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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이면서 일제가 만든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 1호가 발행된 날이다. 106년 전이다. <관보> 1호에는 '한국'을 병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관보는 조선총독부가 매일 발행한 기관지로, 일제강점기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대한 모든 공적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 일제는 총 1만 450차례에 걸쳐 관보 정규호를 냈고 호외도 수백 차례나 냈으며, 그 분량은 13만여 쪽에 달한다.

1910년 8월 29일에 나온 <조선총독부관보> 제1호.
 1910년 8월 29일에 나온 <조선총독부관보> 제1호.
ⓒ 이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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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30일에 나온 <조선총독부관보> 마지막호. 광복 후에도 그 해 8월 22일, 25일, 28일, 30일에 걸쳐 네 차례나 <조선총독부 관보>가 나왔다.
 1945년 8월 30일에 나온 <조선총독부관보> 마지막호. 광복 후에도 그 해 8월 22일, 25일, 28일, 30일에 걸쳐 네 차례나 <조선총독부 관보>가 나왔다.
ⓒ 이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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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도 조선총독부관보가 네 차례나 나왔다. 그 해 8월 22일과 25일, 28일에 이어 30일에 마지막으로 나왔다.

그동안 일반인은 조선총독부관보를 쉽게 볼 수 없었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이 관보를 영인해서 '활용시스템'을 구축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오랜 기간 동안 완성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검색이 가능하다가, 전체 관보를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지난해 완료했다.

(사)의병정신선양중앙회 수석연구위원인 이태룡 문학박사가 <조선총독부관보>에 실린 '사형 집행' 기사를 정리한 자료를 <오마이뉴스>에 보내왔다. 어느 의병장과 광복지사의 사형이 무엇 때문에 집행됐고, 더불어 순국일을 알 수 있도록 정리해 놓은 자료다.

사형집행 666차례, 총 1200여 명 ... 광복지사 등 817명

일제강점기 사형은 총 몇 차례, 몇 명한테 집행되었을까? <관보>에는 '사형집행'이라는 기사 제목과 함께 어디에서 재판을 받았고, 언제 어디서 사형이 집행되었는지 기록해 놓았다.

<관보>에 '사형집행'이라는 기사는 총 666회 나오는데, 적게는 1명, 많게는 20여 명을 한꺼번에 사형집행했다. 내란, 살인, 모살(계획적으로 사람을 살해하는 행위),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사형이 집행된 사람은 총 1200여 명이다.

이태룡 박사는 "사형집행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 '폭도', '강도', '강도상해', 모살', '내란', '치안유지법 위반' 등이라 해 놓았다"면서 "실제로 의병투쟁이나 광복투쟁과는 무관한 실제 강도 살인죄를 범한 자도 있겠지만, 당시 의병장이나 광복지사에게 씌워진 죄명이 그러했다"라고 밝혔다.

이태룡 박사는 이들 가운데 의병·광복투쟁하다 피체되어 사형집행으로 순국한 의병장과 광복지사는 817명이라 했다. 그런데 이들 중 우리 정부로부터 서훈받은 사람은 113명에 불과하고, 700여 명은 아직 서훈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박사는 서훈된 113명의 <독립유공자공훈록>과 <관보>의 사형집행 날짜를 비교해 보면, 순국일자가 틀린 사례가 48명(음력으로 환산하면 맞는 경우 4명 포함)으로, 비율로 따지면 40%가 넘는다고 주장했다.

<조선총독부관보>에 실린 사형집행자 중 의병장과 광복지사 추정자 명단. 모두 666차례의 사행집행 기사가 실려 있고, 의병장과 광복지사로 추정되는 사형집행자는 817명으로,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지 못했다.
 <조선총독부관보>에 실린 사형집행자 중 의병장과 광복지사 추정자 명단. 모두 666차례의 사행집행 기사가 실려 있고, 의병장과 광복지사로 추정되는 사형집행자는 817명으로,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지 못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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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보 사형집행일과 공훈록 순국일 달라

맨 처음 '사형집행'이 등장한 때는 1910년 9월 1일자 <관보> 4호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한글 번역).

