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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과 같이 저도 평범한 아빠였어요. 그런데 우리 애를 내 손으로 4개월 동안 서서히 죽였어요. 애기 한번 잘 키워보려고 매일매일 가습기 살균제를 가습기에다가... 제가 제 자식을 죽인 게 아닙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어요. 너희가 안 죽였다. 미안하다. 내(옥시)가 죽였다. 너희가 죽인 게 아니라고 얘기를 해주시고, 잘못했다, 죄송하다, 네 새끼 내가 죽였다, 정말 미안하다, 얘기를 해주셨으면..."

가습기 살균제 사고로 사랑하는 어린 딸과 아내를 잃은 다민 아빠가 울먹이며 한 말입니다. 옥시는 10여 년 동안 가습기 살균제 453만 개를 판매했습니다. 사망자만도 100명이 넘는 가습기 살균제 사고를 낸 옥시는 사건이 불거진 후 5년이 지나서야 마지못해 사과했습니다. 하지만 다민 아빠가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말, "네가 아이를 죽인 게 아니다"란 말은 결국 듣지 못했습니다.

무균 가습으로 딸의 건강을 지키려했던 게 오히려 90일도 못 된 딸아이를 하늘로 보내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딸을 잃은 아내는 "미안하다"는 쪽지를 남기고 자살을 합니다. 다민 아빠는 이를 알리기 위해 직장도 접고 집을 팔아 전세로, 월세로, 고시원으로 옮겨가며 옥시 본사 앞에서 팸플릿을 돌리며 시위를 했습니다.

다민 아빠의 몸서리쳐지는 고군분투기가 소재원의 소설 <균>에서 살아납니다. 책에서는 민지 아빠로 등장합니다. 소재원 작가는 아동 성폭행 사건을 다룬 영화 <소원>(2013, 이준익)의 원작자이기도 합니다. 그의 소설 <터널>(김성훈) 역시 영화화 되어 올해 8월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균> 역시 영화화 된다고 합니다.

아빠가 딸을 죽. 였. 다.

소재원 작가는 '이야기를 시작하며'에서 군더더기를 늘어놓는 것을 싫어하지만 <균>은 "누구나 읽기 전에 마음에 준비를 해줬으면 하는 소설"이기 때문에 서문을 쓴다며, <균>을 "가볍게 읽지 말라"며 "잊지 않겠노라고!" 다짐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균- 가습기 살균제와 말해지지 않는 것> (소재원 지음 / 새잎 펴냄 / 2016. 5 / 268쪽 / 1만3000 원)
 <균- 가습기 살균제와 말해지지 않는 것> (소재원 지음 / 새잎 펴냄 / 2016. 5 / 268쪽 / 1만3000 원)
ⓒ 새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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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처절한 이야기이기에 이렇게까지 너스레를 떠는 것일까요. 그런 궁금증을 가지고 책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사건은 있는데 사건을 일으킨 이는 없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사고로 딸과 아내가 죽었는데 책임지는 이가 없습니다. 이 사고를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거머쥐거나 좋은 직장을 마련하려는 흑심들만 무지기수입니다.

90일 만이었다. 민지가 세상에서 숨을 쉬기 시작한 지 정확히 90일 만이었다. 엄마의 젖을 물린 지 90일만이었다. 무엇이든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본 지 90일만이었다. 두 명의 가족이 세 명이 된 지 90일만이었다. 90일 만에 내 전부를 모두 잃었다. - 본문 8~9쪽

귀여운 딸아이를 90일 만에 잃은 아버지의 절규는 이렇게 소설 속에서 울부짖음이 되어 메아리칩니다. 점층적 나열법은 독자로 하여금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한숨 돌리는 일조차 허락하지 않습니다. 한숨 돌리는 게 사치이거나 혹은 가습기 살균제 희생자들에게 미안함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딸도 아내도 잃고 난 후 석 달이 지나서야 모든 것의 진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딸과 아내를 죽인 살인자로 살아 있는 현실에 절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죽. 였. 다"는 외마디가 처절하게 가슴 속으로 파고 듭니다.

석 달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가습기 살균제가 민지와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을. 하지만 가습기 살균제를 사온 사람은 바로 나였다. 민지와 아내는 바로 내가 죽. 였. 다.- 본문 16쪽

가습기 살균제 사고 후, 야욕과 정치만 남. 았. 다.

