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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글로벌 반기문 국민협의체 발기인 대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
 지난 22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글로벌 반기문 국민협의체 발기인 대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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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 반기문, '우려'보다 위험한 '노오력왕'의 귀환

지난 기사에서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2기 임기(2012~2016년) 연설문 396만3963자, 200자 원고지 1만6011매 분량의 데이터를 분석해 담론 지형을 살펴봤다. 이를 통해 그의 리더십이 '노력주의 리더십'에 가깝다는 것을 살펴봤다. 그런데 한국인들에게는 경제 문제 말고도 중요한 이슈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안보와 통일이다.

지난해 7월 기자간담회에서 이시종 충북도지사는 "이승만은 '건국', 박정희는 '산업화', 김영삼은 '문민', 김대중은 '평화', 노무현은 '서민'을 떠올리게 한다. 노태우는 '북방외교'의 성과가 있다"라면서 "반 총장이 '통일 대통령'을 내세우면 그냥 (당선) 되지 않을까"라고 내다봤다. 한편 여권은 새누리당 경대수, 박덕흠, 이종배 의원이 반 총장을 면담하고 돌아오는 등 충청 정가는 여야를 막론하고 반기문 대망론에 기대는 모양새다.

지난 2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충청 향우회 중심 지지모임 2개가 공식 출범하는 '글로벌 반기문 국민협의체'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반 총장과 연고가 있는 임덕규 월간 <디플로머시> 회장, 이언구 전 충북도의회 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통일 대통령'을 염두에 둔 통일 대책 싱크탱크 '평화 포럼' 운영도 결정됐다.

물론 이들에게 돌직구로 "충청 지역주의 아니냐?" "사실상 사전 선거 운동 아니냐?"라고 묻는다면 하나같이 손사래를 칠 것이다. 최근 결성 중인 반기문 지지 모임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을 반 총장의 리더십과 명성을 믿고 모인 "자발적인 사람들"이라고 강조한다. 판단은 독자들께 맡긴다. 이 글은 '통일 대통령 반기문'이라는 이미지를 검증하는 데 집중한다.

반기문과 박근혜의 대북정책, 과연 다를까

<그림1>유력자 탐색 지도. 점의 크기는 단어의 사용 빈도수를, 선의 굵기는 공동 출현 빈도수를 나타낸다. 빈도수에 따라 영향력이 높은 단어는 권력 중심성(아이겐 벡터 중심성)이 높아진다. 이 그림 상에서 엣지는(선) 보다 간명한 시각화를 위해 편의상 상위 600개까지만 표시했음을 밝혀둔다.
 <그림1>유력자 탐색 지도. 점의 크기는 단어의 사용 빈도수를, 선의 굵기는 공동 출현 빈도수를 나타낸다. 빈도수에 따라 영향력이 높은 단어는 권력 중심성(아이겐 벡터 중심성)이 높아진다. 이 그림 상에서 엣지는(선) 보다 간명한 시각화를 위해 편의상 상위 600개까지만 표시했음을 밝혀둔다.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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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6일 제주포럼 개막식 기조 연설에서 반 총장은 대북 정책에 대해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또 개인적으로도,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기여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방향은 무엇일까. 개막식 전날 제주 롯데호텔에서 열린 관훈클럽 간담회에서 그는 이렇게 밝혔다.

"대북 압박을 계속 해나가면서도, 인도적 문제로 물꼬를 터 가며 대화하고 긴장을 완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입장은 얼핏 박근혜 정부의 기존 대북 정책보다 전향적인 듯 보인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이 진정성 있는 비핵화 제스처가 없는 한 남북 대화와 인도적 지원은 시기 상조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북한의 남북 군사 회담 제안을 거부해왔다.

북한의 취약계층 지원은 계속해 나갈 것이지만 보다 넒은 지원의 재개 시점은 신중히 고려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반 총장의 '투 트랙 대북 정책'이 박근혜 정부의 '선 비핵화, 후 지원 대북 정책'과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지난 연재에서 분석한 반 총장 2기 연설문 중 '북한(DPRK)'이 포함된 것들만 뽑아 상세 분석을 해봤다. 13만6263자, 200자 원고지 548매로 장편소설 반 권 정도 분량이다.

