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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에서 사는 사람들이 저마다 이녁 마음을 노래로 채울 수 있다면 이 별은 어떻게 달라질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마음 가득 흐르는 노래를 기쁘게 부르는 사람이 가득하다면 이 지구라는 별은 어떠한 모습이 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버스를 모는 일꾼도, 빗자루를 쥔 일꾼도, 기계를 다루는 일꾼도, 씨앗을 뿌리는 일꾼도,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도, 부엌에서 밥을 짓는 아버지도, 청와대에서 수첩을 쥔 일꾼도, 저마다 언제 어디에서나 노래를 부르는 삶이라면 이 나라는 어떻게 거듭날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노래를 부르지 않기에 서로 다툽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서로 다투지 않거든요. 웃지 않기에 서로 싸웁니다. 어깨동무를 하면서 웃는 사람은 서로 싸우지 않아요. 기쁘게 사랑하며 서로 아끼는 마음이 되지 않으니 전쟁이 터질 뿐 아니라, 전쟁무기와 군대가 자꾸 커져요. 서로 아끼는 마음이라면, 서로 사랑하려는 숨결이라면, 남북녘뿐 아니라 지구라는 별에서 전쟁이란 가뭇없이 사라지리라 느낍니다.

욕사가 조국의 광복이나 민족의 해방만을 염두에 두었다면 '천고'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은 압박하는 사람도 압박받는 사람도 없는 세상에서 저마다 인격이 완성된 인간들이 제 자유를 '목 놓아' 구가하는 인류 전체의 미래를 생각했다. (22쪽)

몇 년 전에는 문인들의 육필전이 열린다고 해서 가 보았는데, 마치 '글씨를 못 쓰게 된 우리 역사 전시회'를 보는 것 같았다. 작고한 작가들은 글씨를 잘 썼고 생존 작가들은 서툴렀다. (26쪽)

겉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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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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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님이 쓴 <우물에서 하늘 보기>(삼인,2015)를 읽습니다. 황현산님은 한국일보라는 신문에 '시를 노래하는 이야기'를 꾸준히 실었다 하고, 이 글을 차곡차곡 그러모아서 책 한 권으로 여미었다고 합니다.

책 한 권으로 여민 '시를 노래하는 이야기'는 짧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일간신문에서 '시를 노래하는 이야기'에 퍽 큰 자리를 내준 셈인데, 이렇게 신문이 '시를 노래할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다면 신문에 싣는 기사가 찬찬히 달라질 만하리라 느낍니다.

신문이나 방송이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싣고, '삶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실으며, '삶을 꿈꾸는 이야기'를 싣는 자리로 거듭날 수 있으면, 신문을 읽고 방송을 보는 사람들 마음도 함께 거듭날 만하리라 느껴요.

공부를 많이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글을 잘 써야 하지만 글을 잘 쓴다고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문학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야 하지만 지식의 풍부함이 한 사람을 작가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37쪽)

우리는 또다시 아이들을 줄 세우고, 결국 따지고 보면 너는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뜻으로 요약될 말로 훈계를 할 것이다. 우리는 또다시 '예능'을 찾아 채널을 돌리며 우리가 잘 살고 있다고 흐뭇해 할 것이다. 천년 숲이 불도저에 형체도 없이 무너져도 다른 숲이 아직 많다고 말할 것이며. (101쪽)

얼마 앞서까지 사람들은 편지를 쓸 적에는 누구나 손으로 썼습니다. 깨끗한 종이를 마련해서 또박또박 알뜰히 편지를 썼어요. 오늘날에는 거의 모두 글판을 두들기면서 편지를 씁니다. 오늘날에 사람들이 주고받는 편지는 모두 똑같은 글씨이거나 글꼴입니다. 기계를 다루어 기계에 뜨는 글씨이거나 글꼴이니까요. 줄거리는 다 다른 편지이기는 하되, 줄거리를 엮는 손길이 좀처럼 드러날 수 없는 편지만 흐릅니다.

어쩌면 오늘날은 구태여 손으로 글씨를 써야 할 까닭이 없을 수 있습니다. 지난날에 아이들이 글을 익힐 적에 으레 깍뚜기공책에 하나하나 천천히 또박또박 쓰면서 익혔는데, 이제는 태플릿 같은 것을 콕콕 누르기만 해도 글씨가 뜨니 애써 글씨를 안 배워도 될는지 모릅니다.

손으로 밥을 짓지 않는 사회가 되고, 손으로 살림을 가꾸지 않는 사회가 되며, 손으로 따스한 숨결을 나누지 않는 사회가 됩니다. 손길이 사라지고, 손놀림이 잊힙니다. 손수 움직이지 않으며, 손짓과 몸짓으로 살가이 어우러지는 노래가 사그라듭니다.

나는 <공무도하가>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내 동무들이 어린 시절 냇가에서 잠자리를 잡으며 부르던 노래가 떠오른다. (117쪽)

예술가의 일은 농부들의 세계에 선원들의 세계를 끌어들이는 것과 같다. (128쪽)

지금 광화문 광장에는 단식하는 사람들과 폭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161쪽)

<우물에서 하늘 보기>를 읽다 보면 오늘날 사회를 안타까이 여기는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참말 그렇지요. 그냥 생각없이 텔레비전을 켜고, 그냥 생각없이 숲을 밀며, 그냥 생각없이 재개발을 밀어붙입니다. 그냥 생각없이 바보스러운 정책이 나오고, 그냥 생각없이 공권력이 춤춥니다.

