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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많은 재판이 그렇지만, 특히 성폭력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이 증언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피해의 순간을 다시 떠올려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피해자들에게 힘든 일인데, 더군다나 이 이야기를 낯선 공간에서 처음 보는 판사와 변호사들 앞에서 해야 한다. 가해자 측의 변호사가 사건과는 무관한 질문을 던져 상처를 받기도 한다. 거기에 법원에서 우연히라도 가해자나 가해자의 지인들을 만날까 두려움에 빠지기도 한다.

때문에 여러 상담소와 단체에서는 '재판동행지원단'을 운영하고 있다. 피해자를 지지하고 신뢰하는 동행인들이 함께 해 피해자가 증언할 용기를 복돋아 주고, 증언 과정을 견뎌낼 힘을 주기 위해서다. 거기에 지원단은 재판과정을 모니터링하며 가해자 측 변호사가 재판과 무관한 질문을 하지 않는지, 재판부는 이를 방관하지 않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모든 제도는 목적에 맞게 운영되어야 한다
 모든 제도는 목적에 맞게 운영되어야 한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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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여성민우회의 성폭력 피해자 재판동행지원단 '첫사람'은 당혹스러운 일을 겪었다. 지원을 위해 참석한 재판에서 퇴정 요구를 받았기 때문이다. 상황은 이렇다. 당시 재판에는 방청객으로 재판동행지원단과 가해자의 가족들이 참석했다. 그러자 이 사실을 알게 된 피해자는 가해자의 가족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으니 재판을 비공개로 전환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재판부는 "지원단이 재판을 방청하게 된다면 가해자 가족들도 재판장에 있도록 허락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의문을 표한 것이다. 지원단은 이에 대해, "그것은 비공개 재판의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의견을 전했고 담당 검사 또한 가해자 가족들의 퇴정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전달했다. 하지만 판사는 결국 지원단을 포함한 방청객 전원의 퇴정을 요구하고 만다.

'피해자 보호하려고 제도 만들었다'더니... 나가라고?

지원을 위해 입장하는 첫사람 재판동행지원단
 지원을 위해 입장하는 첫사람 재판동행지원단
ⓒ 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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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을 비공개로 진행한다면 재판동행지원단도 퇴정하라는 요구. 언뜻 보기에 이 같은 요구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은 비공개 재판 제도의 취지에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현행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은 '피해자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등'의 사유로 비공개 재판을 하도록 규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제도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가족과 같이, 증언 청취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과 분리된 상태에서 안정적으로 진술하기 위해 존재한다. 즉, 비공개 재판은 피해자가 제대로 된 증언을 할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재판동행지원인은 피해자의 증언에 방해되는 사람이 아니라 도움을 주기 위해 참석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다름 아닌 피해자의 요청으로 재판에 참석하며, 피해자가 원활하게 증언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존재한다.

성폭력특별법도 이를 인정하기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신뢰관계인이 동석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이런 지원단에 퇴정을 요구한 것이다. 말하자면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제도로 거꾸로 피해자가 도움과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 상담소의 로이(활동명) 활동가는 이에 대해 "비공개 재판 제도가 만들어진 의미와 목적이라는 게 있는데 판사가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판단을 내린 것 같다"고 언급했다.

활동가에 따르면 이같은 사례는 처음이 아니라고 한다. 2015년에도 재판동행지원단은 '가해자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퇴정 요구를 받기도 했다. 상담소는 이에 대해 '비공개 재판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존재하는데 왜 이런 요구를 한 것이냐'는 의견서를 보냈지만 재판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2차 가해 막고, 사건의 진실을 찾는 데 도움되는 재판동행인

한국여성민우회 재판동행지원단 첫사람이 사용하는 책자와 배지
 한국여성민우회 재판동행지원단 첫사람이 사용하는 책자와 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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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그럼에도 지원단이 법정에 남는 것은 형평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피해자의 위치에서 보았을 때, 지원단이 없는 재판이야말로 형평에 어긋난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피해자가 홀로 법정에서 증언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때문에 피해자는 시작부터 불리한 위치에서 재판에 참석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피해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어볼 때 확실히 드러난다. 한 피해자는 재판동행지원단에 보내준 후기에서 "'가해자를 마주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지원단이 법정에 앉아 있었기에 의연하게 참석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첫사람이 법원에 미리 와주었고 재판을 꼼꼼히 모니터링 해주었기에 안심하고 증언을 할 수 있었다"고도 언급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지원단은 피해자 보호와 더불어 실체적 진실 파악이라는 재판의 목적에도 도움이 된다. 피해자가 불안하다면 제대로 된 증언을 하기가 어렵고, 그렇다면 재판부 또한 제대로 된 사실 파악이 어렵기 때문이다.

재판동행지원단의 재판 모니터링은 재판 과정에서의 2차 가해 또한 방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 측 변호사는 반복적인 피해 사실 증언 요청을 통해 피해자를 지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피해 당시의 옷차림이나 심지어 '어떤 속옷을 입었냐'는 식의 질문으로 피해자의 수치심을 유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같은 행위를 감시하는 지원단이 있을 때, 변호사들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거나 혹은 재판부가 이러한 질문을 사전에 차단하는 식으로 의무를 다하기도 한다.

성폭력 피해자 재판동행지원단 첫사람이 사용하는 체크 리스트
 성폭력 피해자 재판동행지원단 첫사람이 사용하는 체크 리스트
ⓒ 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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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제도는 공평하고 정확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이 만들어진 취지와 목적에 부합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법이 취지와 목적에 부합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역행하는 식으로 사용된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을 것이다. 비공개 재판 제도의 이번과 같은 오용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태그:#성폭력,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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