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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전유죄, 유전무죄'

마크 트웨인의 동화 <왕자와 거지>에는 같은 날 전혀 다른 곳에서 태어난 두 명의 소년이 등장한다. 하나는 왕자로 하나는 거리의 거지로 태어난 그들은 놀랍게도 너무 닮아 있었고, 우연치 않게 만나게 된다.

궁 안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왕자의 철없는 요청으로 거지 소년은 왕자가 되고, 그들은 그렇게 처지가 바뀐 채 수 년 동안 되돌아가지 못한다. 계급제도에 대한 풍자이지만, 태어난 장소에 따라 운명이 정해지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재와는 관계가 없을까?

<가난은 어떻게 죄가 되는가> 겉표지.
 <가난은 어떻게 죄가 되는가> 겉표지.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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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어떻게 죄가 되는가>는 태어난 환경만으로 그들을 헤어나올 수 없는 굴레에 몰아넣는 '사법제도의 불평등'을 다루고 있다. 기자 출신인 저자 맷 타이비는 미국 사회에서 가난한 자의 죄에 더욱 가혹한 현실을 다양한 실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시쳇말로 '돈도 없고 빽도 없는' 가난한 자들은 국선변호인에 의한 형식적인 재판만이 허락되고, 그들은 누명이었든 실수였든 중요치 않은 채, '죄인'이 된다.

저자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미국에서 벌어진 수많은 '부조리'를 빽빽하게 모아 놓는다. 기가 막힌다. 이 책의 증거대로라면, '월가의 사기꾼들'이 변호인단의 엄호를 통해  증거 불충분으로 사면되는 동안, 사법제도의 불평등과 사회의 편견으로 인해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난 자들은 그 태생적인 '가난'만으로도 '죄인'이 되어 감옥에 갇혔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 사회의 빈곤의 심화는 폭력범죄의 감소를 가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1991년에 비해 수감자의 수는 두 배로 늘어났다. 감옥은 수많은 구실을 들어 '가난한 자들'을 가두고 있는 것이다.

상상을 해 보자. 출근길 복잡한 거리에서 누군가 나를 치고 지나간다. 주머니를 보니, 전화기가 사라졌다. 뒤들 돌아보고, 기억을 되돌리니 방금 지나간 두 사람이 그려진다. 한 사람은 허름한 티셔츠에 후드자켓, 땅에 끌리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멋진 서류가방에 정장을 입고, 오늘 아침에 새로 닦은 듯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여러분은 누구를 먼저 의심하는가?

<열두 명의 성난 사람들>이라는 195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좁은 방에 갇힌 열 두명의 배심원들이 피워대는 담배 연기만 가득한 영화였지만, 던지는 질문은 오늘날에도 결코 가볍지 않다. '가난한 집안의 전과자' 소년이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잡혀오고, 열두 명의 배심원들은 이 소년의 죄를 판정해야 한다.

첫 번째의 토론에서 열한 명의 배심원은 소년의 유죄를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그 소년은 '가난한 집안의 전과자'라는 편견만으로 너무나 쉽게 죄인이 된다(결론은 다릅니다. 영화를 한 번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같이 거리를 걸었어도 가난한 자들이 범죄자로 의심받고, 전과를 갖게 된 그들을 바라보는 편견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가난은 죄가 되고, 죄는 굴레를 만드는 악순환이다. 게다가, 이런 식의 악순환은 '불공정한 사법제도'에 의해 공고해지며, 사회의 편견은 관행을 비판없이 받아들임으로써 튼튼해진다.

세상은 이렇게 불공정한 제도에 의한 피해자와 수혜자로 구분되고, 두 개로 나눠진 사회는 점점 거리를 둔 채 서로를 외면하는 상태로 안정화된다. 사회는 이를 '양극화'라는 경제적인 개념만으로 취급하지만, 저자는 이런 경제적인 양극화로 인해 수많은 억울한 '죄인'이 만들어지는 사회적인 현상을 사례와 함께 증명한다.

이런 사회로도 괜찮은가? 우리는 이렇게 쪼개진 사회 안에서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가? 당신 자신이 편견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의 예시는 미국의 것이라며 무시할 수 있겠는가?

