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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순간이 있다. 상대방이 농담이나 질문이랍시고 나에게 불쾌한 말을 던질 때. 하지만 너무나 당혹스러운 나머지 웃어 넘기거나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을 때. 괜히 나중에라도 문제점을 지적하면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으로 여겨지거나 혹은 뒤끝있는 사람으로 보일까 주저하게 되는 순간들. 혹은 상대방이 권력관계에서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기에 아무 말도 못하는 경우도 있다. 교수, 직장 상사, 친척 어른 등등. 이런 사람이 던지는 무례한 말 앞에서 화를 속으로만 삭였던 기억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말했다. 불쾌한 순간이 오면, 돌아봤을 때 적당한 말이 아니라도 그 때는 질러야 한다고. 왜냐하면 시간이 흘렀을 때, 이 경험에서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무력하고 초라했던 자기 스스로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때 한 마디라도 할걸' 후회를 하곤 한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누구나 상식 밖의 상황 앞에서 당황하기 마련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받아 들이다 상황은 끝난다. 상대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그 사람의 심기를 심각하게 건드리지 않으면서, 아무 말도 못하게 정곡을 찌르는 말은 보통 순발력이 있지 않고서야 떠오르지 않는다.

문제제기도 연습이 필요하다

일상적 실천을 통해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을 모토로 한 한국여성민우회의 '해보면 캠페인'. 지난 3월, 이 캠페인을 사회적으로 더 확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해보면 기획단'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기획단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불편한 말들과 상황이었다. 당장에 그런 말들을 멈추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해도, 거기에 속 시원하게 대응이라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가령 대놓고 외모 지적질 하던 남자동료들에게, "니 얼굴이나 신경써"라는 말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그 상황이 조금은 덜 불쾌한 기억으로 남지 않았을까.

유쾌하거나 쿨하거나, 혹은 분노를 표출하거나 불편한 말들 앞에서 정색 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 많았다. 하지만 왜 사람들은 그 순간에 당황해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을까. 기획단이 내린 답은 '그것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회 생활을 하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호적인 인간관계를 맺길 바란다. 되도록이면 타인에게 친절하고자 하고, 정색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즉 불편한 감정을, 특히나 직장 동료처럼 사무적 관계에 있거나 교수처럼 권력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표할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내린 결론은 '정색도 연습을 해야한다'였다. 아무리 좋은 대응책과 정색의 기술이 머릿속에 있어도, 몸이 익숙해지지 않으면 필요한 때 사용하기는 힘들었다. 우리는 직장내 성희롱 발언, 수업 중 교수님의 혐오 발언, 직장 상사에게 듣는 폭언 등 몇가지 시나리오를 짜고, 그 상황을 재연해 직접 대응을 펼쳐볼 수 있는 워크숍을 기획했다.

지금까지 답답했던 사람들의 속이 확 풀리기를 바라며, 그 곳에 모일 많은 '을'들이 역습에 성공하기를 기원하며, 워크숍의 이름은 '속이 풀리는 급정색 워크숍, "을들의 역습"'이라고 지었다.

내가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니는 '더 이상 참지 않겠다!' 포스트잇
 내가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니는 '더 이상 참지 않겠다!' 포스트잇
ⓒ 신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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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실천을 도와줄 도구: 포스트잇

하지만 기획단의 활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워크숍에서 다룬 성차별적 발언, 소수자 혐오 발언, 무례한 농담, 외모 지적은 개인들 간의 관계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대중 문화, 언론, 심지어 지하철이나 식당 입간판에까지 이런 식의 말들은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 그리고 이런 언어들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거나 심지어 상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개인들 사이에서 혐오와 차별의 말이 손쉽게 등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때문에 기획단의 다음 액션은 관계에서의 불쾌한 순간을 넘어서, 이 불쾌한 말들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되게한 사회를 향했다. 그리고 해보면 기획단의 취지에 맞게, 구성원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기 보단, 많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사회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차별과 혐오를 마주했을 때, 어렵지 않게 이를 비판할 수 있는 방법. 일상적으로 할 수 있고, 때문에 확산되기도 쉬운 방법. 활짝 펴서 우리의 메시지를 보여줄 수 있는 부채에서 부터, 아예 메시지를 입고 다닐 수 있는 의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오고 갔다.

그리고 결국 우리의 의견은 포스트잇으로 모아졌다. 휴대도 간편하고 여기저기 부착함으로서 메시지 전달도 간편했기 때문이다. 포스트잇의 문구는 차별과 혐오, 불편한 농담을 직접 지적할 수 있는 문구와('안 웃겨요', '고조선이야, 뭐야~', '외모 얘기, 그만 좀!', '반말 하지마세요') 용기를 내서 부당한 상황에 맞선 인물에게 전달하는 응원의 메시지('당신은 행동하는 첫사람! 저도 두 번째 사람이 될게요')로 구성되었다.

여러 후보들 중에서, 가장 메시지가 선명하고 사용 빈도가 높을 것이라 예상된 문구가 선정되었다. 그리고 기획단의 나리맛탕이 그려준 포스트잇 표지에는, 주체적이고 당당한 모습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이 자리했다.

불쾌한 농담에 '안 웃겨요'로 대응한 포스트잇 액션
 불쾌한 농담에 '안 웃겨요'로 대응한 포스트잇 액션
ⓒ 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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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잇이 이끌어 낼 변화

그렇게 나름의 고민과 시간을 거쳐 포스트잇은 탄생했다. 기획 과정에서 나는 이 포스트잇이 답답한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시원하게 할 수 있다면, 그런 일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막상 포스트잇이 공개되고, 이를 길거리에 붙이는 액션 사진이 공개되었을 때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들이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SNS를 통해 우리의 소식을 공유해주었고, 포스트잇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도 꽤나 여럿 등장했다. 또한 몇몇 언론에 이 같은 상황이 뉴스로 등장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직접 포스트잇 액션을 계획중인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에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이 같은 결과는 기획단이 가졌던 것과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말들이 횡횡하는 사회, 그리고 이런 사회 속에서 맺어진 불편한 관계들에 대한 문제의식 말이다.

해보면 기획단의 활동은 포스트잇을 끝으로 최근 종료되었다. 하지만 포스트잇 액션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리라 믿는다. 이제 곧 새 주인을 맞이할 포스트잇들이 누군가의 직장에서, 지하철역 어딘가에서, 학교에서 불편함을 말하는 목소리를 내어주길 희망한다.


태그:#여성운동, #여성주의, #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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