청와대에 계신 분이 수첩에 시를 적어서 시골마을로 찾아가서 시골 할매랑 할배하고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요. 4대강사업을 밀어붙인 분이 삽차가 아닌 자전거를 타고 서울에서 해남까지 천천히 달리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별을 바라보며 들길을 바라볼 수 있다면, 이러면서 스스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우리 삶터는 어떤 모습이 될까요.

<우물에서 하늘 보기>를 쓴 황현산님은 신동엽 시집을 다루지는 않습니다만, 신동엽님이 쓴 시가 문득 떠오릅니다. 신동엽님은 저기 스칸디나비아 반도 어디쯤에 있다는 대통령 이야기를 시로 쓴 적이 있어요.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꽂고서 시인을 찾아가는 그 나라 대통령 이야기를 시로 쓴 적이 있지요. 그러니까, 이 나라 대한민국 대통령이 경호원과 자가용을 버리고 자전거를 타거나 두 다리로 몸소 걸어서 시골자락에서 조용히 흙을 일구는 시인을 찾아가서 함께 막걸리를 나누기를 바라는 마음이 골골샅샅 퍼질 수 있으면, 대통령뿐 아니라 수수한 이웃들 누구나 수수한 사랑으로 삶을 지을 수 있으면, 이 나라는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될까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시의 기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신기한 시집이다. 한용운은 근대사에 관해서 특별히 또는 오랫동안 공부하지 않았지만, 그의 시집은 개항 이후 한 세기의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뜻깊은 성과다. (165쪽)

이 시를 읽으며 시인을 순진하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오히려 어떤 폭압도, 어떤 잔혹한 고문도 그의 시를 깨뜨리지 못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박정만은 그렇게 투쟁했다. 희망은 늘 그렇게 순진하게 밑바닥에 깔려 있다. (183쪽)

나는 작은 종이에 짤막하게 노래를 쓰고, 우리 집 글순이는 깍두기공책에 알록달록 빛깔을 입히면서 글놀이를 합니다. 한글 익히기를 노래 부르기처럼 함께 누립니다.
 나는 작은 종이에 짤막하게 노래를 쓰고, 우리 집 글순이는 깍두기공책에 알록달록 빛깔을 입히면서 글놀이를 합니다. 한글 익히기를 노래 부르기처럼 함께 누립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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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시인이 쓰지 않습니다. 아니, 시인만 시를 쓰지 않습니다. 어쩌면, 시인은 시만 쓸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먼먼 옛날부터 이 나라 누구나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스라한 지난날에는 이 나라 누구나 언제 어디에서나 시를 짓고 노래를 지었어요. 방아를 찧으며 노래를 불렀고, 기저귀를 빨면서 노래를 불렀으며, 낫질 호미질 괭이질을 하며 노래를 불렀어요.

두레나 품앗이가 아니어도 혼자서 즐거이 노래를 부른 이 나라 사람들 수수한 삶입니다. 나무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지게를 짊어지며 노래를 불렀지요. 밥을 지으며 노래를 불렀고, 밥을 먹으며 노래를 불렀어요. 한겨레 삶은 언제나 노래로 흐르는 삶입니다. 하늘과 흙과 바람과 비와 구름과 숲과 꽃을 노래하는 수수하면서 사랑스러운 삶이 흐르던 이 땅입니다.

그런데 시를 잊으며 삶을 잊어요. 노래를 잃으면서 사랑을 잃어요. 시랑 노래를 뒤로 젖히면서 경제개발이나 경제성장만 바라보면서 그만 꿈이나 사랑을 송두리째 까먹습니다.

(최승자는) 대학 중퇴 학력으로 인문학 대가들의 글에 붉은 볼펜을 휘둘러 자주 말썽을 일으키다가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한두 해 사이를 두고 같은 시기에 등단하여 훗날 저마다 한국 시단에 봉우리를 하나씩 이루게 되는 김정환, 이성복, 최승호, 김혜순, 황지우 사이에서 최승자는 자기 내장을 다 드러내는 사람의 선연한 말을 비수처럼 내던져, 한 번 귀 기울인 사람이라면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목소리를 만들었다. (187쪽)

문학과 시가 헛된 것이 아니니, 약속은 아마 지켜질 것이다. 낡은 시간이 가고 맑고도 풍요로운 시간이 올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시인들이 기대했던 모습으로 찾아올까? (258쪽)

아이들이 대학교를 바라보며 시험공부에 목을 매지 않을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빕니다. 아이들이 대학교를 가든 안 가든 즐겁게 스스로 시를 짓고 노래를 지어서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빕니다. 꿈을 찾아서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헤아리며 시를 읊는 나라가 되기를 빕니다.

우물가에서 하늘을 봅니다. 샘가에서 별을 봅니다. 냇가에서 구름을 봅니다. 바닷가에서 무지개를 봅니다. 못가에서 미리내를 봅니다. 물가에서 꽃잎을 봅니다. 시냇가에서 흐드러진 숲을 봅니다. 그리고, 밥상맡에서 따스한 웃음을 보고, 책상맡에서 즐거운 노래를 봅니다. 마당 한쪽에 나무를 심고, 텃밭 귀퉁이에 꽃씨를 심습니다.

우리 마음을 노래로 채울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 내 마음부터 노래로 채우면서 활짝 웃는 삶이 되기를 빕니다. 이 별에, 이 지구라는 별에, 꿈결 같은 노래가 흐르고 사랑결 같은 이야기가 시 한 줄로 흐를 수 있기를 빕니다.

덧붙이는 글 | <우물에서 하늘 보기>(황현산 글 / 삼인 펴냄 / 2015.11.16. / 13000원)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우물에서 하늘 보기 - 황현산의 시 이야기

황현산 지음, 삼인(2015)


태그:#우물에서 하늘 보기, #황현산, #문학평론, #문학읽기,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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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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