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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명의 학자들이 참여한 이 행사에서 사드 문제로 양국은 팽팽한 힘 겨루기를 보여줬다
▲ 12월 12일 한중 방안으로 열린 성균관대 세미나 모습 30여명의 학자들이 참여한 이 행사에서 사드 문제로 양국은 팽팽한 힘 겨루기를 보여줬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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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는 한중 학자 30여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학술대회가 열렸다. 중국방안(中國方案, chinese solution)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 행사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는 단연 사드 문제였다.

이날 주제발표나 토론에 참석한 12명의 중국학자들은 모두 사드에 대해 완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사드가 한반도 정치 균형을 무너뜨리는 전략적 문제를 만든다'는 정치적 주장도 있었고, '친하다고 생각했던 박근혜 정부가 순식간에 돌아선 것에 대한 배신감을 느낀다'는 등 감정적인 주장도 난무했다.

반면에 한국 학자들은 정치적 관점이나 자신이 일하는 기관(통일연구원, 세종연구소)의 입장에 따라 사드의 원인이 북핵에 대한 중국의 방조라는 등의 입장을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그나마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가 있었다.

우선 중국이 북한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에 중국 학자들은 반반 정도로 나눠졌다. 이미 북한의 대외수출 90%를 차지하는 만큼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입장이 있었고, 반면에 북한의 정치 행보를 막을 수 없다는 입장으로 갈렸다. 두 나라 몇몇 학자들은 개성공단 폐쇄 같은 강경한 한국 정치의 경색이 북한의 중국 의존을 키운다고도 봤다.

하지만 학술대회에서 어떤 해결책이 나올 가능성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절감했다. 한편으로는 답답한 자리였다. 반면에 점심을 마치고 돌아본 성균관의 한 편액에서 나는 그 해결의 작은 단초를 발견했다. 바로 사신으로 조선에 온 주지번이 쓴 명륜당 편액이다.

중국 사신단 주지번이 전주에 간 까닭

선조 때 황태손의 탄생을 알리는 정사로 온 주지번에 쓴 글이다
▲ 성균관에 있는 명륜당 편액 선조 때 황태손의 탄생을 알리는 정사로 온 주지번에 쓴 글이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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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주 학당에 편액을 쓴 사람은 누굴까? 주지번(朱之蕃 ?~1624)은 평소 기자가 강연 시에 많이 이야기하는 인물인데, 그가 명륜당의 편액을 썼다는 데 놀랐다.

그는 어떻게 해서 명륜당의 편액을 썼을까? 편액을 바라볼 때 오른쪽에는 명나라 만력 병오년 여름(大明萬曆丙午孟夏)이라고 적혀 있으니, 글을 쓴 시기는 서기 1606년(선조 39년)이다. 왼쪽에는 그가 사신단의 정사(正使)로 온 한림원수찬(翰林院修撰)이며 금릉(金陵) 사람 주지번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주지번은 조선과 누구보다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아마 조선이 없었다면 과거에 장원급제 후 정사라는 신분으로 이 땅을 찾아올 인연이 있을 리 만무한 사람이었고, 아마도 도시의 초라한 평민으로 살 수 밖에 없을지 모르는 인물이다. 그럼 어떻게 해서 그의 인생에서 변화가 발생했을까. 이 사건은 그가 조선을 방문하기 14년 전인 1592년(선조 2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 일의 조선쪽 인물은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耉 1556~1620)다. 완주(完州, 지금은 전주·익산) 출신은 그는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584년(선조 17)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해, 1592년 체찰사 정철(鄭澈, 1536~1593)의 종사관으로 베이징을 찾는다.

그가 숙소에서 쉬고 있는데 밖에서 낭랑하게 남화경(南華經, 불경)을 외는 소리가 들렸다. 송영구는 호기심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주지번이 과거에 수차례 낙방해 호구지책으로 막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송영구는 대화로 그가 적잖은 지식을 가진 것을 알고, 제출했던 답안을 써보라고 말한다. 송영구가 답안을 보니 문장은 좋지만 과거의 격식을 갖추지 못한 것을 알고, 조언과 더불어 서책과 공부할 수 있는 비용을 준 뒤 귀국한다.

