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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토) 아침, 친구인 춘수 등과 내 고향 영주를 찾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선 풍기읍에서 풍기인삼시장을 잠시 둘러 본 다음, 불고기로 점심을 했다. 인삼막걸리까지 한잔하면서 든든히 배를 채운 우리들은 순흥면 '금성대군신단'으로 향했다.
 
풍기인삼
▲ 풍기인삼 시장 풍기인삼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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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기슭과 소백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충절(忠節)의 고장 영주시, 이곳 사람들은 예부터 절의(節義)있는 선비를 존경했다. 그래서 영주사람들은 소백산 산신령으로 충절의 상징인 세종대왕의 여섯 째 아들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을 모시고 있다. 

영주한우
▲ 한우불고기 영주한우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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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은 형인 수양대군(세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세종의 아들 8명 중 에 유일하게 형인 수양대군에게 반발하여 분기한 인물이다. 1455년(단종3) 수양대군에 의해 모반혐의로 삭녕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광주로 이배되었다.

1456년(세조1) 성삼문 등 사육신이 중심이 된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이후 유배된 순흥에서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모의하여 군사를 모으고 의병을 일으켜 단종복위를 꾀하려고 하였으나, 거사 직전 관노의 고변으로 체포된 후 안동으로 이송되어 32살의 나이에 사사(賜死)되었다.

조선시대 사형수인 중죄인은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는데, 사형 집행 전에 구덩이에 가두고 그 주변을 탱자나무나 가시덤불로 둘러싸 외부와 격리시키고 감시인을 두며, 그 안에 가두었다. 금성대군 역시도 안치 형벌 중 가장 무거운 위리안치 형벌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금성대군. 단종
▲ 금성대군신단 금성대군. 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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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의 위리안치지에 1719년(숙종45) 부사 이명희가 왕의 허락을 받아 금성단을 설치하였고, 1742년(영조18) 경상감사 심성희의 청원에 따라 단소(壇所)를 정비하였다. 그 후 1980년경에 제청과 주사를 건립함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영주사람들은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의 억울한 죽음도 같이 추모하기 위해 태소백의 분기점인 단산면 고치령에 태백산 산신령이 된 단종과 소백산 산신령이 된 금성대군을 모신 산신각을 모시고 있기도 하다.

사실 나는 이곳 금성대군신단에 서면 많은 생각이 든다. 절개(節槪)와 충의(忠義)로 뭉친 영남사림의 고장인 이곳이, 오늘날 새누리당 일색이 되었으니 마음 아플 뿐이다. 금성대군신단 바로 옆에는 지난 1200년 동안 순흥의 역사와 함께했던 은행나무인 '압각수'가 한그루 서있다.

압각수
▲ 은행나무 압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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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복위운동이 발각되어 이곳의 수많은 관민이 죽어나간 것을 본 이 은행나무는 순흥부가 혁파된 지 200년 가까이 흐른 1643년(인조21) 어느 날, 다시 나무에 생기가 돌아 껍질이 생기고 가지와 잎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1682년(숙종8)에는 나뭇가지가 무성해진 것이 되살아난 게 분명했다. 한 해 뒤인 83년, 드디어 혁파되었던 순흥부가 226년 만에 다시 생겼다.

1200년 넘게 한자리에서 충절의 고장을 지켜온 이 은행나무는 신목으로 아직도 순흥땅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나무 몸통을 부여잡고 잠시 기도를 올린 다음, 인근의 '소수서원'으로 향했다. 국내 최초의 사립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소수서원은 입구의 소나무 숲인 학자수가 너무 좋은 곳이다.

소수서원
▲ 학자수 소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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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나무와 함께 입구의 500년 된 은행나무도 좋아한다. 그리고 국내 서원 건축물 중에 가장 오래된 경렴정 정자와 함께 퇴계 선생이 자주 방문했다는 죽계천 아래에 있는 취한대를 사랑한다. 이곳에서 정말 시를 한수하면서 술을 한잔하고 싶다. 그리고 지도문을 통하여 서원 안에 들면, 128년 만에 강학기능이 회복된 강학당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소수서원
▲ 취한대 소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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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의 적자만을 대상으로 공부를 가르치던 이곳은, 현재 양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문해독이 가능한 사람은 누구나 지원하여 공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평등사회를 맞아하여 개방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소수서원
▲ 경렴정 소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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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직방재, 일신재, 학구재, 지락재 등의 서재와 숙소를 살핀 다음, 문성공묘의 외부와 영정각을 둘러본다. 나는 이런 곳에서 잠시 한복을 입고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 선비의 숨결을 시나브로 느끼고 배우면서 말이다.

