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 기사 한눈에

  • new

    그는 <지방시>로 대학에서 시간강사, 행정 조교 생활을 하며 알게 된 대학 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그는 이제 대학에서 나왔다. 대학 대신 다른 사람의 운전석에 앉았다. '먹물
이 글은 <대리사회>(김민섭, 와이즈베리, 2016)를 읽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기자와 대리기사를 하는 저자가 우연히 만났다는 상황을 설정해 작성한 서평입니다. - 기자 말

"혹시 시내로 나가는 버스 없죠? 걸어서는 얼마나 걸릴까요?" 아무도 찾지 않는 새벽에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와 한 남자가 물었다. 그의 온몸은 땀에 젖어 있고 한 손은 핸드폰, 다른 손으론 방금 산 캔커피를 꼭 쥐었다. 그가 이 동네에 처음 왔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이 동네는 이른 저녁만 되면 시내로 오가는 버스가 모두 끊긴다.

걸어서 얼마나 걸리느냐 묻는 말에 여기 20년 넘게 산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걸어서 갈 수 있다는 상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걸어가면 첫차 타는 거랑 비슷하게 도착할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는 깊게 한숨 쉬며 "네, 감사합니다" 하고 도시락을 샀다.

자신의 틀을 만들고, 스스로 사유해야 한다

그는 불안한 눈빛과 허둥대는 손으로 핸드폰을 더듬었다. 아무리 새로고침을 눌러도 없는 버스가 생길 수는 없었다. "오늘은 여기서 사망이네요." 새벽 3시였다. 나는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책을 읽고 있었다. <대리사회>(김민섭, 와이즈베리, 2016)였다. '사망한' 대리기사는 내가 읽고 있던 책을 보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대리기사 김민섭입니다." 손님이 없는 새벽 편의점에서 저자와 독자의 만남이 시작됐다.

<대리사회>, 김민섭, 와이즈베리, 2016
 <대리사회>, 김민섭, 와이즈베리, 2016
ⓒ 와이즈베리

관련사진보기


<대리사회>를 쓴 김민섭씨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309동 1201호, 은행나무, 2015)(이하 <지방시>)로 유명하다. 그는 <지방시>로 대학에서 시간강사, 행정 조교 생활을 하며 알게 된 대학 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그는 이제 대학에서 나왔다. 대학 대신 다른 사람의 운전석에 앉았다. '먹물'이었던 그가 대리기사가 됐다.

대학을 세상의 전부라 믿었고, 거기에서 나오면 세상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오히려 대학에서의 10년보다, 거리에서의 1년이 더욱 가치 있었죠. 강의실과 연구실은 대학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대학은 이 사회의 일부일 뿐이었어요.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의 욕망을 최전선에서 대리하며 그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대리인간으로 만들어내는 '대리공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8쪽)

저자는 노동의 본질은 대리라고 말한다. 노동이란 '내가 하기 힘들거나 하기 싫은 것들을 타인에게 시키는 것'이라고 저자는 정의한다. 내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것도 그렇다. 가끔 내가 편의점을 경영하는 주인인 양 착각한다. 점장은 본인을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한다. 사실 나는 편의점 주인도 아니고, 점장은 내 삼촌도 아니다. 나는 대리인으로서 존재한다. 대부분 사람은 노동현장에서 대리인간일 수밖에 없다. 우리 대리인간들은 어쩌란 말인가?

자신의 틀을 만들고, 스스로 사유해야 해요. 끊임없이 불편해하고, 의심하고, 질문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강요된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 믿으며 타인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죠. 온전한 나로서 사유하고, 또 주변의 또 다른 나를 주체로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10, 11쪽)

그는 대리기사로 일하면서 타인을 주체로서 일으켜 세우는 이들을 만났다고 한다. "선생님 차라고 생각하고 운전해 주십시오", "(통화 중, 아내에게) 대리기사님 오셔서 가고 있어"라고 말해주며 대리운전기사를 주체로 대해주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많은 대리운전 특성상 대개가 술에 취한 손님이다. 진상손님도 많았을 것 같은데.

두 개 이상의 대리운전 회사에 전화를 하고 먼저 오는 기사와 함께 가는 손님들이 있어요. 내가 먼저 도착하든, 늦게 도착하든, 몹시 화가 나죠. "아이고, 아저씨가 먼저 오셨네, 갑시다" 하는 그들에게 "그러지 마세요. 당신 때문에 누군가는 여기로 뛰어오고 있어요" 하고 말해 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았고, 결국 저는 언제나 목적지까지 그들을 태워다 줬죠. (93쪽)

내가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영화관 아르바이트는 영화가 끝나기 3분 전에 상영관으로 들어간다. 영화가 끝나면 관객들을 출구로 안내한다. 어김없이 영화가 끝날 무렵 나는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영화가 끝나길 기다리는데, 한 아이와 엄마가 뒤쪽으로 나왔다. 엄마는 아이의 바지를 내렸고 콜라잔을 가져다 대고 소변을 받았다. 그 공간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나는 '이러지 마세요, 바로 앞에 화장실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조용히 콜라잔을 버렸다.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저자는 '주체로서 사유할 자유'를 잃는 곳은 타인의 운전석뿐만이 아니라고 한다. 대학 강의실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일상의 대화에서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고, 사유하고 판단하는 과정을 거쳐, 말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체와 주체가 아닌, 주체와 피주체의 대화는 일방적입니다. (32쪽)

교수자가 강의실의 유일한 주체가 되어 말을 쏟아내는 순간 그 안의 학생들은 타인의 운전석에 앉은 대리기사가 되어버립니다. 스스로 사유하기를 멈추고 영혼 없는 대답만 기계적으로 하게 돼요. 그런 그들이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는 질문에 주체적으로 답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죠. 학생들은 강의실 밖으로 나오며 오히려 사유와 발화의 자유를 되찾아요. 마치 운행을 마친 대리운전 기사처럼 다시 온전한 몸으로 돌아옵니다. (34쪽)

'우리나라가 북유럽국가처럼 복지국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이런 대학 시험 문제에 정말 내 생각을 쓰면 안 된다.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취한 입장을 잘 기억해야 한다. 짧고 쉬운 글이 좋은 글이라는 말도 의미 없다. 답안지를 작성할 때는 무조건 길게 늘여서 써야 한다. 몇몇 교수들은 답안 내용은 읽지 않고 분량만 보고 점수를 매긴다는 말도 있다. 그냥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해서 길게만 썼는데도 좋은 점수를 받은 적도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또 다른 사람이 땀에 젖은 채 핸드폰을 쥐고 어쩔 줄 몰라하며 편의점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마치 친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더니 '함께 갑시다'라고 했다. 저자도 일어날 준비를 했다.

삶의 무게는 힘겹지만, 어떻게든 그 누구도 넘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당신도 저도 잘 버텨내기를 바랍니다. (152쪽)

편의점에 신문이 도착했다. 쓰레기 수거차가 다녔다. 대리기사 김민섭은 핸드폰과 캔커피를 꼭 쥐고 일어났다. 대리기사들은 편의점 문을 열고 나갔다. 그들은 정말 시내까지 걸었을까, 근처 PC방으로 향했을까. 시내로 나가는 첫차가 와야만 그들은 대리가 아닌 주체로서 돌아갈 수 있었다. 나도 그랬다. 첫차가 오려면 아직 멀었다.


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와이즈베리(2016)


태그:#대리사회, #김민섭,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지방시, #나는지방대시간강사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