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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명 경찰청장이 지난 8월 23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열린 자신의 이임식에 참석한 동료 경찰관의 박수를 받으며 청사를 떠나고 있다.
▲ 2년 임기 마치고 떠나는 강신명 경찰청장 강신명 경찰청장이 지난 8월 23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열린 자신의 이임식에 참석한 동료 경찰관의 박수를 받으며 청사를 떠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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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23일, 강신명 경찰청장이 2년의 법정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강 전 청장 하면 후임자 이철성 현 청장 논란이나, 세월호 집회 때 CCTV를 통해 시위대를 감시하는 등 크고 작은 파문과 사건이 떠오른다. 그런데 아무래도 지난 2015년 11월에 맺어진,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과 백남기 농민과의 악연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백남기 농민에게나 한상균 위원장에게나 강신명 전 청장에게나 서로는 악연 중의 악연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강 전 청장이 경찰청장으로 있던 2015년 11월에 벌어진 '민중총궐기' 집회 때문에 한 사람은 조막만 한 햇빛이 들어오는 골방에, 또 한 사람은 산소호흡기와 링거에 의지한 채 병원에 누워있다. 물론 강신명 전 청장과 크고 작은 악연을 가지게 된 사람은 수없이 많을 테지만 여기서는 가장 큰 악연을 가진 그 두 사람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얽히게 된 배경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한상균의 구속과 사법 통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 은신 25일 만에 퇴거해 2015년 12월 10일 오전 서울 남대문경찰서에 자진출두하고 있다. 조계사를 나온 한 위원장은 경찰 호송차를 타고 남대문경찰서에 도착했다.
▲ 남대문서 도착한 한상균 위원장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 은신 25일 만에 퇴거해 2015년 12월 10일 오전 서울 남대문경찰서에 자진출두하고 있다. 조계사를 나온 한 위원장은 경찰 호송차를 타고 남대문경찰서에 도착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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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4일, 한 남성에게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과 일반교통방해 등의 혐의로 징역 5년에 벌금 50만 원이 선고되었다. 그의 이름은 한상균, 그의 직업은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다. 그것은 곧 그의 죄목이기도 했다. 한 위원장이 2015년 11월 14일에 열린 '민중총궐기'의 집회 주최자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총 13건의 혐의로 5년 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는 2010년 노동법 개악에 저항하다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은 단병호 전 위원장의 그것을 아득히 경신하는, 역대 민주노총 위원장 중 최고 형량이다.

한 위원장의 재판과 선고 과정에서 재판부는 사실상 검찰의 손을 들어 주었다. 애초에 민중총궐기 집행부가 신고한 서울 시청광장 – 광화문 사거리 – 청운동 주민센터로 이르는 행진을 불허, 즉 금지 통고한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그 덕에 한상균 위원장은 소요죄 혐의로 시대 역행적인 논란에 휩싸이다가 징역 5년이라는, 집시법 위반 혐의자치고는 이례적으로 높은 형량을 선고받았다. '범죄 주동자'가 된 것이다.

인상적인 지점은 한상균 위원장이 수인복을 입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장으로 있던 지난 2009년, 77일간의 공장 점거 파업을 주동한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는 '동종 전과자'이다. 그 무섭다는 동종 전과자 말이다.

판결이 나오고 한상균 위원장의 법정 구속, 그러니까 징역이 확장되자 많은 이들이 판결에 분개하고 분노했다. 소식을 전해 듣고 울분을 터뜨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 분노를 한 마디의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아마 "사법부가 공정하지 못하고, 비민주적인 공권력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도가 될 것이다.

그렇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건대 한국의 사법부는 매우 보수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조직이다. 아마 스스로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보수화 현상은 사회적으로 꽤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20세기 말엽 이후 현대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많은 정치·사회적 문제들이 법원의 판결대 위에 올라가곤 한다. 이러한 '법치 요구의 증가'와 함께 증가해온 것이 바로 '정치의 사법화(Juricialization of Politics)' 현상이다. 이 현상은 더 나아가 기존의 민주주의(Democracy)를 대체하는 통치 방식으로 자리 잡곤 하는데, 이를 두고 사법 통치(Juristocracy) 혹은 사법주의(Courtocracy)라고 부르곤 한다.