영주시
▲ 128년 만에 공부를 다시하는 소수서원 영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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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안팎을 둘러본 다음, 소수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탁영지를 살피다가 '선비는 맑은 물에 갓끈을 씻고, 탁한 물에 발을 씻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연못 곁에 서니 이제 나도 선비가 된 듯하다. 모자라도 씻어볼까?

임진왜란 전후에 만든 연못
▲ 탁영지 임진왜란 전후에 만든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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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다시 한학에 관심을 두고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영주시의 권혁태 전(前) 국장을 만나 잠시 안부를 전했다. 은퇴 후에도 성심으로 한문을 공부하다니, 참 부러운 인생이다. 이어 '소수박물관'으로 이동했다. 나는 박물관에서 늘 두어 가지를 유심히 본다.

권혁태 전 국장
▲ 영주시 권혁태 전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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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신라시대 사찰인 숙수사 당간지주의 용머리인 금동당간용두. 정말 너무 멋스럽다. 이쁜 모습이다. 이런 장식품은 어디에 걸어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순흥읍내리고분벽화의 내부를 살핀다. 한반도에 대가야에만 있었다고 전해지는 순장의 풍속이 이곳 고분에서도 나왔다고 한다.

60~70년 정도 고구려 땅이었던 영주에서, 부인의 죽음을 슬퍼한 낭군이 몇몇을 순장시켜 아내의 주검 곁에 묻어주었다고 한다. 남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 양식이 무덤이 영주에 존재한다는 것이 특이하여 꼭 둘러보는 곳이다.

물론 일부가 도굴이 되어 원형을 정확히 찾아 볼 수는 없지만, 뱀을 잡고 있는 서역인의 벽화그림이나, 삼족오를 닮은 모형, 일본의 고이노보리(일본에서 남자아이의 성장과 출세를 상징하는 잉어 깃발이다. 일본의 어린이날인 5월 5일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다)와 비슷한 모양의 깃발도 보인다.

국보
▲ 반가사유상 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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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비슷한 것이 국내에 2개 남아있는 국보78호 금동여래좌상, 소백산 초암사에서 발견되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여래좌상이다. 2개 중 하나는 백제의 것이고, 이것은 신라의 것이다. 일본의 국보 1호인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함께 동북아를 대표하는 불상들이다.

이들 불상을 두고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인간 존재의 가장 청정한, 가장 원만한, 가장 영원한 모습의 표징'이라고 상찬했다. 그리고 최순우 전 국립박물관장은 '너그럽고 고요한 아름다움'을 지닌 성자의 사색하는 모습이라고 했다.

나는 한참 동안 금동여래좌상을 살폈다. 언제 봐도 멋진 작품이다. 이어 영주에서 가장 오래되어 영주의 역사를 말해주는 선사시대암각화를 다시 보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늘 오가던 돌부처상의 바로 아래에 있는 선사암각화는 오랜 기간 동안 영주와 함께한 영주역사의 산증인이다.

대단하다
▲ 안향 영정, 소수서원 현판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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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안향선생 영정, 명종임금이 직접 쓴 소수서원 현판, 유학자들의 일람표, 소수서원의 성적표, 서원과 향교를 비교한 방, 기증 유물전시장, 야외 전시장 등이 있어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그리고 이웃한 '선비촌'을 주마간산으로 둘러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흥선대원군이 머물기도 했다는 무섬마을의 '해우당' 등을 살펴본 다음, 천천히 돌아 나왔다.

주말 마다 공연 중
▲ 선비촌 마당 주말 마다 공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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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소수서원 방문에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화관광해설사인 최인희 선생의 안내를 받았다. 그동안 영주에서 만난 해설사 가운데 최상급으로 재미있고 내용도 알차게 안내를 해 주어 감동받았다.      

최인희 해설사랑
▲ 영주시 최인희 해설사랑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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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영주시, #소수서원, #금성대군신단, #소수박물관, #선비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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