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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올레를 걸으면서 동백을 참으로 많이 보았다. 붉은 동백, 아름답더라.
 규슈올레를 걸으면서 동백을 참으로 많이 보았다. 붉은 동백, 아름답더라.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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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말, 통영에서 눈이 새빨갛게 물들도록 봤던 붉은 동백을 규슈올레를 걸으면서 참 많이도 봤다. 규슈는 봄이 일찍 와 동백이 죄다 졌을 줄 알았다. 그런데 3월말에도 붉은 동백이 흐드러졌고, 점점이 지고 있는 동백은 길을 붉은빛으로 물들여 자꾸만 걸음이 더뎌지게 만들었다.

꽃에 홀려 길을 잃은 것도 여러 차례. 잠시 마음을 딴 데 팔면 길은 눈앞에서 사라지기 마련이지. 하긴 그러면 어떠리. 길을 걸으면서 한 번도 길을 잃지 않는다면, 얼마나 멋대가리가 없는 사람인가. 고지식하게 죽어라 길만 걷는 거니까. 그러려고 길을 나선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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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멧돼지 길이 나타났다. 길 한쪽에 나무에 묶어둔 양철통과 대나무 막대기가 보였다. 멧돼지 '출몰' 지역이니 대나무 막대기로 힘껏 양철통을 두드려 멧돼지들에게 사람이 '출몰'했다는 걸 알리라는 거다. 사람이 멧돼지에게 만나고 싶지 않다는 확실한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다. 멧돼지, 너도 나를 만나고 싶지 않을 테니 나타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하고.

우레시노 코스를 걸을 때는 양철통을 두드려 주세요. 멧돼지야, 멧돼지야, 니네 집에서 나오지마라.
 우레시노 코스를 걸을 때는 양철통을 두드려 주세요. 멧돼지야, 멧돼지야, 니네 집에서 나오지마라.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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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둘이 서로 마주치면 누가 더 혼비백산할까? 사이좋게 인사를 나누고 나란히 앉아 정담을 나눌 사이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도 먼발치에서 멧돼지를 보고 싶었다. 지들끼리 다정하게 노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우레시노 코스를 걷는 동안 다섯 번이나 양철통을 두드렸지만 한 번도 멧돼지를 보지 못했다.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그에게나, 나에게나. 

삼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 그 사이로 길이 이어진다. 은은한 나무 향이 길 위에 감돌았다. 그 길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그래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걸어야 하는 길이 줄어드는 게 너무 아까웠다.

아무도 없는 길, 오로지 나 혼자만 있는 고즈넉한 숲길. 걷다가 이따금 뒤를 돌아본 것은 그런 길이 내가 걸은 뒤에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규슈올레 우레시노 코스
 규슈올레 우레시노 코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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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보니 이마에서 촉촉하게 땀이 배어 나왔다. 아침에는 분명히 선뜩한 한기를 느꼈는데 오후가 되면서, 해가 높이 떠오르면서 기온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나무 사이로 맑은 빛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차 하늘이 가려졌지만, 그렇다고 빛까지 가려지는 건 아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조금씩 숨이 차오르기 시작한 것은 오르막길이었기 때문이다. 숨을 고르면서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 어린 아기보살이 훈훈한 미소를 품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살이 두른 앞치마의 붉은 빛이 너무 선명해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붉은 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것만 같다. 여기가 어디지? 무릉도원인가? 커다란 바위에는 푸른 이끼가 무늬처럼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합장을 했다.

우레시노 코스의 하이라이트 '곤겐 불상과 13보살상'

규슈올레 우레시노 코스에서 만난 아기 부처
 규슈올레 우레시노 코스에서 만난 아기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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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두어 걸음 더 올라가니 우레시노 코스의 하이라이트라고 불리는 곤겐 불상과 13보살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불상들은 한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존재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제주올레는 순수하게 민간이 만든 길이라면, 규슈올레는 그 성격이 다르다. 17개 코스를 전부 규슈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조성했고, 관리까지 한다. 우레시노 코스는 우레시노 시가 주체가 돼 규슈올레를 유치, 우레시노 코스를 만들었다.

제주올레 사무국에서 우레시노 시가 만든 길을 심사를 하고 승인해야 비로소 규슈올레 코스에 들어갈 수 있다. 한데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 제주올레 이름값이 그리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우레시노 시에서는 규슈올레를 유치하고자 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규슈올레와 제주올레 사무국에서 생각하는 규슈올레는 차이가 많이 났다. 우레시노의 차밭이 아무리 좋다한들, 우레시노 코스 전체가 차밭으로만 구성돼 걷는 내내 차밭만 물리도록 보게 된다면 그 길은 결코 좋은 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심사에서 탈락했단다.

곤겐불상과 13보살상
 곤겐불상과 13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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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를 통과하지 못했으니 올레 담당자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규슈올레를 유치하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올레 담당자인 우레시노 시청의 야마구치 겐이치로 산림과장은 오후 3시만 되면 차밭과 울창한 숲을 헤매고 다녔다고 한다. 야마구치 과장은 아마도 길을 찾으면서 제주올레의 의미를 곱씹었으리라.

그렇게 길을 찾다가 딱 마주친 것이 바로 곤겐 불상과 13보살상이었다나. 한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불심을 다지고 복을 기원했던 불상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잊혀졌다고 했다.  

곤겐 불상과 13보살상 발견과 함께 우레시노 코스 만들기는 탄력을 받았고, 지금의 길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야마구치 과장이 길을 찾아 산속을 헤매던 일은 규슈올레의 전설이 되었다.

