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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출근길 도로 옆 화단의 산수유는 노랗게 피었고 아파트 울타리에 있는 개나리와 화단의 목련도 작은 꽃망울을 곧 터뜨릴 기세다.

따사로운 봄 햇살이 거실까지 점령해버린 휴일(27일) 오후. 방안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막내아이가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던 내 품에 갑작스럽게 안겨 살금살금 눈치를 본다. 아침에 운동 갔다가 함께 미용실 다녀오는 길에 봄 햇살의 유혹이 있었나 보다.

"아빠! 아빠는 왜 집에만 있어요?"
"왜? 밖에 나가고 싶어?"
"네! 누나는 숙제해야 하고, 엄마는 밖에 나가자고 해도 할 일이 많다고 해요."

막내아이의 말에 옆에 있던 아내의 눈빛이 바뀐다. '제발 아이 데리고 나가주세요'라는 신호를 보내는 게다. 사실 아내에는 휴일만 되면 평일보다 더 힘들다고 말해왔다. 휴일이라고 해서 집안일을 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와 아이들이 도와주는 것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삼시 세 끼는 기본이요. 빨래는 또 어떤가? 주말에 운동을 하는 탓에 운동복 두세 벌은 기본이고 비라도 오는 날이면 빨랫감은 배로 많아진다. 그렇다고 집에서 노는 아이들이라고 해서 빨랫감을 내놓지 않는 것도 아니다. 조금 더 망설이다가는 아내가 곧 폭발할 수 있다는 위협이 느껴지는 순간 말했다.

"그럼 아빠하고 산에 갈까?"
"네. 좋아요!"

산은 안 갈 것이라는 내 기대와 다르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막내아이는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아내도 '두 아들이 나가니 후련하다'며 가방에 간식과 물을 챙기고 천천히 들어오라는 아주 친절한(?) 말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막내아이와 나는 집을 나섰고 아침운동의 피로가 남아 있는 나는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고양 행주누리길(아래 누리길)을 선택했다.

"이 길은 처음 걷는 것 같아요"... 가슴 울린 막내아이의 말

뒷산 오솔길에 다다르자 약간은 선선한 바람이 감돌았다. 옷을 따뜻하게 입지 않아 조금 걱정됐지만, 누리길을 걷기 시작하니 자연스레 몸의 체온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야트막한 뒷산길. 아직은 황량한 느낌을 주는 누리길이지만 햇살을 마주하는 나무들은 파란 싹을 틔우며 봄을 맞이하고 진달래도 수줍게 몇 송이 피었다.

봄 햇살이 드리워진 누리길 주변 많지는 않지만 진달래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며, 봄이 왔음을 알려준다.
▲ 누리길에 핀 진달래꽃 봄 햇살이 드리워진 누리길 주변 많지는 않지만 진달래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며, 봄이 왔음을 알려준다.
ⓒ 노봉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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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을 본 막내아이가 진달래꽃 앞으로 성큼 다가가 '누나에게 자랑 한다'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는다. 누나는 집에만 있어서 이 꽃을 보지 못하니 사진으로 찍어서 꼭 자랑하겠단다.

진달래꽃의 여운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아빠와 함께 걸어서 즐거운지 막내아이의 발걸음은 점점 가벼워진다. 손을 꼭 잡은 막내아이는 "누나가 같이 놀아주지 않는다"는 하소연도 하고,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한다. 그러다 갑자기 막내아이가 말했다.

"아빠! 이 길은 처음 걷는 것 같아요?"
"응? 작년에도 그 전에도 함께 걸었는데 왜 처음이야?"

막내아이와 누리길을 처음 걸었던 것은 2년 전이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막내아이와 약 12Km에 달하는 구간을 한 번에 걷는 것은 무리였다. 때문에 주말마다 틈틈이 구간별로 나누어 걸었는데 막내아이가 처음이라고 말하니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막내아이의 말이 끝나자 가슴이 울컥하고 머리가 멍해졌다.

"여섯 살, 일곱 살 때는 자주 왔는데 여덟 살이 돼서는 처음인 것 같아요."
"…."
"아빠! 다음주에도 꼭 와서 동물원도 보고 지하철도 타요. 네?"

3월의 끝자락. 과연 나는 올해 들어 아이들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을까? 막내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벌써 한 달이 돼가지만 아이가 반에서 몇 번인지? 선생님은 어떤지? 같은 반 친구들과는 잘 지내는지 등 아이의 학교생활과 관련해서 엄마에게만 들었을 뿐 아이와는 직접적인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일상은 또 어땠나? 평일이면 일을 핑계로 여기저기 술자리에 다니며 가족과 함께 저녁식사 하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주말에도 취미로 하는 아침운동 후 피곤하다는 핑계로 거실에 누워 리모컨만 만지작거렸을 뿐 아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사실 많지 않았다.

산에 가자는 말에 따라나선 막내아이는 누리길을 걸으며 여섯 살, 일곱 살 때는 많이 왔는데 여덟 살 때는 처음 산에 왔다며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 아빠와 함께 해 더 좋은 누리길 산에 가자는 말에 따라나선 막내아이는 누리길을 걸으며 여섯 살, 일곱 살 때는 많이 왔는데 여덟 살 때는 처음 산에 왔다며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 노봉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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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내음 나는 누리길을 걸으며 비록 끝까지 완주는 못하고 중간에 되돌아왔다. 하지만 막내아이는 걷는 내내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하며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아파트 놀이터에 도착하자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아이들과 함께 나온 엄마 아빠들이 유독 많아 보였다.

막내아이는 어느새 친구를 만나 함께 놀이기구를 타고 놀며 아빠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이의 노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며 비로서 나는 깨달았다. 막내아이가 원했던 것은 산이 아니라 아빠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는 것을.


태그:#아빠와 아들, #봄의 산책, #고양 행주누리길, #동행,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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