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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영원할 것만 같던 성공, 번영신화의 상징 - 미국의 금융 시스템이 무너졌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났고, 겉으로는 많은 사람들의 상처가 회복되고 다시 번영의 길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허나 IMF 사태가 드리운 그늘이 아직 한국사회 곳곳에 사라지지 않고 깊게 배어있는 것처럼, 지난 금융위기가 만들어낸 어둠은 아직까지 미국과 전 세계에 짙게 머물고 있다.

사회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었고, 실질 경기는 여전히 불황인 데다가 당시 직장을 잃고 재산을 날린 수많은 서민들의 고통 역시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소수의 후진국 이야기가 아니라, 당장의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상황이 그러하다. 제대로 된 예측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참혹한 대가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의 목소리에 제대로 귀기울여주지 않아도 계속해서 경고의 사이렌을 울리던 이들이 분명 존재했다. 2013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예일대의 로버트 쉴러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고, 여기서 이야기할 책 <폴트 라인>의 저자인 라구람 G.라잔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라구람 G.라잔 지음, 김민주/송희경 옮김
 라구람 G.라잔 지음, 김민주/송희경 옮김
ⓒ 에코리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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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문제가 가시화되기 몇년 전부터 계속해서 심상치 않은 리스크의 전조와 지속 불가능한 월가(街)식 돈놀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왔고, 더 늦기 전에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번영의 시기 정부, 민간 그리고 학계와 일반 시민들까지 그들의 비관론을 진지하게 듣는 이들은 많지 않았고, 그 대가는 이제 누구나 아는 파국으로 이어졌다.

모든 것이 크게 잘못된 이후에야 사람들은 부랴부랴 예언자들을 찾기 시작했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기 시작했다.

<폴트 라인>에는, 2008 금융위기의 발생 원인부터 그에 대한 해결책까지 라잔 교수의 생각이 종합적으로 녹아있다. 그에 따르면 금융위기의 핵심적인 원인은 크게 3가지로 요약된다.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와 이에 대한 정책적 대응의 실패, 전세계적으로 보편화 되어버린 수출 지향적 성장전략, 그리고 서로 판이하게 다른 금융 시스템간의 충돌이다. 모든 것이 잘 될 때에는 좋은 길인 것 같았던 이들 하나하나가 위기가 발생하고 알고보니 뒤틀린 지층끼리 맞대고 있는 '폴트 라인' 마냥 불안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저자는 지나치게 리스크 감수를 부추기는 현 인센티브 제도의 개편과 같은 금융 시스템 개혁, 미국 사회 내에서 의료보험 및 실업금여 제도 확충 등을 통한 사회적 안전망 확대,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심화되어 있는 과도한 무역 수지 불균형의 점진적 해소 및 조율을 제안한다.

위기 이후 '월가를 점령해라(occupy wall street)' 등을 통해 터져나온 변화 요구에 비해서는 굉장히 온건한 주장들이다. 하지만 라잔 교수는 위의 세 가지 제안들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부작용을 최소화 하는 상태로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과 같은 위기를 예방하고, 설령 다른 금융위기가 닥치더라도 그 위력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의 우려는, 그의 제안들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과정들이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것임에도 그 실천은 굉장히 힘들고, 오래 걸리며, 폭넓은 국내외의 협력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데에 있다. 그는 그렇기에 이 제안들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어렵고 오래 걸릴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제로금리를 통해 부동산 시장을 어떻게든 떠받치려 하는 등의 '땜빵'식 대처는 위기를 지속시킬 뿐이기에 반드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고조되는 국민들의 불만이 파시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시된다. 근본적 해결 없는 경제 불안정은 급격한 우경화를 유발해 단기적이고 자극적인 - 불법 이민자에 대한 박해, 보호 무역주의의 심화 등 - 수단들에 국민들이 열광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책이 출간된 지 약 7년이 지난 오늘날 라잔 교수의 외침은 절반의 현실만을 담아내고 있다. 그가 지속적으로 역설했던 개혁 방안들은 대개 지지부진한 논의만을 거치다 무산되거나, 크게 후퇴된 형태로만 일부 도입되었다. 국제사회는 근 몇 년간 브렉시트(Brexit)를 전후로 급격한 우경화의 흐름을 타고 있으며, 과거에는 군소규모에 불과했던 극우 정치세력들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미국 역시 예상을 뒤엎고 트럼프가 당선된 뒤 불법 체류자를 비롯한 소수자 때리기와 무역 전쟁에 나서고 있다. 심지어 그는, 오바마케어나 도트-프랭크법안 등에 대한 철폐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고 공화당 역시 이에 동조하고 있어 두 법안의 지위는 크게 흔들리거나 사라질 전망이다. 그나마 위기의 흐름 속 라잔 교수의 입장과 유사한 형태로 도입된 개혁 입법들이 채 몇 년 되지도 않은 채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금융위기를 맞춘 예언자의 미래를 위한 외침은 카산드라의 예언마냥 또 한번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이제 현실이 된 그가 '우려했던' 상황들만이 버젓이 남아있다.

라잔 교수의 조언과는 반대로 갈수록 불확실성과 강대국간의 대립이 커져가는 국제 금융시장의 상황 속에서, 한국은 정말 바람 앞의 촛불과 같다. 안그래도 불신과 우려에 지속적으로 시달렸던 컨트롤타워가 이제는 완전히 공백이 되어버린 상황이기 때문이다.

결국 새로운 리더십이 나타날 때까지는 유일호 경제부총리와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이 위기에서 무너지지 않게 잘 버텨나가기를 기도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폴트 라인 - 보이지 않는 균열이 어떻게 세계 경제를 위협하는가

라구람 G. 라잔 지음, 김민주.송희령 옮김, 에코리브르(2011)


태그:#서평, #폴트라인, #라구람라잔, #경제학, #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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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시민기자. 서울대 로스쿨 졸업. 다양한 이야기들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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