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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로모우츠에서 만난 문화유산들

올로모우츠 가는 길
 올로모우츠 가는 길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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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30분쯤 오시비엥침을 떠난 우리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로 향한다. 중간에 올로모우츠(Olomouc)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6시는 되어야 프라하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4차선 고속도로가 잘 나 있어 버스가 적당한 속도를 냄에도 불구하고 거리가 워낙 멀어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버스는 먼저 오스트라바(Ostrava)를 거쳐 올로모우츠까지 가고, 그 다음 브르노(Brno)를 지나 프라하에 이르게 된다.

오스트라바 남쪽 노쇼비체(Nošovice)에는 현대자동차 체코공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연간 33만대의 현대차가 생산되고 있다. 버스는 1시 20분쯤 올로모우츠시에 도착한다. 올로모우츠는 11세기 중반 주교좌 성당이 들어서면서 역사 속에 이름을 올린다. 그리고 11세기 말 성과 수도원이 생겼고, 1248년 모라비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16세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궁전이 지어짐으로써 현재와 같은 도시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올로모우츠 역사박물관
 올로모우츠 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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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로모우츠는 종교개혁을 주장했던 후스 전쟁(1419-1436) 때 로마가톨릭 편에 서서 싸웠고, 그 후 예수회 교단이 들어와 학교를 세우는 등 보수적인 입장에 섰다. 그 때문에 30년 전쟁 때 스웨덴군에 점령되어 도시가 많이 파괴되었다. 그 후 모라비아 지역의 수도가 브르노로 옮겨갔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패권전쟁인 슐레지엔 전쟁(1740-45)을 통해 도시가 더욱 파괴되었다. 1794–1797년에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는 등 내내 전쟁에 시달리게 되었다.

우리는 공화국 광장 근처에 있는 포코바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나는 점심보다 시내의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아 밥을 먹고 바로 공화국 광장으로 나간다. 그곳에는 올로모우츠 예술박물관(Muzeum umění)과 역사박물관(Vlastivědné muzeum)이 있다. 예술박물관은 2013년 4월에 문을 연 현대예술 전용박물관이다. 역사박물관은 1883년 모라비아 지방 최초로 개관했으며, 인류학과 고고학 관련 역사뿐 아니라 자연사 유물도 보존 전시하고 있다.

트리톤 분수
 트리톤 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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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역사박물관 앞 광장에는 트리톤 분수가 있다. 1709년 렌더(Wenzel Render)가 만든 바로크 양식 분수다. 이 분수에는 바다의 신 트리톤이 분수를 등에 지고 있다. 나는 이제 데니소바 거리를 지나 호르니 광장 쪽을 쳐다본다. 그러나 길이 꺾여 그곳까지 보이질 않는다. 단지 데니소바 거리를 따라 바로크 양식의 마리아 교회가 눈에 띈다.

사실 올로모우츠에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삼위일체 석주(Sloup Nejsvětější Trojice)를 보아야 한다. 이 석주는 1716년 페스트 퇴치를 기념해서 만들어졌다. 높이가 35m나 되는 기념물로 꼭대기 부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상이 있다. 그것은 호르니 광장에서 시청과 함께 가장 유명한 볼거리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올로모우츠를 떠난다.

프라하는 어떤 도시인가?

프라하 중앙역
 프라하 중앙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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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버스에서 좀 쉬면서 간다. 사실 브르노와 프라하의 중간쯤에 내가 좋아하는 음악가 말러(Gustav Mahler)의 고향 칼리쉬테(Kaliště)가 있다. 이곳을 눈여겨보고 싶었는데, 잠결에 그냥 지나친 것 같다. 버스는 오후 5시 50분에 프라하 중앙역 앞을 지나간다. 기차역이 대단히 크다. 그것은 프라하가 중부유럽 교통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북쪽으로는 드레스덴과 베를린, 서쪽으로는 플젠과 뉘른베르크, 남쪽으로는 빈, 동쪽으로는 크라쿠프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프라하는 역사적으로 보헤미아의 중심도시다. 6세기경 슬라브족이 이곳에 도시를 형성해 살기 시작했고, 그 후 9세기부터 게르만족과 유대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230년에는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14세기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를 통해 지배계급이 슬라브족에서 게르만족으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부터 프라하는 중부유럽의 정치 문화중심지가 되었다.

