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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독일을 점령한 연합군은 나치당 전당대회 개최지였던 뉘른베르크에 국제전범 법정을 설치하고 나치의 주요 범죄자들을 법정에 세웠다. 1945년 11월 20일에 시작된 재판은 1946년 8월 31일 피고인들의 마지막 진술을 끝으로 심리 절차를 마쳤고, 이어 9월 30일과 31일 속개된 판결문 낭독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나치 2인자이자 공군 총사령관인 헤르만 괴링은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 집행이 되기 전에 감옥에서 자살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역사상 처음으로 '반인륜 범죄'를 규정하고 전쟁 책임을 국가가 아닌 개인에게 물음으로써 국제법 발전에 획기적으로 공헌했다. 또한 재판 과정을 통해 나치의 재발을 막는 교육 효과를 거뒀다. 그러나 긍정적 효과만 있었던 건 아니다. 독일인들이 이 재판을 '승자의 재판'으로 인식하면서 재판의 긍정적 의미가 축소되었다. 1946년 가을이 되자 독일인들은 전범을 오히려 '희생양'으로 간주하면서 공개적으로 옹호하기 시작했다.

소녀들의 동강난 인생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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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정신으로 이룩한 '라인 강의 기적'

1949년 9월 서독 정부가 공식 출범하자 독일인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전향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새 정부에 촉구했다. 경제 회복에 필요한 경제·행정 부문의 엘리트들이 나치 전력자라는 이유로 배제되고 있는 현실도 압력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50년대는 '외부에서 강요한' 과거 청산이 추동력을 잃고 '재再나치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나치 청산이 퇴색하고 말았다. 쫓겨난 수많은 관료·군인들이 복귀했다.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서독의 경제 부흥에는 끈질긴 '나치 정신'이 일조했던 셈이다. 서방 연합국이 이를 묵과한 것은 냉전이라는 국제 정세 때문이었다. 과거 청산보다는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을 막는 게 급했다. 1950년대는 '나치 때 저지른 죄를 부인하고, 그것을 잊으려는 두 번째 죄를 짓던 시기'였다.

진정한 과거 청산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 이후였다. 1961년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은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새로운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뭐니 뭐니 해도 세대교체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 교육과 인권의식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한 '68세대'는 엄격한 도덕성을 주장했고, 앞선 세대의 부당한 행위를 간과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근본적으로 독일 시민사회의 성숙에서 비롯되었다.

독일보다 악랄했던 오스트리아

우리는 흔히 독일과 일본의 과거 청산을 비교한다. 독일의 철저한 반성과 일본의 뻔뻔스런 행태는 지극히 대조적이다. 물론 독일의 반성은 전 세계적으로 모범이 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독일 이외의 나치 협력 국가들도 마찬가지였을까? 같은 독일어권에 속한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달랐다. 오스트리아인은 독일인보다 더욱 악랄했으며, 홀로코스트에서도 그들은 가담자 수에 비해 훨씬 큰 역할을 했다.

히틀러만 오스트리아인이 아니었다. 아이히만과 게슈타포 수뇌 에른스트 칼덴브루너가 모두 오스트리아인이었다. 나치 친위대 소속 말살부대원의 3분의 1을 오스트리아인들이 차지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여섯 개의 죽음의 수용소 중 네 곳을 통제했으며, 6백만 명의 유대인 희생자 가운데 거의 절반을 살해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독일인들보다 훨씬 강력한 반유대주의자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스트리아인의 절대 다수가 독일과의 합병을 지지했고, 7백만 명의 오스트리아인 가운데 약 55만 명이 나치 당원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동맹국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러면서도 1943년 10월 전후 처리에 관한 주요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영국·소련 3국의 외무 장관 회담에서 발표된 '모스크바 선언'에서 '히틀러의 공격에 함락된 첫 번째 국가'로 분류되더니, 급기야 전후 포츠담회담(1945)을 통해 보상을 면제받게 되었다.

일본과 오스트리아의 적반하장

이와 같은 면제 선언으로 오스트리아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책임을 얼버무린 채, 오히려 자신들이 희생자였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는 오스트리아 사회당의 1946년 발언에서도 나타난다.

"오스트리아는 배상을 해야 하는 국가가 아니다. 오히려 오스트리아에 배상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연합국은 오스트리아에 전범처리와 관련된 법률을 제정하도록 명령했지만 1963년까지 그 법을 시행할 검사단조차 만들지 않았다. 거꾸로 많은 이들이 사면을 받거나 석방 결정이 내려졌다. 오스트리아는 보상 책임을 죄다 독일에 떠넘겼다. 매년 8월 15일이 돌아오면 원폭 피해자라며 볼멘소리로 항변하는 침략국가 일본과 다를 바 없는 뻔뻔스러운 행태를 보인 것이다. 일본과 오스트리아 모두 적반하장이란 점에서 매한가지다. 서양이건 동양이건 정의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박상익님은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입니다. <나의 서양사편력 1·2>, <번역은 반역인가>, <밀턴 평전> 등의 저서와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등 다수의 저서와 번역서를 통해 서양사를 우리 현실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역사, #위안부, #오스트리아 ,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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