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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사랑은 어느 날 쫄바지를 입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나타났다. 그는 무대 위에서 야수처럼 포효하다가 인터뷰를 할 때는 수줍어했다. 초등학생인 나의 넋을 빼놓았다. 그 분은 현재 알려진 바로는 미혼이다. 후후. 이 사실에 나 혼자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그 분이 외계인에게 뇌를 조정당해 내게 청혼이라도 한다면? 나는 도망칠 것이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만큼 잘해주거나 그에게 나를 맞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만 가지고 사랑이 안 되더라, 하는 건 겪어본 사람은 알지 않나.

비유가 우습지만, 나는 가을이를 너무나 사랑해도 이 애에게 잘해줄 자신이 없었다. 만성신부전 3기 판정을 받고 퇴원했을 때, 가을이에겐 숙제가 많았다. 의사선생님은 이 아이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지 말지는 오로지 내 손에 달려있다고 했다. 맛 없는 밥과 넘치는 물에 평생 약을 달고 살아야 하는 삶. 내가 책임져야할 생명체가 떨고 있다.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인터넷을 뒤져보니 가을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반려동물들이 참 많았다. 그들의 보호자들은 지치지도 않고 정보를 공유하며 아이의 일상을 낱낱이 포스팅하고 있었다. 가을이의 기록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한 걸음씩 내디뎌 보기로 했다.

길바닥에 떨어진 햄 조각에도... 가을이는 달려들었다

항산화제를 물에 타서 주사기로 나눠 먹인다. 사료를 갈고, 신장 보조제 두종류와 잇몸약을 섞는다. 노란 기름은 오메가3 이다.
▲ 가을이의 가루 식단 항산화제를 물에 타서 주사기로 나눠 먹인다. 사료를 갈고, 신장 보조제 두종류와 잇몸약을 섞는다. 노란 기름은 오메가3 이다.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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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부터 시작했다. 알려진 바대로 신부전증 강아지를 위한 처방 사료는 기호성이 좋지 않다. 가을은 먹기 싫으면 밥그릇이 무서운 것이라도 되는 양 멀리 도망친다. 먹다 남은 밥을 보관했다가 다시 먹이려고 하면 음식이 차다고 다시 도망친다. 데워주면 뜨겁다고 또 도망. 그러니 애초에 남기지 않게 적당량을 준비해야 한다. 이가 약해 딱딱한 사료는 거들떠도 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사료랑 물이랑 갈아봤는데 물의 양을 잘 못 맞춰 사방에 튀기만 하고 결국 남겼다. 경단처럼 동그랗게 말아 입에 넣어주고 싶었지만 사료에 찰기가 없으니 다 부서지고 말았다.

수 차례 시행착오 끝에 가을이가 핥아도 덜 튀며 먹을 수 있는 물과 사료의 양을 맞출 수 있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이럴 때 써먹는 게 수학이잖아. 섭취해야할 물의 총량 400ml, 사료 150g. 하루 네다섯 번에 걸쳐 나눠 먹이니 외출 전에 소량 주는 물의 양만 감하고 나누면 되는 것이었다.

또 가을이의 습관에 따른 요령도 적용했다. 아침엔 식욕이 전혀 없으므로 꿀을 탄 항산화제만 먹인다. 자기 전에 밥을 너무 적게 먹이면 새벽에 위액을 토할 수 있으니 넉넉히 준다. 이제는 자리를 잡아, 물 100ml에 사료를 섞어 하루 세 번 먹인다. 간식으로는 고구마나 곶감을 준다.

그동안 세 번의 혈액 검사도 거쳤다. BUN과 Creatinine은 번갈아가며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결코 안정이 안 된다. 단백질을 제한 대신 지방 함량이 높아진 사료 때문에 체중은 늘었다. 그만큼 물의 양을 다시 늘려야 했다. 조급증이 일어 억지로 물을 먹이려니 가을은 밥그릇을 코로 밀어 엎어버렸다.

13만 원짜리 약을 탔기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놀란 가을은 고개를 돌려버린다. 휴…, 천천히 가야지. 사실 약만 비싼 게 아니라 사료도 그렇다. 조금 저렴한 사료를 샀더니 가을은 한 입 먹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또 한 입 먹고 한숨 한 번, 네가 한 번 먹어보라는 눈으로 쳐다본다. 할 수 없이 기존의 사료랑 조금씩 섞어서 주기로 했다.