이 만남이 있은 후 3년 뒤인 1595년(萬曆 23년)에 주지번은 당시 회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예부우시랑(礼部右侍郎)으로 관직을 시작한다. 유교는 물론이고 불경까지 통달했던 주지번은 초굉(焦竤), 황휘(黃輝)와 더불어 3대 학자로 불릴 만큼 빼어난 실력을 선보였고, 1606년에는 다른 신분으로 그의 평생의 은인인 송영구가 사는 나라를 찾은 것이다.

만력제가 황태손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 보낸 사신단의 정사로 온 주지번의 존재는 당시 조정에서도 큰 화두였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을 보면 주지번이 정사로 선정된 후 조정에서는 그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법도를 따라 그가 한양에 머무는 시간에는 여성들의 외출을 금해야 예의에 맞다는 등 다양한 의견이 오간다.

역시 주지번에 쓴 글로 풍패는 한고조 유방이 태어난 고장이라는 뜻이다. 전주가 조선의 개국집안인 이씨집안의 탄생지라는 뜻
▲ 전주 객사 풍패지관 편액 역시 주지번에 쓴 글로 풍패는 한고조 유방이 태어난 고장이라는 뜻이다. 전주가 조선의 개국집안인 이씨집안의 탄생지라는 뜻
ⓒ 전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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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선에 도착한 후 주지번은 다른 무엇보다 일행을 쉬게 하고, 소박한 차림으로 송영구의 고향 완주에 내려온다. 하지만 정작 그가 만나려한 송영구는 당시 청풍(지금의 충북 제천)에 군수로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그는 은인 고향 사람의 요청으로 전주 객사에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편액을, 송영구의 고향인 익산에는 망모당(望慕堂)이라는 편액도 남긴다(신광철의 역사산책 http://blog.naver.com/shinc050 참고).

주지번의 한양에서의 활동도 다양했다. 선조에게는 직접 12화첩의 난죽석도((蘭竹石圖)를 선물하고,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탄 영은문(迎恩門)의 재건시 편액도 써준다. 영은문은 나중에 사대의 느낌으로 인해 철거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는데, 그 편액은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인적인 교류도 활발해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와 교류한다. 이후 허균과는 지속적으로 서신을 왕래하고, 허난설헌의 문장이 중국에 유명해진 것도 주지번의 영향이 컸다.

파국으로 치닫는 한중 관계

한국과 중국간 아름다운 교류의 이야기는 이뿐만이 아니다. 중국에서 실존인물로는 유일하게 4대 불교 명산 중 하나인 지우화산에서 추앙되는 김교각 스님은 신라 왕자 출신이다. 특히 당나라 시기에는 최치원, 혜초, 흑치상지, 고선지 등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후에도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원병을 보내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역관 홍순언의 이야기도 수많은 한중 교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런 교훈이 지금에는 사라졌다. 현재 주중 김장수 대사의 경우 대사관 홈페이지에 올라간 공식 행사가 한달에 한두 차례인데, 그 마저도 대부분 한국 행사일 만큼 한중 교류의 맥이 끊겼다.

12일 성균관대 한중학술대회에서도 중국이 사드로 인해 모든 소통 통로를 잃어버린 안타까움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반면에 학술대회 임에도 서로 간에 날선 주장은 적지 않았다.

상하이 사회과학원 국제문제연구소 리카이셩 연구원은 사드 배치 이전에 "박근혜, 시진핑 간은 연인 사이라 느낄 만큼 사이가 좋다고 중국인들은 인식했는데, 사드 배치가 결정돼 배반이라고 느낄 만큼 충격이 크다. 시진핑 주석도 체면이 많이 구겨졌다"라며 사안의 어려움을 전했다.

지린대 공공외교대학 쑨리핑 부교수도 "사드는 단순한 군사 무기가 아니라, 전략적 무기로 한중간은 물론이고 북한 등 모두가 관여된 만큼 철회하는 게 맞다"라는 입장을 강조했다. 산동대 한중관계연구센터 비앙따 연구원은 "중국은 한반도의 비핵화, 평화, 화해와 협력을 중시하는데, 한국은 북중 관계를 너무 표면적으로 해석한다"며 중국이 북한을 제어할 수 있다는 입장에 반대 의견을 표시했다.

결국 이런 상황이라면 사드의 도입 순간 한중 관계의 대부분은 무너진다. 결국 지금 상황은 등거리 외교에 실패한 병자호란 직전이나 을사늑약 직전 등을 되돌아 볼 수 밖에 없다.


태그:#사드, #중국, #성균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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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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