"김수용(金垂鏞)은 내란(內亂)과 모살(謀殺)의 죄로 인하여 본년 7월 9일에 대구공소원에서 사형의 선고를 수(受)하고 동년 8월 23일에 집행한 바가 되니라."

이태룡 박사는 기사에 등장하는 김수용은 해산 전수용(海山 全垂鏞)의 오류라 했다. 그는 호남 11개 의병부대의 연합의병부대였던 '호남동의단'을 이끌다가 1909년 12월 18일 피체되었다. 그는 일제가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했지만 끝내 굴하지 않았고, 이에 일제는 신속하게 재판을 진행했다. 그는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았고, 그 해 8월 20일 상고가 기각되었다. 사형집행은 사흘 뒤인 8월 23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국가보훈처에서 펴낸 <독립유공자공훈록>(1권, 1986년)에는 그가 1910년 7월 18일 순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태룡 박사는 <관보>에 나와 있는 사형집행일과 <공훈록>에 기록된 순국일이 다른 광복지사가 여럿이라고 말했다.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을 받고 대구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된 심남일(沈南一, 본명 수택(守澤))과 강무경(姜武景, 본명 윤수(尹秀)) 의병장의 경우는 함께 체포되어 재판도 함께 받았고, 순국한 날짜도 1910년 10월 4일이다. 그런데 강무경 의병장의 공훈록에는 순국한 월일을 비워둔 채 1910년으로만 기록하고 있다.

이 박사는 <관보>에는 경북 봉화의병장 신대룡(申大龍), 전남 화순 의병장 장인초(張仁初), 경북 경주·영덕·흥해 등지에서 활동한 의병부대였던 산남의진에서 활약했던 김일원(金日元)·윤흥곤(尹興坤) 의병장, 경북과 충북지역에서 큰 활약을 했던 최성천(崔聖天)·김수동(金壽童) 의병장, 경술국치 전후 경북지역에서 맹활약했던 한명만(韓命萬)·윤국범(尹國範) 의병장, 경남 하동과 전남 광양 등지에서 활약했던 김응백(金應伯) 의병장 등 20여 명의 순국일자가 실제 순국일과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또 있다. 경북과 강원도 등지에서 100여 차례 일본 군경과 싸워 명성을 떨친 정경태(鄭敬泰) 의병장, 대구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여 광복군 지원하고 이어 풍기광복단과 제휴하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총사령으로 활동하다가 순국한 박상진(朴尙鎭) 의사의 경우도 순국일자가 틀리게 기록되어 있다.

1907년 광무황제의 의병 거의 비밀 조칙을 받고 일어섰던 황해도 평산 등지의 의병장으로서 이진룡(李鎭龍) 의병장과 쌍벽을 이루며 의병투쟁을 전개하던, 경술국치 전후 각각 사단 규모와 여단 규모의 일본군의 진압작전에 맞섰던 한정만(韓貞萬) 의병장의 공훈록 기록에도 순국 일자가 기록돼 있지 않다.

이태룡 박사 "관보, 공훈록 기록 비교하면 기가 막혀"

김상태 의병장의 순국 기사가 실린 <조선총독부관보>(1911년 9월 27일 발행).
 김상태 의병장의 순국 기사가 실린 <조선총독부관보>(1911년 9월 27일 발행).
ⓒ 이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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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룡 박사는 김상태(金尙台) 의병장에 대한 <관보>와 <공훈록> 기록을 비교하면서 '기가 막혔다'고 밝혔다. 그는 1908년 7월 광무 황제가 비밀 칙령으로 선전관 출신 이강년(李康秊) 의병장에게 도체찰사(都體察使) 직임을 맡았을 때 그 부대의 중군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공훈록>에는 "3차에 걸친 심문 끝에 그는 감금 3년형을 선고받았다. … 단식 13일째인 1912년 7월 28일 옥중에서 순절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관보>에는 그의 사형집행일이 1911년 9월 21일이라 되어 있다.