백탑의 도시 황금의 도시 프라하
 백탑의 도시 황금의 도시 프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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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는 고딕 양식과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많다. 그리고 해가 넘어갈 때 햇살이 이들 건물의 탑과 지붕에 비쳐 황금빛을 띤다. 그래서 황금의 도시라 불린다. 카렐 4세(1316-1378) 황제가 성곽의 탑을 황금색으로 칠하게 해서 황금의 도시라는 명칭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16세기 말 루돌프 2세(1552-1612) 때 바로크 양식의 궁전과 교회가 지어졌고, 연금술사들이 모여들어 황금의 도시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프라하는 다른 도시에 비해 탑이 많아 백탑의 도시(Stadt der hundert Türme)라 불린다. 그리고 그 탑이 석양에 황금빛으로 빛나 황금의 도시가 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 백탑의 황금도시가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은 신구교간 패권 전쟁인 30년 전쟁 때다. 1611년 신교가 다수였던 보헤미아 왕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티아스(Matthias, 체코어 Matyáš II)가 취임하면서 신구교간 갈등이 시작되었다.

프라하성
 프라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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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2세 때인 1609년 보헤미아는 종교의 자유를 얻어 신교가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티아스가 1612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면서 공개적으로 로마가톨릭 지지정책을 폈다. 1617년에는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되어, 로마가톨릭으로의 복귀정책을 강행하고, 신교 대표들의 권한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 보헤미아의 신교 대표들이 1618년 5월 23일 프라하성에 모여 황제의 사신 3명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봉기를 일으켜 왕권에 저항했다. 이것이 로마가톨릭 진영과 프로테스탄트 진영 간의 30년 전쟁으로 발전해갔다. 1619년 8월 페르디난트가 신성로마황제로 선출되면서 상황은 보헤미아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체코 다리를 건너는 시티투어 에코버스
 체코 다리를 건너는 시티투어 에코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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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1년 그들 신교 대표들은 체포되어 죽음을 맞이하고, 1627년 합스부르크 왕가는 칙령을 발표 로마가톨릭교를 유일한 종교로 선포했다. 그리고 체코어와 함께 독일어를 공식적인 언어로 채택했다. 그때부터 보헤미아의 독일화는 가속화되었다. 30년 전쟁이 끝난 것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서다. 이 조약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블타바강을 따라가며 만나는 역사와 문화

우리는 이제 블타바강에 놓인 마네스 다리 북쪽 주차장에서 버스를 내린다. 현지 가이드가 나와 기다린다. 그녀는 블타바강 동쪽의 구시가지로 우릴 안내한다. 체코 다리를 건너면서 보니 유람선이 많이 떠다니고 있다. 다리로는 시티투어 에코버스가 달린다. 다리에서는 또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왕궁과 성채가 잘 보인다. 우리는 밤에 그곳으로 올라가볼 예정이다.

루돌피눔
 루돌피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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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구시가지에서 처음 눈에 띄는 건물은 바로크 양식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지도를 보니 정부 청사인 산업통상부 건물이다. 다리를 건너 똑바로 가면 유대인 거주지역을 지나 구시가지 광장에 이르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강변을 따라 카렐교 동쪽 탑까지 걸어갈 것이다. 가는 길에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루돌피눔(Rudolfinum)을 만난다.

루돌피눔이라는 건물 명칭은 당시 왕세자인 루돌프 대공의 이름에서 따왔다. 이 건물은 1881년 문화회관으로 지어졌고, 1884년 연주회장(Concert Hall)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드보르작 홀이 되었으며, 그 후 이곳에서 많은 연주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 건물에는 현재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상주하고 있다. 평상시 이 건물에서는 전시회가 열리기도 한다.

드보르작 동상
 드보르작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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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앞으로는 야나 팔라하(Jana Palacha) 광장이 있다. 이곳에 드보르작(Antonín Dvořák: 1841-1904)의 동상이 서 있다. 드보르작은 스메타나(Bedřich Smetana)와 함께 체코를 대표하는 음악가다. 그는 교향곡을 9개나 작곡했고, 오페라를 10개나 작곡했다. 교향곡으로는 9번 <신세계로부터(1893)>, 오페라로는 <루살카(1900)>, 피아노곡으로는 <슬라브 춤곡>이 유명하다.

이제 우리는 마네스 다리 쪽으로 향한다. 다리 근방에는 마네스(Josef Mánes: 1820-1871)) 동상이 있다. 마네스는 낭만주의 대표 화가다. 프라하 미술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을 여행한 유명한 화가다. 그의 그림은 민족적인 색채가 상당히 강하며, 풍경, 초상, 역사, 민속 등 다방면의 그림을 그렸다. 프라하 사람들은 그의 업적을 기려 구시가지와 왕궁을 연결하는 다리에 그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카렐 4세 동상
 카렐 4세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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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네포묵(Nepomuk) 선착장을 지나 칼로바(Karlova) 거리로 간다. 프라하 사람들은 마네스 다리와 카렐 다리 사이에 네포묵 선착장을 만들고 유람선을 운행한다. 그들은 이곳을 프라하의 베네치아라고 부른다. 역시 강에는 유람선이 떠다녀야 관광하는 맛이 난다. 그래서 도시마다 강이나 운하 크루즈가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프라하에서 우리는 크루즈를 타지 않는다.

