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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열리지 않는 문. 조여오는 고통.
 열리지 않는 문. 조여오는 고통.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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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 서 있는 한 남자.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뼈마디가 욱신거리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송 맺혀 있다. 발뒤꿈치를 지면에 쉽사리 닿게하기 두렵다. 남들이 눈치채지 않을 만큼의 총총걸음으로 어두운 상가 건물에 들어선다.

숨을 몰아쉰다. 습... 스읍... 철제 문 앞에 도달한다.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돌려보지만... ㅅㅂ. 잠겼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상가 내 빛을 찾는다. 선사시대부터 빛이 있는 곳엔 사람이 있지 않았나. 복도 끝 미장원에서 불빛이 새어 나온다. 불나방처럼 빛을 쫓아간다.

"어서 오세요."
"저, 열쇠가 있나요?"
"네? 무슨 열쇠..."
"화장실이요. 잠깐 쓸..."
(황급하게) "여기요."

그러고 보니 난 휴지가 없다. 미용실 휴지를 달라고 하기엔 사회적 체면이 있다. 한 손에 열쇠를 들고 힘겹게 상가 슈퍼에 들어가 여행용 티슈를 산다. 다시 철제 문 앞에 선다. 이제 끝이 보인다. 화장실 내부등도 켜지 않은 채 칸으로 향한다.

'우돫똷떽떽꾸룽삥꺍...'

대형 해머로 가슴팍을 얻어맞은 듯 심해로 꺼질 것만 같은 날숨을 내뱉는다. 살았다. 2015년 가을의 어느날, 장모님 댁이 있는 경기도 군포시의 한 동네에서 나는 그렇게 급변 사태로부터 살아 남았다.

This is '싸는 이야기'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니다.
ⓒ freestock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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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나만 이런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입으로 음식물을 섭취하듯 누구나 아래로 싸기 마련이다. 이런 류의 '싸는 이야기' 한 꼭지 정도는 소장하고 있을 게다(특히 나처럼 예민한 장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더욱).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이걸 입밖으로 끄집어내느냐,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하느냐일 뿐.

으레 이런 일은 명절이면 심각한 형태로 터지곤 한다. 명절이 선사하는 풍족함은 급변 사태로 귀결되곤 한다. 낱낱이 흩어진 식재료의 형태로, 누군가 뱃속에서 행주 짜듯 장을 쥐어짜는 고통으로.

그냥 홀로 배가 아픈 거라면 알아서 누면 된다. 하지만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건 쉽게 사태를 진정시키지 못할 주변 상황 때문이다. 특히 공간적 상황이 운신의 폭을 좁게 만든다. 만약 처가나 시가에서 급변이 터진다면? 눈앞이 까마득해진다. 이동수단에서의 고통은 이동이 끝나는 그때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자리에서의 고통은 가족 내 위치 및 이미지까지 위협하게 된다(위 사례도 장모님 댁에 갔다가 급히 밖으로 뛰쳐나온 뒤 벌어진 일이다).

아무리 한 가족이라지만, 아직 배설음까지 공유하기엔 어색한 단계. 처가살이 혹은 시가살이에 어느 정도 노련한 경력이 쌓였다면 이 어색함을 뛰어넘을 수 있지만, 내공이 덜 여물었다면 아무래도 저어하게 된다. '일 처리'를 저어하다가는 추가로 한방을 맞게 된다.

"김 서방(여성의 경우 며늘아), 저녁 먹게. 천천히 많이 먹어"라는 장인·장모님(혹은 시부모님)의 목소리를 곧 듣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끝없는 베풂은 끝없는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 4대강은 흘러야 하지만, 내 장 속 물결은 아직 흐르면 안 된다. 적절히 흐를 데서 흘러야 한다. 반드시.

난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뭐 대략 이런 느낌이다...
 뭐 대략 이런 느낌이다...
ⓒ TV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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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이었을 게다. 친척 10명 가량이 모인 외할머니댁.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급변을 견뎌내지 못하고 화장실에서 일을 봤다. 그 자리에서 황룡을 봤다. 화장실이 하나였던 외할머니댁. 뒤이어 화장실을 쓰게 된 외할머니께서는 연신 헛기침을 하셨다(죄송해요 할머니...).

더 이상 이런 불효는 없어야 했다. 그날 이후로 난 명절에 친척 집에 갈 때마다 나름의 대책을 세워 영민하게 행동했고, 그 결과 머릿속에 지도를 남겼다. 대동여지도 만큼 거룩한 작업, '대똥여지도 작업'이었다. 명절 때마다 어색한 곳에서 똥 누기 힘들어하는 누군가를 위해 나의 행동 지침 그리고 지도 작성 방법을 공개한다. 우선 지도를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부터.