어떻게 부르던 사법에 의해 기존의 정치가 대체되는 현상은 현대 민주주의의 일반적 특징이지만 동시에 민주주의를 한계짓는 지점이기도 하다. '민중에 의한 자가통치'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이념에서 벗어나 '법에 의한 지배', 더 나아가서는 그 법을 다루는 '법률가에 의한 지배'로 변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아닌 민주주의, 즉 민주주의가 스스로 민주주의임을 포기하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민주주의와 헌정주의의 충돌

백남기 농민의 차녀 백민주화씨가 지난 8월 23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강신명 경찰청장의 사과와 처벌'을 요구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백남기 농민의 차녀 백민주화씨가 지난 8월 23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강신명 경찰청장의 사과와 처벌'을 요구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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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흐름에서 법을 해석하고 다루는 법률가들의 힘이 강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법률가들이 모인 사법부는 분립된 3권 중 유일하게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도, 심판받지도 않는 권력이기도 하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비선출 권력이기에 자신을 만든 살아있는 권력과 자신들의 뒷배를 봐주는 이들의 편으로 사법의 팔이 굽어지기 쉽다. 한상균이 5년 형을 선고받고 구속된 것이나 같은 날 같은 공간에 있었던 백남기라는 칠순의 농민이 쓰러졌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것은 사실상 같은 맥락이다.

그날 밤 살수차가 쏜 물대포에 백남기 농민이 맞아 여태껏 사경을 헤매도록 만든 책임자인 강신명 당시 경찰청장(현재 퇴임), 구은수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현재 퇴임), 그리고 당시 물대포 사용을 명령한 신윤균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제4기동단장(현재 영등포경찰서장으로 승진) 등 7인의 경찰 수뇌부들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이철성 경찰청장 내정자는 '백남기 농민에 대한 병문안은 약속하기 어렵다'고 했다. 경찰(그리고 검찰)은 스스로 사법부의 팔이 자신들 쪽으로 굽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Constitutionalism, 혹은 헌정주의)가 충돌하는 상황은 현대의 정치·사회에서는 매우 빈번한 현상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법치국가'라는 것은 민주주의 없이도 충분히, 아니 어떻게 생각하면 민주주의를 제거할수록 더 잘 작동할 수 있는 통치 시스템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법치'라는 것은 시민 혁명이 도래하고 민주주의가 서서히 뿌리를 내리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절대 군주나 독재자를 비롯한– 전제적 인치(Autocracy)의 복고를 우려하며 설치한, 일종의 '민주주의에 대한 제도적 제한'이기 때문이다. 원론적으로 생각해본다면 '법의 통치'를 통해 '인치'로의 복고를 미리 방지하겠다는 아이디어는 사실 꽤나 합리적이다. 동시에 민주주의에 한계를 설정할 수 있다는 강력한 힘 또한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문제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작금에는 도리어 법치가 권력지향적인 모습을 보이고, 전제화되고 통치하려는 모습, 즉 일종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헌정주의와 민주주의가 정면으로 대립하는 모습은 법을 다루는 이들이 권력을 지향하고 전제화될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법 그 자체가 권력 지향적이거나 권력의 보호막으로 설계 혹은 작동될 때도 나타난다.

예컨대 이승만의 반공법으로 그 역사가 시작된 한국의 국가보안법은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꾸준히 살아남았고 매카시즘이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유효한, 아니 매우 강력한 무기로서 존재하고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도 국보법은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SNS상에서 북한 트위터 계정 '우리민족끼리'의 트윗을 리트윗(RT)'하거나 "장군님 빼빼로 주세요" 등의 트윗을 올려 구속되었다가 무죄 판결을 받은 '박정근 사건'이다. 그들의 주장이나 '음모'가 현실성 있고 따위를 떠나 북한을 추종하고 내란을 선동하고 국가 전복을 꾀하는 '위헌정당'이라며 이석기와 통합진보당을 말 그대로 날려버린 사건도 있었다.

이 대표적인 두 사건은 국가보안법과 매카시즘이 여전히 '비밀병기'임을 다시금 증명하였다. 그 외에도 다수의 진보적 성향을 가진 네티즌이나 활동가들이 국보법 위반 혐의로 경찰의 내사나 조사를 받았고, 심지어는 대공분실에 가기도 했다.

또 집시법과 도로교통법은 –위반 혐의로 노동조합 위원장을 5년이나 감방에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로– 여전히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가로막고 있다. 이것은 애초부터 이러한 법률들이 '법치'와 '질서',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사회적 자유를 (꽤 격렬하게) 제한하고 통제하기 위해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어찌 보면 "가만히 있으라"는 말의 법률적 명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악법도 법일까?