'내일'에 관심조차 없는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

우리 사회는 그들을 키워내는 데, 같이 책임을 나눠야 한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것만으로 죄인이 되지 않도록, 사회가 같이 감시하고 그들을 돌봐야 한다.
 우리 사회는 그들을 키워내는 데, 같이 책임을 나눠야 한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것만으로 죄인이 되지 않도록, 사회가 같이 감시하고 그들을 돌봐야 한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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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한 번씩 지역 아동센터의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목적은 영어수업인데, 선생의 실력도 부족한 데다가 중/고등부 사내 아이들은 도무지 수업에 관심이 없다. 소득계층으로 구분되어 센터에 다니게 된 열넷, 열다섯 소년들은 그들을 만난 지 두 해가 넘어가고 있음에도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얘기하지 않는다. 아니, '내일'에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심드렁하다.

오로지, 지금 당장의 수업에서 그들을 괴롭히지 않기만을 원한다. 도무지 요령이라곤 없는 선생은 목소리를 높여가며 한 문장이라도 따라 읽어주기를 원하지만, 아마 나도 내심 그들에게 이 수업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어떤 미래가 있을까? 상위 1%에게만 허락되는 꿈들을 그들에게 전달한다한들, 사회는 그 꿈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아이들에게 소리를 질러대면서도, 미안하고 부끄럽다.

넉넉하지 않은 집에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미래가 결정되어야 한다면, 그것이 열다섯 살짜리 소년의 잘못인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아이들은 종종 학교를 포기한다. 센터에 다니는 몇 년 동안 만났던 열명 남짓의 아이들 중 몇명은 이미 학교를 떠났다. 

'학교는 왜 그만뒀어?'
'재미 없어요. 친구도 없고. 아르바이트해서, 검정고시 볼 거예요.'

괜히 물었다. 허탈한 답이 돌아올 뿐이다. 학교는 그들을 돌보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은 학교가 재미없다.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을 받아 주는 곳은 없다. 아직 성장이 다 끝나지 않은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오늘 아침 뉴스에서 듣기로는 학교밖 아이들은 벌써 28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그들을 편견으로 대하지 않을 것을 자신할 수 있는가? 사회로부터도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그들은 과연 어떤 잘못을 했는가?

대한민국에선 그들의 양육에 대한 책임이 오롯이 가정에 집중된다. 하지만, 가난한 부모는 그들의 아이들을 챙겨 줄 여유가 없다. 최근 이슈가 되었던 수많은 아동 학대와 실종 아동에 대한 상해 사건이 이런 현실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아이들에 대한 책임이 지금처럼 가족에만 집중되는 현실로는 이런 비극을 끊어낼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들을 키워내는 데, 같이 책임을 나눠야 한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것만으로 죄인이 되지 않도록, 사회가 같이 감시하고 그들을 돌봐야 한다. 이것은 그 아이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안전한' 사회를 위한 것이다. 여기서 하나만 더 생각해 볼까?

현실의 양극화로 뚜렷하게 나뉘어진 삶은 <엘리시움>과 같은 영화에서처럼 전혀 별개의 공간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이 영화의 공간이 되는 엘리시움에는 상위 1%만을 위한 별도의 세상이 존재한다).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스며들어 있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 시스템(특히, 사법제도)으로 인해, 소외되어 죄인이 된 그들이 우리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거대화 된 도시가 그 안에 숨겨 놓은 '억울한' 범죄자들을 경찰력의 강화만으로는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우리는 점점 공동체를 믿지 못하게 될 것이며, 이웃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법이 효력을 잃은 세상에서, 혼자 마음 놓고 밤길을 걸을 수는 있겠으며 아이들을 혼자 학교에 보낼 수는 있을까? 이것은 <배트맨>이 지켜야 하는 고담시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법정의가 사라진' 불공정한 사회의 미래이다. 과장되었다고? 과연 그럴까?

가난한 집에 태어난 아이는 그 집에서 태어나겠다고 선택한 것이 아니다. 아이는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이를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키워내는 것을 그들의 부모에게만 책임지게 해서는 안된다. 이 사회가 그들이 공동체 안에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호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 두껍고 무거운 책이 500여페이지에 걸쳐 언급한 사례에서 보듯이, '불평등'에 의해 양산되는 사회의 불안을 다스리기 위한 제도적인 기반과 사회적인 공감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사법제도의 정의를 시작으로, 태어난 곳이 미래를 결정하는 불합리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정책적인 기반을 믿고 '지금 당장' 지역 아동 센터의 소년들에게 '꿈'을 얘기할 수 있다면, 더욱 더 좋겠고!

<가난은 어떻게 죄가 되는가 THE DIVIDE> 맷 타이비 지음/이순희 옮김(열린책들)


가난은 어떻게 죄가 되는가

매트 타이비 지음, 이순희 옮김, 열린책들(2015)


태그:#오늘날의 책읽기, #가난은 어떻게 죄가 되는가, #불평등/양극화, #사법제도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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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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