1. 나가라 : 명절을 맞은 집에는 잠깐 한가해질 타이밍이 찾아온다. 잽싸게 나가라. "주변 산책 좀 하고 올게요"라는 말과 함께(설마 가족들이 날 오해해 간첩신고하진 않겠지).
2. 주변지형을 살핀다 : 인근 지하철역, 공원, 상가 등이 어디 있는지 살펴본다. 구글지도 등 포털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도 방법.
3. 화장실 우선순위를 확정한다 : 위험 등급에 따라 세밀하게 화장실 순위를 정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자, 그럼 이제 나만의 위험 등급 및 화장실 등급 선정 기준을 공개하겠다. 개인마다 가치관이 다른 만큼 알아서들 정하시라. 이건 샘플일 뿐이다.

나만의 기준, 나만의 행동 지침을 정하라!
 나만의 기준, 나만의 행동 지침을 정하라!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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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 등급 기준]
- 위험 A등급 : 부모/가족을 못 알아본다.
- 위험 B등급 : 이성의 끈은 잡고 있으나 신체 활동에 상당한 한계가 생겼다.
- 위험 C등급 : 참을만은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눠야 한다.

[화장실 등급 기준]
- 1등급 : 백화점/쇼핑몰 : 최상의 조건이다. 수용 공간이 넓고 칸도 많은 데다가 요새는 시대가 좋아져 비데까지 설치해 놓는다. 엔터테인먼트 요소도 충분하다. 극락의 공간. 개인적으로 롯데 자본의 화장실을 선호한다. 그룹에 문제가 있다지만 싸는 곳에 대한 철학은 인정해줄만하다.

- 2등급 : 목욕탕/영화관 : 목욕탕은 위생이 조금 떨어지지만 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영화관은 우선 용량이 대단하다. 7~8명이 동시에 눌 수 있는 공간은 그리 많지 않다.

- 3등급 : 동네 상가 건물 : 위생 상태가 떨어지고, 때에 따라 잠긴 곳도 있다. 쉽게 열쇠를 구할 수 있는 곳을 파악하는 게 좋다. 하지만 상가 건물엔 으레 슈퍼가 있기 마련, 휴지 보급선 확보에 탁월하다. 카페 화장실도 대안이다. 상가 화장실을 함께 쓰는 경우도 있고, 단독 화장실도 쓰는데 수용량이 한 칸밖에 안 되는 경우가 많아 뒷사람에게 민폐다. 다시는 안 볼 사람이니 괜찮겠지만...

- 4등급 : 개방형화장실 : 지하철역이나 공원 화장실이 이에 해당한다. 솔직히 가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을 때 간다.

위의 기준에 따라 제작된 내 머릿속 '대똥여지도 - 군포편' 중 일부를 공개한다.

내 머릿속 '대똥여지도 - 군포편' 중 일부. 세상 사는 게 다 이렇지 않겠나... (먼산)
 내 머릿속 '대똥여지도 - 군포편' 중 일부. 세상 사는 게 다 이렇지 않겠나... (먼산)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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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 댁은 지도 오른쪽 상단 3등급 상가화장실(열쇠 필요) 인근이다. 장모님댁에서 위험 A등급 급변 사태가 발생했다면 선택지는 단 하나다. 상가화장실에 가야 한다. 위험 A등급 때 1등급 롯데피트인에 간다면? 그건 '그냥 바지에 싸겠다'와 같은 표현이겠다. 나의 경우, 위험 B등급일 때 1등급 화장실에 가본 적이 있다. 꽤 부담이 큰 모험이었지만, 나 자신을 뛰어넘었다는 뿌듯함에 만족했다. 적어도 위험 B등급일 때 산본역 인근 번화가까지 진출할 수 있는 내구력을 갖췄다는 이야기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옆지기는 "그냥 눈 딱 감고 화장실 가서 일 봐"라고 조언해준다.

안다. 나도 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게 의지대로 잘 안 될 때가 있기 마련. 그런 상황에 대비해 이런 체계를 만들어놓고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내가 만든 지도가 제대로 사용되지 못할 때가 있다. 새벽. 모두 잠든 그때 홀로 유유히 똥을 누러 길거리를 헤매는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

이제 명절 똥에 대한 두려움은 많이 사라졌다. 아프면 눠야 한다. 근데 누는 건 편해야 한다. 불편하게 누면 시원하지 않다. 재앙의 씨앗이 직장 끝 언저리에 남아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 그 평화의 길에 이 더러운 이야기가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번 명절에 똥 때문에 괴로워하진 말자. 굿 럭.

막아야 한다. 막아야 한다. 막아야 한다.
 막아야 한다. 막아야 한다. 막아야 한다.
ⓒ publicdomain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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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화장실, #똥대란, #똥, #위기탈출, #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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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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