분석에는 R, 시각화에는 노드엑셀 등의 도구를 사용했다. 우선 담론 지형을 살펴보기 전에 '문서' 단위로 사용 빈도수와 영향력이 높은 키워드(유력자)부터 찾아봤다. 이를 통해 반 총장이 주로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위 <그림1>을 보면 역시 '북한'이 포함된 연설문들이다 보니 자연스레 가장 많이 언급했고, '핵실험' '결의안' '안보리' 등 주로 '한반도'의 '안보' 이슈에 관한 단어들도 많이 언급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지난 기사에서 확인한, 반 총장 연설문 전반에서 나타나는 '나라' '공동체' '세계' 등의 일부 일반 명사들은 잠시 예외어 처리했다. 그런데 특기할 점이 있다. 다른 단어들은 주로 안보 이슈와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도움' '지원' '격려'처럼 호의적인 제스처와 관련이 있을 법한 단어들이 출현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반 총장이 지난 5년간 일관성 있게 '투 트랙 대북 정책'을 추진해온 것일까.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그렇다고 보기 힘들다.

국제적 왕따가 된 '도움' '지원' '격려'

<그림2> 반기문 담론 지도.
 <그림2> 반기문 담론 지도.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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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문의 모든 말이 북한과 관련됐다는 보장은 없다. 이래서는 반 총장의 평소 행보를 제대로 추적 못 한다. 그래서 연설문을 '문단' 단위로 쪼개고, '북한' '남한' '한국' '서울' '평양'처럼 지역을 나타내는 말과 '핵' '실험' '조약' 그리고 이와 상반되는 분위기의 '도움' '지원' '격려' 각각의 것들과 연관성이 20% 이상인 단어 149개로 사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사전을 바탕으로 단어들 사이의 연관 규칙을 분석했다. 이러면 좀 더 면밀히 담론 지형을 살펴볼 수 있다. 그 결과 추출된 담론 지도가 위 <그림2>다. 일단 11~12시 방향의 연두색 대륙에 주목해보자. 뭘 말하고 싶은 지가 분명하다. 북한의 탄도 미사일, 핵 실험을 비난하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결의안을 수용하라는 압박이다.

반 총장이 너무 '우려'만 표한다는 대중의 직관을 다시 증명하듯 북핵에 우려를 표하는 입장도 깨알같이 드러났다. 핵, 무기와 관련된 국제 조약은 많지만 반 총장이 북한을 압박할 때 사용하는 주무기는 NPT(Non Proliferation Treaty), 즉 비확산 조약이다. 조약의 취지는 핵무기 비보유국은 핵무기를 못 갖게, 핵무기 보유국은 비보유국에 핵무기를 제공 못 하게 하는 것.

이 조약은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니라서 가입 후 임의 탈퇴는 허용되지 않는다. 단 주권을 행사 못할 만큼 비상사태에 처했음을 모든 회원국들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통고 및 설명하면 가능한데(제10조 제1항), 납득해주느냐는 외교적 역학 관계로 판가름 난다. 북한은 2003년 1월 NPT 탈퇴 선언 이후 줄곧 그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 하고 있다.

그래서 핵, 미사일 실험을 하며 계속 이 질서에 도전하고 있고, 그때마다 더 유엔 결의안으로 경제 제재를 동반한 압력을 받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반 총장은 지난 10년간 유엔의 수장으로서 북한을 주로 압박하는 입장이었다. 그럼 다른 한편으로는 투 트랙 대북 정책으로 국제 사회가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도움' '지원' '격려'를 하도록 하지는 않았을까?

7시 방향을 보자. 이 세 단어는 북한과 유기적인 연결을 갖지 못 한다. 원래 지도에서조차 사라졌지만 시각화 과정에서 표시만 해봤다. 그렇다. 늘 긴장이 감도는 한반도에서 어색하게 선 이 세 단어, 다시 말해 북한에 대한 '도움' '지원' '격려'는 곧 국제적 왕따다. 반 총장은 대북 정책에서 만큼은 이들을 철저하게 소외시켜왔다(참고로 연설문에서 '도움' '지원' '격려' 등이 많이 언급된 건 주로 시리아 등 때문이었다).

반 총장이 '통일 대통령' 만들기, 과대평가 혹은 기회주의

지난 2014년 1월 29일 오전 경기 파주시 판문점에서 북한군 경비병들이 판문각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
 지난 2014년 1월 29일 오전 경기 파주시 판문점에서 북한군 경비병들이 판문각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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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지난 몇 년간의 행보에 근거해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반 총장의 대북 정책은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에 비해 기름칠이 돼 있을 뿐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반 총장이 지난해 5월 아시아 리더십 포럼에서 "저는 박근혜 대통령께 인도주의 문제를 정치와 완보 이슈와 분리할 것을 추천드린다"라고 하면서도 "박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 구축 프로세스'를 전적으로 지지한다"라고 했던 말이 새삼 모순되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다.