밥으로 이렇게 헤매서인지 얘도 집착증 같은 게 생겼다. 길바닥에 있는 남의 똥이나 고기 덩어리, 소시지, 길냥이 밥 등을 먹지 못해 안달이 난 것이다. 그 애는 며칠 째 눈여겨보던 햄 조각인지 뭣인지를 기어이 입에 넣는다. 내가 재빨리 안아 올려 입을 벌리려 하는데도 있는 힘을 다해 삼키는 데에만 몰두한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속이 상한다. 가을이의 건강도 염려되지만 내가 가을이에게 가져온 기대치(우아하고 지조 있는)도 무너져 화가 난다. 집에 와 입안을 박박 씻기고 있자면 스밀라(반려묘)가 다가와 그 물을 홀짝홀짝 마시고 있다. 분노를 조절해야만 한다.

무너진 면역체계... 피부에도 입 안에도 이상 징후가

털이 빠지고 부스럼 같이 딱지가 앉았다. 저게 뭘까? 병원에 가도 답이 없다. 내가 잘못한 것 같아 기운이 쭉 빠진다.
▲ 목덜미 피부 트러블 털이 빠지고 부스럼 같이 딱지가 앉았다. 저게 뭘까? 병원에 가도 답이 없다. 내가 잘못한 것 같아 기운이 쭉 빠진다.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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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력이 약해진 탓인지 목덜미 피부에 정체 모를 멍울이 잡혔다. 털도 한 뭉텅이 빠졌다. 건강한 상태가 아니라 항생제 처방을 못하고 곰팡이 배양 검사를 했다. 결과는 음성이었지만 털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피부도 나아지지 않는다. 의사선생님은 바늘로 뽑아내기에도 부적당하다고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밥을 죽으로 먹어서인지 치주염이 다시 생겼다. 요독이 올라와 잇몸이 상하기도 하지만 통 씹을 일이 없으니 더 그렇다. 양치를 할 때 양쪽 어금니에서 피와 고름이 나온다. 가을이는 껌도 씹을 수 없어 먹는 약과 바르는 약을 처방받았다. 고름이 많이 차면 얼굴로 뚫고 나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약을 먹어도 안 가라앉으면 발치가 불가피하단다.

물을 강제로 많이 마시니 가을이는 요의도 자주 느낀다. 새벽 서너시에 일어나 나를 깨운다. 신부전증은 보호자와 당사자 모두가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덕분에 나도 게으른 생활을 탈피하고 있다. 설거지를 미루지 않고 청소도 열심히 한다. 아이가 불순물을 배출하지 못하는 병을 가졌으니 내가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느새 가을이를 입양한 지 3년이 됐다. 추정하기로 가을이는 13살이다. 그런데 요즘 문득, 가을이가 나를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느껴진다. 지금까지는 그저 '지켜주는 사람' 정도로 인식하는 것 같았는데, 최근엔 나의 칭찬과 손길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게 보인다. 스밀라와 스킨십하는 걸 봐서 그럴까? 잘 때도 꼭 옆에 붙어서 자려고 한다. 항상 한 뼘 떨어져서 등을 돌리고 잤는데 말이다.

인간이 사랑할 때 반응하는 대뇌 아래의 미상핵이라는 부분이 개에게도 있다고 한다. 단순히 먹을 것을 줘서 충성하는 게 아니라 개와 인간이 정서적으로 교감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제부터 매순간 가을에게 온 마음을 다해 애정을 표현하기로 했다. 지금도 그러고 있지만 조금 더 격렬하고 적극적으로 그럴 것이다.

신장을 고칠 자신은 없어도, 영혼이 뜨거워질 사랑 표현이라면 내 전문이다. 자신감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세상의 모든 아픈 생명체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이들도 그러하기를!

잠결에 보니 둘이 꼭 붙어있다. 원래 저러던 애들이 아닌데. 가을이의 표정을 보니 썩 내켜하는 것 같진 않다.
▲ 가을이와 스밀라 잠결에 보니 둘이 꼭 붙어있다. 원래 저러던 애들이 아닌데. 가을이의 표정을 보니 썩 내켜하는 것 같진 않다.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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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강아지신부전식단, #가을이스밀라, #BUN CRE 우엉물, #들장미개엄마캔디, #테리우스신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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