경찰이 지난 11월 14일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 관련해서 21일 오전 서울 정동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있다.
▲ 민중총궐기 관련 경찰 민주노총 압수수색 경찰이 지난 11월 14일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 관련해서 21일 오전 서울 정동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있다.
ⓒ 사진제공 민주노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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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악법도 법인가?"라는 물음말이다. 이토록 사법이 고도로 정치화되고 권력 지향적이 된 작금의 상황에서는 단순히 위법 여부를 따지는 것보다 중요한 게 바로 그 법의 민주적 정당성 여부를 따지는 일이다. 물론 법 집행 과정에서의 민주성과 정당성, 그리고 '적법성'도 함께 말이다.

집시법과 도로교통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도록 하겠다. 이 두 법은 (바로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제한하고 통제하기 위해 설계되었고, 시위 현장에서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작용하고 있다. 진작에 위헌 판결을 받은 경찰의 차벽 설치도 '질서 유지'라는 명목으로 이 두 법의 보호를 받으며 지금도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고, 무차별적 연행과 물대포, 캡사이신 사용 또한 그렇다.

그러고 보니 요즘 서울 시내(특히 태평로와 세종대로 인근)에서 일어나는 큰 집회와 시위의 진행 양상은 늘 비슷하다. 시위 대오가 거리로 나가 행진을 시도하고 경찰은 차벽과 병력을 이용해 그들을 막는다. 그리고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경찰은 캡사이신과 물대포를 이용해 저항을 약화시키고 뒤로 물러서게 만든 다음 체포조를 투입해 '토끼몰이'를 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연행자와 부상자가 발생한다. 장비와 인력 면에서 수 배에서 수십 배의 우위를 지닌 경찰은 거의 항상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두곤 한다.

시위가 끝나면 매번 몇 대의 경찰차가 파손되고 얼마의 금전적 피해가 발생했다고 하지만, 핏대를 세운 체하는 이야기와는 다르게 그것은 일종의 '각오한 손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감당 가능한 손실 내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시위대를 공격하고 무력화시킨다. 아니러니컬하게도 그 '모든 방법'이라는 것 안에는 당연히 불법 또한 포함되는데, 앞서 이야기한 차벽이라던가 사용 메뉴얼을 위반한 캡사이신과 살수차, 소화기 사용 등이 포함된다.

그들이 불법을 저지르는 맥락

엘리트들이 스스로 결정한 법까지 어겨 가며 다른 양상의 불법, 즉 –누군가는 개·돼지라고도 표현한– 비(非) 엘리트들이 자신들을 규탄 내지는 비판, 혹은 저항하기 위해 일으키는 시위나 집회에 대해 강력한 진압을 시도하거나 사법 처리를 하는 것의 기저에는 아마 두 개의 맥락이 있을 것이다.

첫째는 그러한 불법이나 규칙 위반 등을 저질러도 암묵적·사회적·법리적 차원에서 묵인되거나 감당 가능한 피해만 입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 둘째는 그렇게 공권력이 법을 어겨가며 까지 진압해야 했을 정도로 해당 시위나 집회가 폭력적이고 통제 불능의 양상으로 흘러갔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좋은 수단으로 사용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민중총궐기 관련 ‘채널A’ 보도
▲ 채널A 보도 민중총궐기 관련 ‘채널A’ 보도
ⓒ 채널A뉴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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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의 폭압에 대한 저항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엥똘레랑스(똘레랑스에 반하는 행동)에는 엥똘레랑스로"라는 말을 오히려 엘리트가 가져와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백남기 농민이 쓰러졌던 '민중총궐기' 집회의 경우, 집회가 진행될 때와 그것이 끝난 이후에 많은 언론사의 뉴스와 기사에서는 시위대가 차벽을 잡아당기고 경찰 차량을 훼손시키는 등의 모습이나 피해액이 얼마라는 등의 소식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 시위가 '왜' 일어났고 요구사항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날 경찰이 물대포를 얼마나 쐈고 캡사이신은 또 얼마나 사용했는지 따위의 오히려 중요해야 할 소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심지어 다른 경찰이 쏜 캡사이신에 맞은 의경의 눈을 물로 씻겨 준 노란 외투의 여성은 '나쁜 시위대'가 아닌 '착한 시민'으로 프레이밍되었다. 왜곡과 대상화로 가득 찬 이미지는 인터넷을 거치며 재생산되었고, "그가 전의경 부모모임의 회원이라더라"라는 허위 사실(심지어 보도까지)도 등장했다.

