신학기를 시작하며 아이들에게 각자의 이름이 적힌 글똥누기 수첩을 나누어주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한 달 뒤, 나는 글똥누기를 그만두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의 행복한 상상은 이미 깨진 지 오래였다. 아이들의 글에는 진심이 없었고 귀찮음만이 가득했다. 아침마다 들려오는 "선생님 뭐 써요?", "선생님, 쓸 말이 없는데요" 등은 행복은 무슨, 아침부터 괜히 짜증만 불러일으켰다.

[정미의 3,4월 글똥누기]

3월 27일 – 학급의회한다.
4월 06일 – 월요일인가? 벌써?
4월 15일 – 재연이가 준 액체괴물 좋음.
4월 17일 – 영어 1교시, 싫다.
4월 20일 – 월요일이다. 피자가 먹고 싶다.
4월 21일 – 화요일이다. 쓸게 없다.
4월 29일 – 비온다. 싫다.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단답식의 글똥누기. 분량이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나마도 쓰면 다행이다. 정미뿐만이 아니다. 몇몇을 뺀 나머지 친구들은 모두 '마지못해' 글을 쓰고 있었다.

왜 일까? 글을 쓰는 일은 아이들에게 참 어색하고도 어려운 일인 것 같았다. 나와 아이들 사이에 놓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했다. 아이들이 왜 아침마다 글을 써야하는지부터 나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했다. 글똥누기를 호기롭게 시작하긴 했지만, 정작 한 번도 왜 이 활동을 해야 하는지 되물은 적은 없었다.

나는 글똥누기가 '대화'의 매개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짧은 하루 동안 26명 모든 아이들과 대화를 하기는 매우 어렵다. 어쩌면, 나와 대화 한 번 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가는 친구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대화는 아이들과 나 사이의 관계를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일인데, 일일이 신경을 쓰기가 참 어렵다.

그런데, 글똥누기가 있다면 어려웠던 대화가 쉬워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똥누기는 대화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글똥누기로 아침마다 억지로라도 아이들과 짧지만 강력한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부터 아이들의 글똥누기에 괜히 질문도 던져보고 눈을 마주치며 웃음도 지어보이고 장난도 걸었다. 글똥누기가 그냥 일상적인 '대화'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의 글에서 벽이 하나둘 무너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정미의 11월 글똥누기]

11월 6일 – 오늘 학교 오다가 갑자기 1교시 영어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엄청나게 무거워졌다. 그리고 학급의회라는 생각에 다시 가벼워졌지만 1교시가 영어라는 생각을 하니 다시 무거워졌다.
11월 11일 – 어제 했던 '책 읽어주는 선생님' 오늘도 했으면 좋겠다. 어제 코끼리는 진짜 재밌었다.
11월 16일 – 오늘 아침에 여유롭게 일어나서 씻고 다 챙겨서 TV를 보면서 소시지를 먹고 있는데 뭔가 잊은 것 같다 했는데 교외봉사다. 소시지를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고 뛰었다. 학교 왔는데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
11월 19일 – 어제는 좀 많이 다치는 하루였다. 방에 들어갔는데, 핸드폰을 가지러 들어가다가 연결이 되어있는 핸드폰 줄에 넘어져서 침대 모서리에 박혀 넘어졌다. 아푸다.

자유롭게 글을 쓰라는데 대체 무얼 쓰라는 걸까? 선생님을 흉보는 말을 써도 되는 건가? 아이들은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사실, 아이들은 '글짓기'에 익숙해 있다. 주제가 있거나 목적이 있는 글짓기 말이다. 하지만, 글똥누기는 글짓기 대신 '글쓰기'가 필요하다. 아이들 자신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냥 자신의 말로 쓰는 것 말이다.

아이들과 대화로 이어진 글똥누기

내가 아이들의 글똥누기에 하나하나 반응을 했던 게 아이들 스스로 글똥누기의 의미를 찾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글똥누기는 나와 아이들 간의 대화 그 자체다. 어떻게 말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그냥 늘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선생님과도 부담 없이 소소하게 그렇게 글로 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대화로서 글똥누기가 작용되면서부터 아이들의 글은 글짓기가 아닌 글쓰기가 되기 시작했다.