이 박사는 "김상태 의병장은 1911년 여름 일본 군경의 집중 공략에 결국 피체되어 그 해 8월 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받고 대구공소원에 공소하였으나 그달 31일 기각되었고, 9월 21일 사형이 집행되었다"며 "그런데 '감금 3년형을 받고 자결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허구이다"고 했다.

음력과 양력이 뒤섞인 사례도 있다. 이 박사는 "함양 안의 출신으로 1907년부터 경술국치 이후까지 덕유산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피체되어 순국한 전성범(全聖範) 의병장, 1907년 가을부터 전북 임실에서 거의해서 전북의병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이석용(李錫庸) 의병장 등 4명의 기록은 행적과 관련된 일자가 양력과 음력이 뒤섞여 있고, 순국일은 음력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이어 "이석용 의병장 추모행사가 순국일인 4월 28일(음력 4월 4일)이 아닌 4월 4일에 맞춰 행해지고 있다"며 "심지어 이석용 의병장 100주기 추모 학술행사 안내문조차 '1912년까지 일제와 수십 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이다 일경에 체포된 후 1914년 4월 4일 대구형무소에서 36세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라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박사는 "'형무소'라는 용어도 조선총독부에서 1923년 5월 5일 이후부터 종전의 '감옥' 대신 사용한 말인데도 무심코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바르게 말하자면, '1914년 4월 28일(음력 4월 4일) 대구감옥에서'라고 해야 올바르다"고 했다.

이밖에 <관보>에는 사형집행일이 나와 있는데 <공훈록>에는 '미상'이라 해놓은 사례도 있다. 1936년 상하이 일본영사관을 습격하려다가 체포된 김태준 장군은 1939년 5월 3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집행된 것으로 <관보>에 나와 있는데, 공훈록에는 순국일자를 '미상'으로 해놓았다.

"서훈되지 않은 분 찾아 서훈부터"

이태룡 박사는 <관보>에는 800여 명의 순국 기록이 '사형집행'이란 기사로 실려 있다"며 "그러나 이것이 일제강점기 감옥(형무소)에서 순국한 우리나라 의병, 광복지사를 망라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본다"고 했다.

이어 "왜냐 하면, 교수형이나 종신징역, 15년 징역 등 중형을 받은 의병장이나 광복지사들은 일제에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옷을 찢어 끈을 만들어 자결하거나 일제 관헌이 주는 밥을 먹지 않고 굶어 사망한 경우, 탈옥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총살된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라 덧붙였다.

채응언 의병장의 경우처럼 교수형을 받은 판결문은 있으나 <관보>에는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기사가 없다고 이 박사는 설명했다. 순국일이 다른 이유에 대해, 그는 "조선총독부관보 영인본 시스템 구축이 늦었고, 후손과 학자들이 관보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게 하나의 원인일 수 있다"고 했다.

문학박사 이태룡 (사)의병정신선양중앙회 수석연구원.
 문학박사 이태룡 (사)의병정신선양중앙회 수석연구원.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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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일은 후손들이 지내는 제사나 추모행사와도 관련 있다. 이태룡 박사는 "경북·충북 지역에서 손꼽히는 김상태 의병장, 경북지역 광복지사로 추앙받는 박상진 의사, 광복지사로 알려진 김태준·최시흥 장군도 순국일자가 잘못 기록되어 있는 바람에 후손들은 제삿날을 제대로 몰라 엉뚱한 날에 제사를 지내거나 음력 9월 9일을 제삿날로 잡는 경우가 허다하고, 추모행사를 하는 기관이나 단체는 추모행사 날짜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했다.

이태룡 박사는 "조국이 광복된 지 70년이 더 지난 오늘날,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또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목숨까지 바쳤던 순국선열에게 <조선총독부관보>에 순국한 날짜까지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서훈도 하지 않고, 또 서훈된 순국선열의 순국일자마저 틀리게 기록하고 있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가보훈처는 서훈되지 않은 분의 자료를 찾아 서훈하고, 아울러 서훈된 독립유공자의 순국일자의 오류를 찾아 바로잡는 일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태그:#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관보, #의병, #광복지사, #이태룡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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