붉은 옷을 두른 곤겐 불상과 13보살은 온화한 얼굴로 계단을 오르는 나를 반겼다. 이따금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만 들릴 뿐 숲은 고즈넉했다. 불상 앞에서 합장을 하고, 그 옆의 휴식 공간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규슈올레 우레시노 코스
 규슈올레 우레시노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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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통을 두드리는 금속성 소리가 숲을 향해 퍼져나갔다. 처음 양철통을 두드릴 때만 해도 멧돼지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으나, 횟수가 거듭되다 보니 저절로 흥이 난다. 그래서 두어 번만 두드려도 되는 것을 나중에는 박자를 맞추면서 맹렬하게 두드렸다. 멧돼지가 꽥 소리를 지르겠다, 그만 좀 하라고. 시끄러워 죽겠다고. 아, 미안해. 너무 신나서 그랬어.

다시 펼쳐지는 차밭. 아까는 다랑이 논처럼 계단식 차밭이더니 지금은 멋진 융단처럼 매끄럽게 펼쳐진다. 사뿐하게 즈려 밟고 싶을 정도로. 그 차밭 사이로 붉고 푸른 올레길 표식이 두드러진다. 올레 표시는 길 위에 있지만, 내 마음에도 새겨진다. 저것 때문에 내가 길 위에 있는 거지.

숨이 막힐 정도로 멋있는 메타세쿼이아 숲

우레시노 차밭
 우레시노 차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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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기 아시아의 숲으로 접어든다. 22세기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조성한 숲이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자치단체에서 숲을 조성하고 길을 낸 뒤, 오랫동안 잊혀졌다던가. 그 사이에 나무는 쑥쑥 자라 울창한 숲으로 변했다. 전망대에 앉아서 메타세쿼이아 숲을 본다. 잘 자라 늠름하기까지 한 메타세쿼이아. 숨이 막힐 정도로 멋있다.

숲길과 차밭이 이어지는 길이 번갈아가며 나타났다 사라진다. 다섯 차례 양철통을 두드렸고, 걷고 또 걸었다. 잠깐씩 쉬는 사이에 준비한 간식을 먹었고, 물을 마셨다. 점심은 준비하지 않았다. 다 걸은 뒤 우레시노 시내에서 먹을 예정이다. 오후 1시~2시 사이에 도착할 수 있으므로.

우레시노 온천가를 지났다. 이곳에 우레시노에서 유명한 료칸 시이바산소(權葉山莊)가 있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다. 노천 온천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맞나? 방 장지문을 열면 코 앞에 계곡이 펼쳐져 별세계에 온 것 같았던 료칸이다.

도도로키 폭포
 도도로키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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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로키 폭포까지 가는 길은 포장된 길이 대부분이었으나, 낯선 이국 풍경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우레시노 강변에서 늙수그레한 한 사내가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이 천천히 낚싯줄을 강 위로 던졌다. 내가 곁을 지나가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수면을 보고 있었다.

마을에서 할머니 한 분과 마주쳤다. 할머니가 말을 걸어왔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웃으면서 규슈올레 우레시노 코스를 걷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혼자 왔느냐고 물으신다. 어젯밤에는 어디서 잤느냐고도 묻고.

료칸 잇큐소라고 하니, 가는 방향을 일러주신다. 그쪽이 아니고 이쪽 길로 가야한다고. 저는 규슈올레를 걷고 있어요. 코스를 따라서. 그래서 이쪽 길로 간답니다.

예전에 남도를 걸을 때 만났던 할머니들이 생각났다. 홀로 배낭을 메고 길을 걷고 있노라면 할머니들이 말을 걸어왔다. 힘들게 왜 걸어서 가냐, 버스를 타라. 왜 혼자 왔니? 남자 친구랑 같이 오지. 그러면 멈춰 서서 할머니들과 한참동안 수다를 떨곤 했다. 여기서도 그러고 싶은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너무 아쉽다.

규슈올레 우레시노 코스 도착지 시볼트 족탕
 규슈올레 우레시노 코스 도착지 시볼트 족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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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레시노 코스 도착지인 시볼트 족탕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30분. 너무 여유를 부렸나보다. 1시 반 정도면 도착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1시간이 더 걸렸으니. 시볼트 족탕에 왔으니 족욕을 해야 하는데, 허기가 졌다. 간식만 먹고 끼니를 걸렀으니 허기부터 달래야 했다.

우레시노는 온천으로 유명한 동네답게 온천두부가 유명하다. 온천물에 끓여낸 두부를 양념장을 끼얹어 먹는다. 따끈한 두부 맛은 일품이다. 료칸 잇큐소의 아침식사에도 온천두부가 나왔다.

우레시노 도로를 따라 걷다가 길가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한국인이라니 주인장이 한글 메뉴판을 가져다준다. 온천두부 정식을 주문했다. 생선초밥에 온천두부가 곁들여져 나온다.

걸을 때는 힘들지 않았는데 점심식사를 마치고 뱃속이 든든해지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다. 고작 12.5km밖에 걷지 않았는데 이러면 안 되지, 내가 하루에 50km도 걸은 적이 있는 사람인데. 이럴 때는 족탕을 해야지. 시볼트 족탕으로 가서 양말을 벗고 발을 담갔다. 따뜻한 온기가 발을 통해 온몸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졸음이 쏟아진다.
온천두부 정식. 우레시노는 온천두부로 유명하답니다.
 온천두부 정식. 우레시노는 온천두부로 유명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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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규슈올레, #도보여행, #우레시노 코스, #곤겐 불상, #제주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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