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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붙여진 대자보 같은 총장, 다른 느낌
▲ 이대생 대자보1 학교에 붙여진 대자보 같은 총장, 다른 느낌
ⓒ 박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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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오후, 이화여대 본관에서 미래라이프대학 철회를 요구하며 점거 농성을 벌이던 200여 명의 재학생을 쫓아내기 위해 1600명의 경찰이 학내에 진입한 사건이 발생했다.

학내 경찰 투입을 비난하는 재학생, 졸업생의 반발과 시위로 결국 최경희 이대 총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미래라이프대학 설치를 철회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총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농성을 풀지 않고 있다. SNS와 일부 언론에는 졸업생의 명의로 학생들의 행동을 범죄시하며 '자수하고 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이 실렸다.

학생들이 농성을 지속하는 이유를 더 알고 싶었다. 광복절 연휴가 끝난 지난 16일 이화민주동우회 회원 일곱 명은 개인 자격으로 이화여대를 방문했다. 그들이 일베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마스크를 사용하고 있으며, 운동권도 배격하고 대표자 없이 '달팽이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다는 내용은 사전에 접한 기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본관으로 향하는 높은 계단으로 통하는 도로 양쪽에 들어선 건물을 ECC라 부른다는 것도 이번에야 알았다. 그 높은 계단을 올라가니 스프레이 낙서를 덮어쓰고 있는 김활란 동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미래라이프 대학 설립에 반대하며 본관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2일 오후 서울 이화여대 본관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 김활란 초대 총장의 동상이 페이트 등으로 얼룩져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미래라이프 대학 설립에 반대하며 본관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2일 오후 서울 이화여대 본관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 김활란 초대 총장의 동상이 페이트 등으로 얼룩져 있다.
ⓒ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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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유신 시절 학생운동 선배들도 하지 못했던 일을?'

'어쩔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탓하며 김활란의 친일 행각을 비호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것은 바로 어쩔 수 없는 시기에도 침묵해서는 안 되는 지식인의 역할을 방기한 채 강자의 지배 논리에 길들여진 나약하고 기회주의적인 지식인을 옹호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 행적을 아는 자가 소수였으므로 '소심한 운동권'은 김활란 상에 스프레이 한 번 뿌려보지 못했다. 그런데 '운동권'을 '꿘충'으로 부르며 배격한다는 이유로 농성 학생들에게 실망했다는 후배의 이야기와 달리 이들은 우리보다 더 용감한 '운동권'이 아닌가? 그들에 대한 호기심이 부쩍 일었다.

학교내 대자보_총장 사퇴이유 15가지
▲ 이대생 대자보2 학교내 대자보_총장 사퇴이유 15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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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대로 졸업생과 재학생 인증을 거쳐야만 본관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일행 일곱 명 중에 졸업증서를 내밀지 못한 두 명은 인터넷 자료까지 들이대며 '이화인'임을 증명하려 했지만 원칙을 고수하는 그들 앞에 기쁘게 손을 들고 돌아서야 했다. 다섯 명은 관문을 통과했다는 징표를 손목에 두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들은 사무실과 복도 등에서 자유롭게 노트북과 전공 서적, 스마트폰 등을 놓고 책을 읽거나 또래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건물 내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노트북으로 리포트를 작성하고 책을 읽기도 하며 하루에도 몇 차례씩 전원이 모여 '만민공동회'에서 그날의 안건에 관해 토론을 한다고 했다. 안건은 사전에 상정되고, 누구라도 발언할 수 있으며, 현장에 없는 사람의 의견이라도 수렴하는 결정 구조('달팽이 민주주의')를 택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기업의 이윤 추구 논리를 대학에 적용하여 대학을 통제하고 '일자리 맞춤 학원'으로 전락시키는 현 교육부를 비판했다. 또 이를 추종하며 독단적인 태도를 보이는 학교 운영진에 학생들이 희생당하고 있음을 주장했다.

17일 저녁 이대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이화의 발전을 바라는 이화인들의 성명서'가 SNS 등을 통해 떠돌았고 이틀 만에 900명 넘는 인원이 연명을 했다. 일반인들의 서명도 확산되고 있다. 18일 오전에는 교수 비대위 114명(19일 현재 116명)이 성명을 발표했다. 교수들은 성명서에서 "소통과 대화를 원하던 학생들에게 이대 총장은 불통과 무시, 공권력으로 응수했다"고 비판하며 총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이화인 900명 연명 성명서
▲ 이화인 성명서 이화인 900명 연명 성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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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학생들과 총장단과의 '대치상황'을 '감금'으로 규정하며 소수가 처벌받고 나머지는 해산하라는 일부의 주장은 농성 학생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면대 면의 소통 방식을 거부하고 서면 소통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에게 대표나 지도부가 없기 때문이다. 책임자가 없으니 즉흥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느리지만 의견을 종합해서 내어놓을 수 있는 서면 소통이 아니면 그들과 대화할 수 없다. 그들은 모두가 대표고 모두가 지도부다. 혹시 총장 측근이나 경찰이 일부에게 범죄 사실을 떠넘기고 농성을 해제시킬 요량이라면 꿈 깨는 것이 좋겠다. 그들의 '달팽이 민주주의'는 겁이 많은 자들도 행동할 수 있는 가장 진화된 방식이다.


태그:#이화이언, #고은광순, #달팽이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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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상식적인 나라에서 살고 싶은 이 땅의 평범한 여자 사람이자 민주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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