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들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각인되었습니다. 한국어로 쓴 시이기에 의미를 알기는 어렵지만 그림 하나하나가 말해주는 무언의 목소리를 들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한국화의 강렬한 색채로 그려낸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이미지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귀국해서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해 공부해볼 생각입니다."
오오사토 히로아키 (大里浩秋, 일본 가나가와대학 명예교수) 교수의 '불굴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 33인 시화전'을 둘러본 소감은 간략했으나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전시회'를 본 소감치고는 정확하게 본 듯하다. 오오사토 교수는 전날인 22일 인천대학교에서 열린 '중국관행연구포럼'에서 <일본 외국인 거류지 연구회의 활동>을 알리기 위해 방한했으며 짬을 내어 인천관동갤러리에서 열고 있는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어제(24일, 금요일)부터 인천관동갤러리(관장 도다 이쿠코)에서는 제98주년 3·1절 기념 "불굴의 여성독립운동가 33인 시화전" 이 한 달간 예정으로 전시에 들어갔다. 시화전이나 그림전에서 흔히 하는 '개막식' 같은 행사 없이 조촐하게 '불굴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그린 그림 33점이 갤러리에 걸렸다. 개막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날 개막식은 첫 손님인 오오사토 히로아키 교수와 갤러리 관장 그리고 그림을 그린 이무성 한국화가와 시를 쓴 기자 이렇게 넷이서 개막식을 연 셈이었다.
일제의 침략에 온몸으로 저항한 여성독립운동가를 들라하면 '유관순'에 그치고 마는 현실이지만 유관순 못지않게 활약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알리기 위한 전시회에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히 냉담하다. 그러다 보니 그 흔한 '개막식' 같은 것은 꿈도 꿀 수없는 일이 되어 버렸고 그림을 전시할 공간을 구하는 일도 쉽지 않다.
벌써 몇 해째 무료로 자신의 갤러리를 제공해주는 도다 이쿠코(戶田 旭子) 관장이 아니라면 여성독립운동가를 알리기 위한 그림 전시회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온 몸으로 일제에 저항하며 되찾은 조국의 영광을 마음껏 누려보지도 못한 채 유관순처럼 열여덟 나이로, 또는 20대, 30대, 40대 심지어 김락 애국지사 같은 분은 57살의 나이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지만 유독 우리사회는 숭고한 삶을 살다간 여성들에 대해 인색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여성독립운동가를 알리기 위해 기자는 오래전부터 한분 한분에 대한 발자취를 찾아 헌시(獻詩)를 써왔다. 그 시를 이미지화 해준 분은 이무성 한국화가다. 이번에 관동갤러리에서 전시하는 그림은 이 화백이 그린 60점 가운데 33점을 고른 것이다. 특히 33점 가운데 제주의 독립운동가 부덕량, 상해 인성학교 교육자인 김윤경, 평양의 비밀결사조직인 송죽회를 이끈 김경희 애국지사를 포함한 10점은 이번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그림들이다.
갤러리 관장과 기자는 전시가 있기 하루 전날인 23일(목), 둘이서 서른 세분의 그림을 전시장에 걸었다. 그리고 한분 한분의 삶을 되새기며 눈시울을 붉혔다. 일본인인 도다 이쿠코 갤러리 관장이 흘리는 눈물이 사죄의 눈물이라면 한국인인 기자가 흘리는 눈물은 이분들을 챙기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무관심에 대한 안타까움의 눈물이었다.
의자를 밟고 올라가 한 작품 한 작품씩 길이를 조절하고 조명을 맞추면서 기자는 생각했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만주 벌판에서, 블라디보스톡에서,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 뒷골목에서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헌신했던 여성'들의 그림만이라도 밝고 환한 조명을 비춰주고 싶었다.
이름도 그 행적도 알려지지 않은 채, 그 '여성'들은 우리 곁을 떠나갔다. '영웅'이 난무하는 시대에 결코 그 '여성'들은 '영웅' 이 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썩지 않는 돌비석에 이름 석 자가 새겨지길 바라고 한 일은 더욱 아니다. '정의'라든가 '불의'와 같은 후세 사람들의 '발림말'에 오르내리길 원한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믿는다. 적어도 기자가 지금까지 120분의 여성독립운동가의 행적을 찾아다닌 결과는 그러하다.
