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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 <미치도록 가렵다>의 표지
 김선영. <미치도록 가렵다>의 표지
ⓒ 자음과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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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탉은 시원하게 내뻗은 꽁지깃과 선홍색 벼슬을 찰랑이며 성큼성큼 여유 있는 걸음새로 마당을 거닐었다. 무리 중 가장 화려한 옷을 입었기 때문에 어디에 있든 위세가 당당했다. 암탉은 둥지와 마당을 오가며 쉴 새 없이 꼬꼬댁거렸다. 고개를 여기저기 돌리며 걷는 폼이 제법 연륜이 느껴졌다. 느긋함이 날개 깃털의 빛깔 속에도 녹아나는 듯하였다.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윤기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수수하면서 풍성한 깃털을 하고 있었다. 병아리는 또 어떤가, 연노란 솜털이 바람이 불 때마다 까부라지는 것이 부드러운 융단 뭉치가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그 울음소리는 또 얼마나 앙증맞고 맑으며 생동감으로 넘쳐나는가.

제일 밉상 맞고 볼품없는 것은 중닭이었다. <중략>
 "재, 쟤네들 중닭 뒷목이 왜 저래?"
"가려우니께 땅에 대고 하도 비벼서 털이 빠져 그랴. 털이 나도 모자랄 판에 빠지니 볼품이 있겄어? 병든 닭처럼 보이지?"
"왜 저렇게 비벼대?"
"뼈도 자라고 날개도 자라고 깃털도 자라야 하니께 만날 가려운겨. 미치도록 가려운 거여. 부리고 날개고 등이고 비빌 곳만 있으면 무조건 비비대고 보잖어."
<중략>
"어디에서 어디로 넘어가는 것이 쉬운 법이 아녀. 다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갈 수 있는겨. 애들도 똑같어. 제일 볼품없는 중닭이 니가 지금 데리고 있는 애들일 겨. 병아리도 아니니께 봐주지도 않지, 그렇다고 폼 나는 장닭도 아니어서 대접도 못 받을 거고. 뭘 해도 어중간혀. 딱 지금 니가 가르치는 학상들 아니겄냐." - 김선영 <미치도록 가렵다> 자음과 모음 中에서

열여섯, 16년 전, 난 꼭 열여섯 살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유독 나밖에 몰랐던 것 같다. 모든 것의 중심은 오로지 나였다. 어른들, 친구들을 괴롭혔다. 그때 나는 중닭처럼 미치도록 가려웠다. 뭐 지금도 가렵긴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그래서일까? 지금 중닭들이 나를 괴롭힌다. 김선영 작가의 책을 보고, 나의 삶에 들어온 중닭들이 떠올랐다. 도서관에 자주 찾아오던 임한태(가명). 소위 학교 '짱'이었다. 

학교짱은 다른 이유로 도서관을 찾는다 

한태는 학교 짱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도서관에 자주 찾아왔다. 담임선생님과 상담하러, 학교 봉사활동 차 도서관 청소하러, 옆 교실에서 친구와 싸우다가 잠시 떼어놓기 위해, 도서관으로 꼭꼭 숨어버린 친구들을 찾으러 오는 것 등등이  주된 도서관 방문 이유였다.

한태는 눈빛이 날카롭고 살기가 서려 있었다. 체구는 크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스타일이었다. 가끔 나도 한태의 눈빛에 제압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티는 내지 않았지만. 까무잡잡한 피부는 그 아이의  눈빛을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래서 한태가 도서관에 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한태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도서관 옆에서 수업하시는 분들은 젊은 여선생님이었고, 수업시간에 일이 생기면 한태를 나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한태가 일학년 때는 나름 한태의 독서파일까지 만들어 독서코칭을 해보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형식에 치우치다 2회차를 진행 하던 중 실패하고 말았다. 한태가 더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이유로 도서관에 자주 오던 한태가 3학년이 되어 봄 햇살이 도서관을 따스하게 비치던 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읽을 만한 책 없어요?"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있지. 어떤 책을 볼까???"

