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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27일 안개비가 내리는 날, 10년 만에 충북 괴산군 괴산읍에 있는 제월리를 찾았다. 제월리하면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가 생각난다. 2006년과 그로부터 10년 후인 2016년에 제월리를 찾은 것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허윤배옹의 증언

증언자 허윤배
 증언자 허윤배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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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월리에서 1926년에 태어나 평생을 한마을에서 살아온 허윤배옹은 집 나이로 91세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로, 역사의 산 증인인 그는 보도연맹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농민조합에 가입해야 비료를 준다"는 말에 농민회에 가입했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1949년에 국민보도연맹에도 가입하게 됐다.

허옹이 살던 '제월리2구'에서만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은 16명인데, 그중 '북이면 옥녀봉'에서 12명이 학살당했다. 허옹을 포함해 4명의 보도연맹원이 살아남았고, 특히 두 명은 현장에서 생환(生還)했다. 약 800명이 동시에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청주시 북이면 옥녀봉 현장에서 윤길수, 이일룡은 총성 소리가 들리면서 같은 대열에 있던 사람들과 넘어졌고, 총 한 발 맞지 않고 도망 와 마을로 돌아왔다. 허옹은 같은 마을의 김장복과 함께 괴산경찰서까지 갔다가 풀려나 마을로 되돌아온 행운의 케이스다.

한국전쟁 초기 20만 명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언급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질문하는 것이 있다. "보도연맹원들은 왜 예비검속 당시에 도망가지 않고 사지(死地)로 순순히 갔을까"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허윤배옹은 6.25 전쟁 전 월 1회 꼴로 정기적인 소집을 해 청소 및 반공교육을 실시했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 없이 소집에 응했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을 허옹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괴산군 내 보도연맹원은 500명이었지. 보련사무실은 면내 상점자리인데, 한 달에 한 번꼴로 소집을 했지 ...(중략)... 모이면 무슨 특별한 교육을 하지도 않았지. 그냥 전체를 모아 놓고 시장 돌아다니며 청소도 하고 그렇지 뭐. 훈련은 없었어. 소집은 아마 대여섯 번 있었던 것 같아,"

벽초 집안이 몰살한 이유

벽촌 홍명희 고택
 벽촌 홍명희 고택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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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월리2구에서만 12명이 학살당한 이유는 뭘까? (1구, 3구에서는 희생자가 없었다) 그 열쇠는 벽초 홍명희의 집이 제월리2구에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벽초 홍명희는 사회주의라기보다 진보적 민족주의자다.

그는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1948.4.18.~4.30) 참석차 월북해 1948년 4월 20일 평양에 도착했다. 그 후 북한에 남게 되었고, 1948년 8월 중순 홍명희 일가 20여 명이 월북했다. 이 월북행에 벽초의 서모인 조경식과 제수인 김〇〇이 빠져 제월리에 남았다.

대한민국을 선택한 이들과 집안 일꾼 박갑출(머슴)과 〇동순(유모)도 죽음의 대열에 함께 하게 되었다. 조경식의 정확한 나이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벽초가 1888년생임을 감안하면 최소한 열 살이 많다 쳐도, 6.25 당시에는 72세의 상노인이었을 것이다. 또한 집안 머슴과 성도 확인되지 않는 유모는 무슨 이념이 투철하길래, 사상전향을 강요받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되었을까.

제월리2구의 16명 모두 같은 경로는 아니겠지만,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죽음의 땅으로 끌려간 데에는, 대한민국이 월북 행을 선택한 벽초를 빨갱이로 몰아세운 데 커다란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벽초가 미우니, 대한민국을 선택한 가족과 같은 마을 사람들까지 밉보인 것이다.

앞으로 10년

노무현 대통령 시절 '과거사법'이 제정되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사건 일부가 진상 규명되었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에 근접하기엔 많은 한계점이 있었고, 아직도 수많은 피해자의 유가족이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당시 과거사법이 피해자에 대해 일괄적으로 명예회복을 시켜준 것이 아니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제출한 자에 한해서만 조사를 한 절름발이 법률이었기 때문이다. 하루속히 과거사법이 개정되어 과거사의 멍에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10년 후 제월리를 다시 방문했을 때, 주민들은 한국전쟁의 상흔(傷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태그:#보도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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