박 대통령의 '신뢰 구축'이 추상적일 뿐 실체가 없고 긴장만 남겼듯, 반 총장의 담론 지도에서 '도움' '지원' '격려'가 외딴 섬처럼 떨어져 있는 것도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분석을 하기 전에 연설문을 모두 검토했지만, '인권'이나 '인도주의'처럼 보다 가치지향적인 단어들을 포함시키면 북한 당국을 향한 비난이 배가 될 분 그 역은 참이 아니었다.

반 총장의 행보는 북한 주민들의 상황을 우려하면서도, 북한 '당국'에게 전향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촉구'하는 정도에 그칠 뿐 실질적인 지원으로는 잘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반도 신뢰 구축 프로세스의 이면에도 보수적 외교 관점의 (역설적이게도) 불신이 깔려있다. 대북 지원을 하면 북한 당국이 배신을 해 쌀을 핵으로 바꿔 평화를 위협할 것이라는 발상에 묶여 햇볕 정책을 실패로 규정하고 5.24 조치조차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보수적 외교 관점에서의 신뢰 프로세스란, '내가 너를 못 믿겠으니 믿을 수 있도록 먼저 진정성(비핵화)을 보여봐라' 정도로 요약된다. 하지만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 물론 핵무기 개발과 도발은 옳지 않다. 그런데 신뢰는 때로는 정치적 올바름 이전의 문제일 수 있다. 북한의 행동은 분명 옳지 않지만 '믿을 수 없다고 비난 말라, 너희는 언제 한 번 믿을 만한 자들이었느냐'라고 되묻는다면 국제 사회도 반 총장도 명분이 약해지는 부분이 있다.

지난 21일(현지시각) 미국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 묘소를 방문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링컨 흉상의 코를 만지고 있다.
 지난 21일(현지시각) 미국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 묘소를 방문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링컨 흉상의 코를 만지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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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T와 유엔이라는 조직이 품고 있는 모순 때문이다. NPT가 불평등 조약이고, 유엔이 강대국들이 실권을 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NPT는 핵 비보유국들의 핵무장을 막기 위한 것일 뿐 정작 핵보유국은 핵 무장을 해제하도록 강제하지도 않으며 뚜렷한 성과도 없다. 그저 점진적인 군비 감축을 통한 '노력'을 요구할 뿐이다. 유엔 역시 안전보장이사회 5개국(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이 실권을 쥐고 있다.

따라서 사무총장이 변수를 만들 수 있는 일은 말의 힘을 활용해 강대국들을 압박해 군비 감축을 유도하고, 분쟁·재난·빈곤 지역 등을 찾아다니며 국제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 정도다.

공평히 접근하면 북한을 비판할 때 NPT와 유엔 체제의 가장 큰 수혜자인 미국도 함께 비판해야 옳다. 하지만 반 총장이 미국을 콕 집어 말한 적은 2013년 1월 18일 "이것(핵 감축)은 가장 큰 핵무기 보유국인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깊이 있는 협의에서 시작돼야 한다"라고 한 발언 등 몇몇 드문 사례, 그것도 권고 수준에 그친다.

물론 반 총장이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고 단정 짓는 것은 지나치게 박하다. 10년 임기는 강산도 변할 만큼 긴 시간이고 코트디부아르 내전 파병처럼 부분적인 성과도 나오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통일 대통령' 운운하는 것도 지나치다. 그간 대북 행보로 볼 때 그런 평가에는 명성 말고는 정확한 근거가 없다. 그의 노력은 기본적으로 강대국들이 재편한 질서 안에서 이뤄졌지 어떤 '변수'를 적극 만들어내는 성격의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귀국 후 방북 같은 이벤트가 있을 수도 있지만, 최근 북한 <노동신문>이 반 총장을 "친미에 환장한 특등주구" "권력 미치광이" "정치 간상배" 등으로 강도 높게 비난하는 것으로 알려져 이조차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 지금 반 총장을 '통일 대통령' 감이라고 칭송하는 사람들은 무슨 근거로 그러한 주장을 하는 걸까. 과대평가? 기회주의? 곧 답은 나온다.


태그:#반기문, #북한, #핵실험, #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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