책보러 스스로 도서관에, 놀란 선생님들 

한태랑 서가 사이를 누볐다. 천천히 서가 사이를 걷게 하고 싶었다. 나에게 생각할 시간도 필요했다. 이놈을 책의 세계로 끌어들일 만한 책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일단 재미있어야 했다. 뭐 조금 야한 장면이 나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한태의 친구들이 나오는 책이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폭력적인 책은 싫었다. 천천히 서가 사이를 걷다가 김선희 작가의 <더 빨강>이 눈에 들어왔다. 책등을 잡고 한태에게 권했다. 한 손으로 책을 쥐고, 한 손으로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엄청 재미있는 책이라며 빌려주었다. 일주일이 좀 넘었을까? 한태는 책을 들고 왔다.

"선생님, 재밌는데요. 또 없어요?"

무엇이 특히 재미있었냐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한태에게 몇 권의 책을 반복적으로 빌려주었다. 정확히 책 목록이 기억나지 않는다.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한태 이야기가 나왔다.

"황 선생님, 한태가 수업시간에 책을 읽더라고요. 수업 방해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놔뒀어요."
"황 선생. 한태 읽는 책은 괜찮은 책인가?"

의심과 안심 사이의 질문들이 쏟아졌다. 뭐 대충 그렇다고 대답했다. 한태가 점점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아 괜히 뿌듯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건은 2학기에 터졌다. 창문 사이로 찬바람이 들고, 가끔 바닥으로 떨어지기 싫은 단풍이 창문 틈에 걸려 안간힘을 쓰던 시기였다. 3교시였나? 갑자기 복도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선생님 한 분이 한태를 붙잡고 있었다. 수업 시작 전, 한태가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태는 또 도서관을 방문했다.

주먹을 쥐고 도서관을 뛰쳐나가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주먹을 붙잡고 한태의 눈을 쳐다봤다. 책을 빌려달라고 하던 한태의 눈빛이 아니었다. 한태는 내 눈을 보지 못한 채, 창밖을 응시하면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선생님, 정말 죄송한데요. 저 좀 놔두세요. 저 새끼 내가 오늘 죽여버릴 테니까."

그래서 더 놓아둘 수 없었다.

"한태야, 한 번만 더 생각하면서 행동하면 안 될까? 지금은 손을 놓아줄 수가 없어. 엄청 후회하게 될 거야."

그렇게 십 분의 대치상황 속에 잠시 긴장을 풀었다. 그 사이 아이는 도서관을 뛰쳐나갔다. 너무 빨리 달려가 잡을 수가 없었다. 복도에 서 있던 그 친구를 향해 뛰었다.

"야. 임한태. 거기 서."

수업을 받던 아이들 모두가 들을 정도로 큰 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한태는 달렸다. 주먹을 그러쥔 채 그 친구에게 달렸다. 그 친구는 한태가 가까워오자 몸을 피했고, 한태는 친구 다리에 걸려 크게 넘어졌다. 다음날 한태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쇄골이 부러져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며칠 뒤 책과 음료를 들고 병원에 찾아갔다. 궁금했다. 어떤 상태인지. 병원에 가보니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쇄골이 살짝 부러져 뼛가루를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김선영 작가의 <미치도록 가렵다>는 책을 선물해주고 왔다.

"이번에는 다 읽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권해봐라. 알았어?"
"네."

짧게 대답한 한태는 책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책의 간지에 이런 글을 남겼다.

'중닭, 임한택! 엄청 가렵지?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책 읽고, 선생님이랑 가려운 곳을 긁어보자.'

일주일 뒤에 퇴원해 학교에 돌아온 한태는 도서관을 찾았다. 표정이 차분해졌다. 쑥스러운 듯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 한태는 12월 학교 축제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졸업식이 끝나고,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감사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청소년문화웹진 킥킥에 중복 송고



태그:#학교도서관, #사서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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