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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정치가 희망이다."

이런 말은 엘리트가 정치를 독점하고 시민의 직접적인 참여가 부재한 당대 대의제의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낯설게 느껴진다. 소수의 엘리트들이 정치를 독점하고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부재한 포스트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은 대체로 자신이 뽑은 정치엘리트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그들이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기다리거나, 때로는 정치적 무관심을 넘어 무지하기까지 하다.

시민의 직접적인 참여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이 도망쳐 버린 당대 대의제의 이런 현실을 두고 셸든 월린(Sheldon Wolin)은 '도망자 민주주의'라고 표현한다. 이런 도망자 민주주의의 현실 속에서 평범한 시민들에게 희망을 거는 일은 어리석은 짓일까? 도망자 민주주의 시대에 정치는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코빈과 샌더스가 젊은 층을 사로 잡은 이유는 뭘까?
 코빈과 샌더스가 젊은 층을 사로 잡은 이유는 뭘까?
ⓒ 참여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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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곳곳에서 들리는 저항과 봉기의 타전 소리

그런데 세계의 곳곳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주도하는 정치가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는 신호가 타전되고 있다. 그리스의 시리자, 스페인의 포데모스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 제레미 코빈을 당수로 뽑은 영국의 노동당, 무소속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가 대통령 후보로 급부상한 미국의 민주당 경선 모두에서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확인할 수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특히 우리가 주목할 곳은 보수적인 정당정치가 지배하고 있는 미국과 영국의 사례다. 1980년대 후반 이래 꾸준히 중도노선을 걷던 영국의 노동당이 2015년 9월 59.5%라는 당 역사상 최고의 지지율로,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아웃사이더 제레미 코빈을 새로운 당수로 선출했다. 그리고 현재 영국의 젊은이들은 소위 '코빈앓이' 중이다. 당 대표 선거 이전 20만 명 수준이던 당원이 불과 세 달 사이 32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미국은 더욱 극적이다. 민주당과 공화당에 소속되지 않으면 선거에서 이기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는 미국에서, 무소속 의원인 버니 샌더스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광풍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 대통령 후보들의 선거자금줄인 거대 부호들의 소위 '슈퍼팩'을 통한 모금을 거부하고, 250달러 소액기부로만 선거자금을 모은 샌더스가 힐러리 클린턴을 위협하고 있다. 이 열풍 뒤에는 젊은이들과 서민층의 적극적인 정치지원 활동이 자리잡고 있다. 영국과 미국에서 청년들과 서민층, 그리고 노동자들이 서로를 적극적으로 연결하고 자신들을 대표할 수 있는 이들을 정치의 전면에 내세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왜 중산층이고, 청년세대인가?

샌더스와 코빈 신드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중산층 및 청년세대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중산층 출신의 청년세대들의 지지는 놀라울 정도다. 그렇다면 왜 중산층 청년세대들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략 1980년에서 2000년 사이에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 혹은 'Y 세대'로 불리는 젊은이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세대를 규정하는 특징은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지구화 과정에서 생겨난 경제적 불안정성인데, 이런 불안정성이 얼마나 극심한지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가 대공황 때보다 더 심한 경제적 혹사를 당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그럼에도 이 밀레니얼 세대는 자신들이 맞고 있는 경제적 고난을 개인이 극복해야 할 문제로 취급하며 정치적 해결책에 무관심한 경향을 보였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샌더스와 코빈 열풍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지구화 과정에서 생겨난 직접적 피해 당사자로서 중산층 청년세대들이 정치적으로 결집했다는 점일 것이다. 변화의 주체가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라는 점은 변화의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주목했던 이유 역시 이 계급이 노동하는 자와 이윤을 얻는 자가 다르다는 자본주의 모순 속에 가장 큰 피해를 겪는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적 결집은 두 가지 커다란 의미가 있다. 우선, 이런 정치적 결집이 지구화를 주도한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바로 지구화의 핵심부에서 일어난 풀뿌리 저항인 것이다. 둘째, 이런 풀뿌리 결집이 자신들을 대표할 수 있는 정치인을 스스로 선택해 대통령과 수상으로 만들기 위한 제도권 운동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가장 효과적인 변화는 제도권을 공략할 때 일어난다.

그리고 가장 강력하면서도 효과적인 제도권 공략은 풀뿌리 운동이 제도권의 변화를 추구할 때 이루어진다. 지금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중요성은 풀뿌리운동이 제도권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풀뿌리에서 추구하는 제도권을 통한 결집'이라는 변화가 더욱 반가운 것은, 노동계급을 상실한 이후 주권자의 공백이라는 위기에 빠져 있는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에,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새로운 주권자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도권을 향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샌더스와 코빈을 둘러싼 신드롬을 바라보며, 많은 정치적 현실주의자들은 '정치를 현실적으로 바라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기업이 아닌 서민들을 위한 양적 완화', '무상공공고등교육',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국가의료보험체계'와 같은 정책은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지구적 시장에서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주장은 개혁을 주도한다는 진보적 진영에서 제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폴 크루그먼은 <뉴욕타임스>를 통해 샌더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현실적이 되어야 한다고 비난한다. 크루그먼은 2008년 오바마가 대통령 후보로 나섰을 때 그의 지지자들을 똑같은 이유로 비난했다. 그러나 듀크대 로스쿨 교수 제데다이아 퍼디가 지적하듯이 지금 그가 오바마의 가장 열성적인 팬이라는 점은 아이러니다. 영국을 보아도 그렇다. 비주류 급진주의자인 코빈이 노동당의 당수가 되자 심지어 진보적 언론들까지 현실주의자들의 흉내를 내며 코빈의 리더십을 비하하기에 바쁘다. 그리고 2020년 코빈을 새로운 수상으로 만들고자 자발적으로 나선 풀뿌리 세력에게 정치적 훈계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현실주의자들의 충고는 적어도 필자의 눈에는 극히 비현실적이다. 노예의 해방이, 여성의 참정권이, 노동자의 단체협상권이 정치적 현실을 긍정하는 점진주의로 얻어진 적은 없었다. 현실에서 이 모든 것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할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 모든 것은 풀뿌리에서 제도권을 향해 '더 많은 민주주의'라는 불가능한 요구를 한 것이 빚어낸 결과였다.

역사는 말한다.

'가능한 것의 한계는 현실적인 것이 짓지 않는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제도권에 함께 요구하자. 그리고 이를 위해 결집하자. 정치를 희망으로 만드는 방법은 멀리 있지 않다. '제도권을 향한 더 많은 풀뿌리 민주주의'. 곧 다가올 선거에서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힘이 바로 그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만권님은 정치철학자입니다.



태그:#선거, #센더스 , #미대선, #클린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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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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