"국자가 소영촌 찾아가는 길 / 옥수수 드넓은 밭 그 어디쯤 / 임의 발자국 찍었을까 / 선바위 모퉁이 돌아 / 북간도 명동촌 내디딘 걸음 / 별헤던 시인 난 동네 / 재잘재잘 소꿉동무 모아 / 무지개 꿈 심어주던 임을 그리며 / 이제는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져 / 황량한 명동촌 / 그러나 또 다시 맞이할 / 봄을 그리며 / 이끼 낀 명동학교 뜰을 걸었네 -이윤옥 '윤동주 고향 북간도 명동촌 교육가 이의순'-
이 시는 몇 해 전 가을, 이의순 여성독립운동가의 활동 무대를 찾아 나섰던 북간도 용정에서 쓴 시다. 지금은 사라진 옛 지명을 들고 이의순 애국지사가 활동했던 국자가 소영촌을 헤매다 한글로 쓰여 있던 '소영촌' 마을 이름을 보고 와락 눈물이 났던 기억은 지금도 잊지 못할 일이다. 그렇게 한 작품 씩 써내려간 시에 이무성 화백은 생명력 있는 그림을 그려주었다. 이번 전시는 그렇게 그려진 33작품을 전시하는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다가오는 3ㆍ1절, 전국에서는 이 날을 기억하기 위해 숱한 행사를 준비 중이다. 대부분 국가나 지자체의 예산으로 1회성 행사에 치중하는 행사들을 볼 때마다 아쉬운 생각이 든다. 어린 학생들에게 흰 저고리, 검정치마를 입혀 태극기를 들고 거리를 뛰어다니게 하는 게 '3ㆍ1 만세운동' 기념행사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이제는 무엇인가 차분히 선조들의 행적을 되돌아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져야하지 않을까? 그래서 올해도 기자는 주목받지 못하는 여성독립운동가 33인을 골라 시화전을 열기에 이른 것이다. 말 한 필을 위해 수십억 씩 눈먼 돈들이 유령처럼 떠도는 사회의 한 구석, 길찾개(네비게이션)에도 뜨지 않는 인천의 작은 갤러리 벽면에는 그래도 외롭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모처럼 환한 조명을 받으며 웃고 있다.
부디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전시장을 들려주길 갤러리 벽에 걸린 시화는 원하고 있다. 구태여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일에 남성과 여성을 가를 필요는 없지만 유독 더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독립운동가를 위한 시화전'을 마련한 시인이자 기자로서 독자에게 호소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 전시안내
* 2017년 2월 24일(금)~4월23일(일) 전시기간 중
<금토일 10:00~18:00 개관, 특별한 경우 조정 가능>
* 인천관동갤러리: 인천시 중구 신포로31번길 38 (관동2가4-10)
<1호선 인천역에서 중구청 또는 동인천역에서 신포시장 쪽으로 걸어 15분>
* 전화: 인천관동갤러리 : 032-766-8660
* 주최 : 한국문화사랑협회(서울시비영리단체 제1259호) 02-733-5027 / 010-4808-9969
- 이번에 전시된 33분의 시화를 그리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시를 읽고 이미지화 하는 작업이 무척 어렵다. 유관순처럼 잘 알려진 인물이라면 몰라도 이번에 전시된 33분의 여성독립운동가들은 그 이름 석 자도 생소한데다가 그 활동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생각해야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시와 어울리는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이미지 구상만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 지금까지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시화는 몇 점 그렸나? 어떤 계기로 그리게 되었는지?"화업(畵業)은 올해로 59년째다. 이윤옥 시인의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6권》의 삽화를 2011년부터 그렸으니까 햇수로 7년째다. 이 시인이 혼자서 여성독립운동가를 발로 찾아다니며 책을 쓰는 것을 보고 그림으로라도 동참하고 싶어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 시인이 현재 쓴 시가 120분이므로 이들 모두를 그리려면 앞으로도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여성독립운동가를 그리는 작업은 아직 진행형이다."
- 이 작품들은 해외에서도 전시회를 했다고 들었다. 어디에서 전시회가 열렸나?"지난 2014년 1월 29일부터 3월 30일까지 도쿄 고려박물관에서 제1회 전시회를 3개월간 열었다. 또한 제2회로 2016년 11월 3일부터 올해 1월 29일까지 역시 고려박물관에서 성황리에 연 바 있다. 한편 호주 시드니 한국문화원에서 2014년 11월 5일부터 22일까지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을 열어 동포사회에 큰 관심을 끌었다."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를 시화로 알리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을 본 사람들이, 시가 갖고 있는 정서와 그림이 갖고 있는 이미지가 서로 만나 여성독립운동가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시화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나라를 빼앗겼지만 반드시 광복을 이루겠다고 불굴의 정신으로 뛰어든 한국 여성들의 강인한 정신과 애국심에 나 자신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람들이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지만 과거 일제 침략기에 온몸을 불사른 한국여성들의 독립운동이야말로 '두 번 다시 이 땅에 전쟁과 침략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음을 시와 그림을 통해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특히 2019년은 3ㆍ1 만세운동 100돌이 되는 해다. 이 해에 100분의 여성독립운동가의 시화를 나라안팎에서 전시하는 것이 작은 희망이다. 100점을 모두 걸 수 있는 넓고 환한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다. 한 번도 화려한 조명을 받지 못했던 여성독립운동가들이지만 100주년이 되는 2019년 3월 1일 만큼은 한국은 물론 세계사적으로 보기 드문 한국여성들의 불굴의 의지를 시화로 세계만방에 알리고 싶은 마음이다."
덧붙이는 글 | 신한국문화신문에도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