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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설마다 듣는 '덕담'. 이제는 덕담에도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매년 설마다 듣는 '덕담'. 이제는 덕담에도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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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덕담'에서 경험하는 것

언젠가부터 매년 설 즈음 여기저기서 덕담 듣는 이들의 스트레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10년 전 쯤부터는 꾸준히 비슷한 언론 기사들을 본 것 같은데, 기사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덕담이 '꼰대질' 혹은 '잔소리'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구인구직 사이트 A의 2014년 조사에서 '덕담을 가장해 아픈 곳을 콕콕 찌르는 잔소리'가 대학생의 명절 스트레스 유발 요인 중 2위(14.7%)를 차지했다는 점도 이 문제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나는 최근 인상적인 경험을 했는데, 이 글을 위한 아이디어를 수집하기 위해 페이스북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 그룹에 일반적인 덕담 사례를 알려달라는 게시물을 남겼더니 잔소리를 들었다는 댓글이 수십 건 달린 것이다. 적어도 내 주변에서 '덕담'은 더 이상 덕스러운 일을 비는 좋은 말씀이 아니게 되었다.

덕담에 대한 나의 경험도 A 사이트의 설문에 응답한 대학생들이나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 회원들과 다르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내가 주로 들었던 덕담은 '공부 잘 해라', '좋은 학교 가라', '친구 잘 사귀고', '동생들하고 우애 있게 지내고', '좋은 직장 들어가라', '결혼할 사람 데려오고' 같은 것들이었다. 때때로 덕담에 'XX네 아들은 은행 들어갔다던데' 같은 말이 양념처럼 따르기도 했다.

아마 집안 어른들은 본인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최선의 삶을 떠올리며 덕담에 사용할 문장을 골랐을 것이다. 그들에게 좋은 학벌, 돈 잘 버는 안정된 직장, 화목한 가정, 대를 이을 후손의 존재는 안락한 삶의 구성요소이자 평생 추구해 온 목표였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언어들을 되새길 때면 마음이 아프다. 내 삶은 대부분의 순간 그 덕담이 원하는 상황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씨 집안의 손자는 공부를 잘 하지 못해서 고향 어르신들의 친구들이 알 만한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고, 직장인지 아닌지 애매한 시민단체에서 일한다더니 그것도 오래 못 가 그만두었고, 30대 중반의 나이에 결혼 계획은 생각도 못 하고 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축복의 말인 덕담을 저주로 바꾼 것이다. 집안 어른들의 상상력 안에 있는 이상적인 삶이 현재의 나에 대한 기대로 작용할 때, 나는 기대를 배신하는 자식 혹은 노력도 하지 않는 골칫덩어리가 된다. 나는 졸업-직장-결혼-출산으로 이어지는 '안정된 삶'으로 진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설명하려 노력했지만, 그 말은 명절 가정의례 순서 중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나는 매번 명절 식탁을 박차고 나와 혼자만의 공간에 누워 있고 싶은 기분에 휩싸인다.

왜 우리의 덕담은 '축복'이 될 수 없을까

왜 우리의 '덕담'은 '축복'이 되지 못할까.
 왜 우리의 '덕담'은 '축복'이 되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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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한 축복의 말이 왜 통하지 않는가? 그것은 기존의 체제가 더 이상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를 졸업하면 자연스럽게 직장을 얻고, 직장을 얻으면 당연히 생활을 이어갈 만한 임금을 받는 세상은 종말을 고했다. 인턴은 쉽게 버려지고 알바는 근근이 살아가고 프리랜서 계약은 가볍게 끝나며 정규직은 다 갚을 날이 보이지 않는 빚의 산을 오른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은, 요컨대 한 시대의 끝이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시대는 혼란의 시기인 동시에 세상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 출현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 되는 예수의 활동, 서구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요한의 묵시록>을 내세우며 일어났던 '천년왕국' 운동들,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정감록>류의 도참사상이 좋은 예이다.

이 운동의 주도자들은 기존 시대의 끝을 선언하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예수는 이전 시대에 가난했던 이들이 새 시대에는 복을 받는 이들이 된다(루가의 복음서 6:20)고 선언하며 그의 운동을 이끌었다. 조선 중기 경기 북부에서 활동했던 한 집단은 '석가'에 의해 운영되는 잘못된 세상을 '미륵'의 세상으로 고친다며 사람들을 모았고, 길일을 택하여 한양으로 진격하기도 했다.(참조: 한승훈, "조선후기 혁세적 민중종교운동 연구-17세기 용녀부인 사건에서의 미륵신앙과 무속" -서울대학교 대학원:석사논문, 2012)

설날의 덕담과 앞서 언급한 두 운동의 메시지는 상상할 수 있는 한 최고의 복을 빌어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지만, 듣는 사람에게서는 마음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한 쪽의 복은 세상의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을 실패자로 낙인찍고 좌절감을 유발하는 반면 다른 한 쪽의 복은 세상의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이 연대하게 하고, 주체적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힘을 부여한다.

새로운 덕담을 상상하기

역사의 교훈은 우리가 처한 위기를 헤쳐 나갈 길을 알려준다. 우리는 덕담이 필요 없다는 말을 넘어, 새로운 덕담을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새로운 덕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전의 세계에서 복을 받지 못한 이들 뿐이다.

우리는 이 시대에 가장 박복했던 이들의 이름을 안다. 황유미, 백남기, 세월호 희생자와 미수습자들,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의 희생자, 그리고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영세 자영업자, 알바 노동자, 일 못하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은 우리의 덕담이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나는 설날 덕담이 애써 외면하려 했던 이들에게,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이 글의 독자들에게 덕담을 건네며 주어진 지면을 마무리하려 한다.

'올해에는 근로기준법 준수되는 나라에 사는 복을 받으십시오.'
'올해부터는 대학 등록금을 나라에서 사는 복을 받으십시오.'
'올해 시간당 최저임금이 만 원으로 오르는 복을 받으십시오.'
'올해부터는 남들보다 못나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세상에 사는 복을 받으십시오.'
'올해부터는 성적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복을 받으십시오.'
'올해는 세월호 침몰을 방치한 사람들이 다 죗값을 물게 하는 정부를 만나십시오.'


하나씩, 우리가 얻어내야 할 것들을 상기하자. 그리고 끊임없이 서로 덕담을 주고받자. 올해는 새로운 세상이 온다고, 그 세상은 우리가 손을 잡을 때 시작된다고.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페이스북 그룹 '일 못하는 유니온' 운영자입니다.



태그:#설날, #덕담, #최저임금, #등록금, #명절_스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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