민지 아빠는 직장을 집어던지고 환경부, 국가기술표준원, 식약청 등 정부 기관들을 찾아다니며 원인을 밝히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관할이 아니라고 합니다. 질병관리본부에 들렀을 땐 막말까지 듣습니다. 23살 아들을 둔 현재 아빠로부터입니다.

"여기가 구멍가게인 줄 알아. 억울하면 고소하시던가. 우리는 놀고 있는 줄 알아. 절차가 있는 법이야. 어디서 무턱대고 찾아와 난리야! 아침부터 재수 없게." - 본문 48~49

나는 이 무정부상태, 무호흡, 무뇌의 발언을 읽으며 세금으로 녹을 받는 준공무원의 발언이 맞는지 의심했습니다. 차라리 정부가 없었으면, 차라리 공무원이 없었으면 이런 소린 안 들을 게 아닌가 하는 무지막지한 아나키즘의 대변자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장면입니다. 독자가 이런 맘이라면 가습기 살균제 희생자들은 어떨까요.

민지 아빠는 승률 0%의 변호사 한길주를 만나 의기투합합니다. 권력욕에 불타는 국회의원 오민석도 합류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도 모두 자신들의 욕심만 채웁니다. 진심으로 시작된 만남이긴 하지만 한길주는 이 사건 변호를 통하여 일약 스타덤에 오릅니다. 오민석 의원이 끌어줘 국회의원까지 되니까요. 오민석은 당권을 거머쥐게 됩니다.

가습기 살균제 회사 사장에게 밖에서 시위하는 민지 아빠는 그저 곰팡이일 뿐입니다. 그는 부하직원 준호 아빠를 이렇게 다룹니다.

"올해 마흔둘이지? 가족도 있지? 자네 부하직원들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가족을 위해서라도 곰팡이 균을 막아야지. 작은 균이 급속도로 우리 회사에 퍼지게 되면 퍼진 부위를 잘라내야만 하는 안타까운 상황까지 갈 수도 있어. 사회와 기업을 붕괴시키는 균은 반드시 초장에 씨를 말려야 해. 알겠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처리하겠습니다."- 본문 26~27쪽

5살 아들을 둔 준호 아빠의 신속한 대답입니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한 명만 '인영 엄마'란 이름으로 등장시키고 모두 아빠란 이름으로 등장시킵니다. 이 시대의 아빠는 무엇인지 질문하는 거지요. 윤리와 상식이 뭐라 해도 가족의 안락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 그렇습니다.

헬조선에서 '아빠'라는 존재

민지 아빠가 죽은 딸과 아내를 위해 무엇이든지 하듯, 20살 아들을 둔 기준 아빠, 16살 딸을 둔 윤지 아빠, 12살 아들을 둔 윤석 아빠, 23살 아들을 둔 현재 아빠, 5살 딸을 둔 인영 엄마, 5살 아들 준호의 아빠... 이들은 공모하여 민지 아빠를 헛물켜게 만들고 좋은 직장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가습기 살균제 청문회가 열렸지만 "잘 모릅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란 각본에 충실하고... 짜고 치는 고스톱! 그렇게 민지 아빠와 수많은 제 삼, 제 사의 민지 아빠들은 권력으로부터, 돈으로부터 내침을 당합니다. 이 사회는 이를 단지 견해 차이나 입장 차이라고 에두릅니다.

작가는 민지 아빠와 그에 대응하는 다른 아빠들의 정체성 논의를 시작하지만 결국 정체성에 결론을 유보하며 끝냅니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아빠들의 외침이 그래서 더욱 공허하게 들립니다. '아빠'라는 이들의 정체성의 혼란은 곧 이 헬조선 사회의 정의의 혼란이며 그저 견해차로만 남는 것이지요.

"한겨울에 23도에 맞춰진 집에 들어가면 따뜻해. 하지만 한여름에 23도에 맞춰진 집에 들어가면 시원하지. 그 차이야. 사람들의 입장 차이는."-  본문 123쪽

덧붙이는 글 | <가습기 살균제와 말해지지 않는 것- 균> (소재원 지음 / 새잎 펴냄 / 2016. 5 / 268쪽 / 1만3000 원)

※뒤안길은 뒤쪽으로 나 있는 오롯한 오솔길입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오솔길을 걷고 싶습니다. 함께 걸어 보지 않으시겠어요.



균 - 가습기 살균제와 말해지지 않는 것

소재원 지음, 새잎(2016)


태그:#균- 가슴기 살균제와 말해지지 않는 것, #소재원, #아빠, #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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