11월 정미의 글똥누기가 물론, 특별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 안에는 진심이 담겨 있고 솔직함이 묻어 있다. 4월의 정미는 '영어 1교시, 싫다'라고만 툭하고 이야기했지만, 11월의 정미는 1교시가 영어인 오늘 학교로 오는 길이 얼마나 무거웠는지를 조잘조잘 이야기하고 있다.

'어제 (혼났던) 일이 아직도 기억난다. 지금은 바꾸기 힘들겠지만 점점 노력해 바꾸고 싶다.'
'오늘 학급의회가 있다. 반에 있는 정책들이 군더더기 없이 더 깔끔하게 되면 좋겠다.'
'우리 반 인권프로젝트 광고지도 학교에 돌렸다. 오늘 많은 사람이 보면 좋겠다. 광고지 붙인 사람이 정말 고생한 것 같다.'
'오늘은 빼빼로 데이, 농업인의 날, 그리고 대망의 인권프로젝트의 날이다.'
'월요일부터 정유랑 유주가 이상했다. 왜냐하면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는데 정유는 나를 보고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유주도 나를 째려보면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왠지 내 친구들이 사라진 것 같았다. 한 명도 빠짐없이. 그래서 너무 속상하다.'
'오늘 공기를 하다가 소형이와 살짝 다투었다. 마음 같아서는 화해를 하고 싶다.'
'오늘은 김철민과 15일이나 갔다(사귀었다). 그런데 카톡으로 대화하면 말을 전달하기가 편한데 직접 만나면 아무 말도 못한다. 어색하다.'
'아빠가 어제 중학교에 대해서 나에게 말했다. 아빠가 대안 중학교를 가라고 했다. 그리고 아빠는 나에게 예체능 쪽이 어떻냐고 물어봤다. 난 지금부터 체육 쪽에 재능을 기르고 싶다. 난 축구가 좋다. 하지만, 아빠가 자꾸 예술 아니면 음악을 하라고 한다.'
'이건 선생님한테만 알려주는 비밀이다. 어제 내가 이민정한테 문병을 갔다. 내가 꽃다발을 들고 갔는데 진짜 멀쩡한 것 같다. 어디 그냥 휙휙 돌아다녀서 찾기도 힘들었다.'
'꿈에서 수요일이 6교시로 쉬는 시간이 없는 끔찍한 꿈을 꿨다. 엄청 끔찍했다. 심지어 컴퓨터와 체육도 없이 국, 수, 사, 과, 영, 한자로 시험만 봤다.'
'드디어 오늘 모든 예고편을 보고 진짜 영화를 일주일 내내 보고 싶던 영화 '픽셀'을 보러 간다. 내용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만 터미네이터보다 더 보고 싶다. 빨리 저녁이 됐으면 좋겠다.'
'어제부터 김민준이랑 욕 안 쓰기로 했는데, 난 한 번도 안 썼다. 김민준은 수학학원에서 쓸 뻔 했다.'
'선생님 왜 오늘 체육 안 해요? 체육 하면 안 돼요?'
'오늘 교외봉사를 했다. 선생님이 안와서 다행이다. 같이 가는 건 좋은데 잔소리가 많다. 그래도 선생님이 싫진 않다.'

우리 반에서 이제 '선생님 뭐 써요?', '선생님, 쓸 말이 없는데요'는 들리지 않는다. 아이들의 살아있는 이야기가 글에 담겨있을 뿐이다. 글똥누기를 통한 아이들과의 대화에는 어떤 장애물도 없다. 가끔은, 심장을 쿵하게 만드는 무게가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참 가벼운 이야기일 때도 있다.

나를 흉보는 내용이 있기도 하고 투정을 부리는 내용이 있기도 하다. 밤새 꾼 꿈 얘기를 잔뜩 늘어놓는 친구도 있고, 속상했던 일을 툴툴 털어놓는 친구도 있다. 또, 자기 남자친구, 여자친구와의 핑크빛 이야기를 전하는 친구도 있다.

가끔 후배 교사를 만나게 되면, (나도 엄연히 2년차라 이제 후배교사가 있긴 있다) 글똥누기를 꼭 하라고 전한다. 매일 아침 아이들과의 대화가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참 잘 선택했다고 우리를 다독여주기 때문이다.

우리 반 방울의 따뜻한 글똥누기
 우리 반 방울의 따뜻한 글똥누기
ⓒ 고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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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최은경 기자

덧붙이는 글 | 2015년 3월 2일부터 시작된 신규교사의 생존기를 그리는 이야기입니다.



태그:#초등학교,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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