칼로바 거리는 카렐 다리와 구시가지 광장을 연결하는 도로다. 카렐 다리 바로 앞에는 작은 광장이 있는데, 그곳에 카렐 4세의 동상이 있다. 카렐 4세를 기념해서 카렐 다리라는 이름이 공식화된 것은 1870년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프라하 다리 또는 석교(石橋, Kamenný most)라 불렸다. 카렐 4세는 체코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다.

카렐 다리
 카렐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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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프라하를 수도로 정하고 왕궁을 신축 또는 증축했다. 카렐 다리를 건설했고, 성 비트 성당을 짓게 했다. 그에 의해 프라하는 황금의 도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 1348년에는 중부유럽 최초의 대학이 프라하에 세워졌고, 대학 이름도 카렐 대학(Univerzita Karlova)으로 불리게 되었다. 신성로마황제였던 그가 지배한 땅은 오스트리아, 독일, 보헤미아, 헝가리, 폴란드, 룩셈부르크 등에 이르렀다. 그는 1378년 프라하 성에서 죽었고, 성 비트 성당에 묻혔다. 

카렐 다리 한 가운데 서 있는 얀 네포묵 동상 

우리는 이제 카렐 다리를 건넌다. 다리 양쪽에는 두 개의 탑이 있다. 구시가지 쪽 탑이 구시가지 다리탑이고, 말라 스트라나(Malá strana) 쪽 탑이 말라 스트라나 탑이다. 구시가지 다리탑은 고딕 양식이고, 말라 스트라나 탑은 로마네스크 양식에 르네상스 양식이 가미되었다. 이 다리에는 관광객, 연주자, 화가 등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이 다리를 건너며 양쪽에 세워진 성인상들을 살펴본다.

얀 네포묵 동상
 얀 네포묵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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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리에 성인상이 세워진 것은 1683년이다. 보헤미아의 대표적인 조각가 브로코프(Jan Brokov)가 얀 네포묵(Jan Nepomucký)의 나무 조각상을 만들고, 빈의 주물업자 라우흐뮐러(Matthias Rauchmüller)가 청동 조소상을 만들어 세운 것이 처음이다. 얀 네포묵은 1393년 황제인 바츨라프 4세에 의해 카렐교 아래로 던져져 죽음을 당했다.

1389년 프라하 대교구의 대주교 대리가 된 네포묵이 교회에 대한 정부정책 때문에 황제인 바츨라프 4세와 갈등을 겪었고, 교회 탄압에 저항하다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450년 발행된 <황제연대기(Liber Augustalis)>를 통해 네포묵의 순교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 후 황후의 고해신부였던 네포묵이 고해성사 내용을 알려달라는 바츨라프 황제의 요청을 거절해 순교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변형되었다.

카렐 다리에서 바라 본 왕궁과 성 비트 성당
 카렐 다리에서 바라 본 왕궁과 성 비트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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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종교개혁 운동이 보헤미아 지역에 확산되자, 이를 막기 위해 16세기부터 네포묵에 대한 선양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이 17세기에 절정에 달해 왕궁에 네포묵 경당이 만들어지고, 1670년대 성인 추대운동이 시작되었다. 1719년 성 비트 성당의 유해가 조사되고, 복자와 성인심사를 거쳐 1721년 복자(beatus)가 되고, 1729년 성인(sanctus)이 되었다. 그러므로 카렐 다리의 네포묵 조소상은 성인 추대운동과 관련이 있다.

네포묵 조소상 앞에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그것은 네포묵 성인으로부터 행운과 좋은 기를 받기 위해서다. 성인은 오른손에 순교를 상징하는 종려나무를 들고 있다. 왼손에는 십자고상이 들려 있다. 머리 뒤 5개 별로 만든 후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섯 군데 상처를 의미한다고 한다. 동상 아래 가운데는 성인의 이름, 건립연도, 성인에 대한 헌사가 적혀 있다.

반짝이는 네포묵 동판 부조
 반짝이는 네포묵 동판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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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좌우로 성인과 관련된 일화가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왼쪽에는 황후가 네포묵에게 고해성사하는 동안 바츨라프 4세 황제가 사냥개와 함께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오른쪽에는 황제가 네포묵을 다리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다. 사람들은 그 부조 중 사냥개와 네포묵을 손으로 만지면서 사진을 찍는다. 그래선지 그 부분이 황금처럼 빛난다.   


태그:#올로모우츠, #프라하, #블타바강, #카렐 다리 , #얀 네포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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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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