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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1월 우리시대의 지성인이자 이 나라의 참스승 신영복 선생님을 저세상으로 보냈습니다. 정년퇴임 후에도 후학들을 위해 성공회대학교에서 석좌교수로 헌신하시다가 피부암으로 홀연히 세상을 등지셨습니다.

선생께서는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재직 중이던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1988년 특별가석방으로 출소되기까지 무려 20년 20일간을 옥고를 치렀습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그렇듯 감옥은 그에게 사색과 자기성찰, 공부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내 젊은 날 선생께서 옥중생활 중의 편지와 사색의 결과물들을 엮어 펴낸 그의 첫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접하고 받았던 충격과 느꼈던 감회는 참으로 컸습니다. 유폐된 옥중생활 중에도 깊은 우물 속에서 성찰의 환희를 길어내듯 낮고 조용하게 들려주는 사람에 대한 믿음의 글들은 내 마음에 오랫동안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고 신영복 선생의 <담론>
 고 신영복 선생의 <담론>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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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談論)은 그가 정년퇴임 후 석좌교수로 '인문학 특강'을 했던 강좌내용을 녹취하여 책으로 묶어낸 그의 마지막 강독입니다. 동양고전의 새로운 인식을 통해 사람(人間)과 삶(世界)에 관한 인문학적 담론을 담담하게 들려줍니다.

추억은 세월과 함께 서서히 잊혀 가다가 어느 날 문득 가슴 찌르는 아픔이 되어 되살아나듯이 그가 우리에게 들려준 담론은 5년 후, 10년 후 고독한 밤길을 걷다가 문득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며, 가슴에서 끝나는 여행이 아니라 가슴에서 발까지 가는 여행'이라는 그의 공부에 대한 인식은 사람만이 희망이며, 사람을 키워내는 것이 이 세상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끈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평생을 사람을 키워내는 일에 정념하신 교육자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은 압도적인 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함께 맞는 비'를 통해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는 그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야말로 궁극적 존재성이라 합니다.

자신을 개인적 존재로 인식하는 사고야말로 근대성의 가장 어두운 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기쁨만이 아닙니다. 슬픔도 사랑의 일부입니다. 마치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일입니다.

사람은 다른 가치의 하위개념이 아닙니다. 사람이 '끝'입니다. 절망과 역경을 '사람'을 키워 내는 것으로 극복하는 것, 이것이 석과불식(碩果不食)의 교훈입니다. 최고의 인문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욕망과 소유의 거품, 성장에 대한 환상을 청산하고, 우리의 삶을 그 근본에서 지탱하는 정치․경제․문화의 뼈대를 튼튼히 하고 사람을 키우는 일,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이고 희망의 언어입니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 신영복 시 '떨리는 지남철(指南鐵)' 전문

시대와의 불화로 받은 상처를 고스란히 가슴으로 삭히며 석과불식의 정신으로 후학 양성에 매진했던 그가 우리에게 던진 담론은 무엇일까요. 20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지위와 본분을 망각하고 자기가 지향하는 방향도 모른 채 온 나라가 잘났다고 야단법석인 판에 씨과일을 잘 키워 큰 나무로 키우고 숲으로 가꾸고자 했던 그의 철학과, 그가 우리에게 던진 담론을 화두삼아 우리의 자세를 돌아볼 일입니다.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돌베개(2015)


태그:#신영복, #담론, #석과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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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 essayist, reader, 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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