'당연하게도' 백남기가 쓰러진 이후의 보도는 훨씬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지금까지의 시간 동안 국가폭력의 피해자인 칠순 농민은 언론과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잊혔고 도리어 "맞을 짓을 했으니 맞았겠지"하는 언어폭력만이 묵직하게 남았다.

그렇게 밀 농사를 짓던 노인은 '맞을 짓'을 해서 물대포를 맞은 '폭도'가 되었다. 그가 왜 거기 있었고, 어떤 사람인지는 그를 때린 물과 함께 증발해 버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만든 이들은 제대로 조사를 받기는커녕 '폭동'을 진압한 구국의 영웅으로 포장되었다. 민주화가 아닌 사법화가 이루어진 국가에서, 법과 법률가들은 사실상 그들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약속은 거부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8월 23일, 강신명 전 경찰청장은 병상에 누워 있는 칠순에 노인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도 없이 임기를 마쳤다. 그는 한 기자가 "백남기 농민과 가족들에게 해줄 말 없습니까?"라고 묻자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하고 쾌유를 빕니다"라고 답했을 뿐이다.

그는 퇴임하며 "법은 약속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이다. 지키기로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 불행과 불만이 시작된다"는 말을 남겼다. 그렇다. 법은 일종의 사회적 '약속', 즉 합의(Consensus)이다. 합의가 잘 이루어지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따져야 할 것은 합의 자체가 온당하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일 것이다.

한쪽이 한참 불리한 합의는 합의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존 로크가 사회계약설에 '저항권', 즉 부당한 권력에 저항할 권리를 명시한 이유 또한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합의 자체의 온당함과 동시에 약속의 이행, 즉 법의 집행이 온당하게 이루어졌는지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 '약속'이 온당하고 (그들의 말대로) '평화'롭게 이행되었더라면 백남기가 그곳에 누워있을 일도, 한상균이 몇 평짜리 골방에 앉아 5년을 보내게 될 일도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사법권력에서 그것을 집행하는 집행권력 이야기로 넘어가다시피 했지만, 어찌 되었건 앞서 이야기한 사법권력 등이 직접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는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형태가 어떻건 간에 권력이나 체제가 정당성을 얻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바로 '절차' 혹은 '업적'을 통해서다. 먼저 절차에 의한 정당성은 투표 등 일정한 절차에 의해 권력 획득과 유지의 정당성이 생긴다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정치학에서 이러한 절차적 정당성의 획득 절차에서 자유와 공정함을 매우 중시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공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격을 가지는 사람들의 선출에 있어서 자유롭고 공정한 과정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적어도 시험이나 능력에 의한 승진이라는, 능력본위적이고 관료제적인 과정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예컨대 대법원장이나 헌법재판소장 같은, 사법권력의 정점에 있는 이들이 그들의 판결이나 성향에 영향을 직접 받는 이 국가의 국민들이 그들을 선출하거나 심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작금의 현실은 사법권력에 대한 절차적 정당성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만든다.

법률가 조직은 역사나 국제적 사례를 보더라도 보수적인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그들의 권력이 가지는, 선출되지 않고 임명된다는 특징은 그들을 더욱 보수적이고 권력지향적으로 만들기 마련이다. 도리어 그들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과 회의가 커진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말이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업적에 의한 정당성은 말 그대로 성공적인 성과를 통해 권력이 현존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수 있는 정당성을 획득한다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사법권력이 사회를 안정시킨다며 성향이 다르거나 체제에 저항적인 사람들을 처벌하고, 공권력을 비호하는 행위나 판결 등을 통해 일종의 사법적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과 연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성과를 만들고 그 성과를 통해 생존, 즉 살아있는 권력에 의한 임명을 약속받는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사법권력은, 그리고 그와 비슷한 성격의 집행 공권력은 그렇게 이 두 가지의 정당성을 모두 무난히 획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곳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적이지 못한 정당성들이 과연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인정받아야 할까? 또 그것들이 강 전 청장의 말대로 약속될 수 있을까? 아니. 만약 그렇다면 그 자체로도 이곳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런 것들은 거부되어야만 할 것이다.



태그:#강신명, #한상균, #백남기, #법치주의,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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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글로 기억하는 정치학도, 사진가. 아나키즘과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가장자리(Frontier) 라는 다큐멘터리/르포르타주 사진가 팀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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