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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산 할머니는 매우 활동적인 분이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로 기억하는데 저에게는 이모님이 되는 두 딸에게 한국의 민속춤과 장구 치는 법들을 가르쳐서 한인의 날 등의 행사에서 춤을 추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던 할머니는 이모와 어머니 등 여성들이 자립적으로 성장하도록 가르쳤으며 당신이 솔선수범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할머니의 독립운동은 명예나 이름을 남기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빛도 없이 음지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뛰신 할머니의 삶을 존경하며 그 후손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전수산 지사 형제들,앞줄 오른쪽 끝이 전수산 지사, 1916년 무렵
▲ 전수산 형제 전수산 지사 형제들,앞줄 오른쪽 끝이 전수산 지사, 1916년 무렵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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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한국시각 14일) 오후 2시, 전수산 지사의 외손자인 티모시 최(75) 선생을 만난 것은 하와이대학 한국학연구소에서였다. 하와이로 가기 전 대담 요청을 했더니 8개월 전 허리 수술을 해서 잠시 동안만 가능하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의의로 건강한 모습을 보니 기뻤다.

하와이 호눌룰루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약속장소인 한국학연구소로 달려갔는데 티모시 최 선생은 지팡이를 짚은 채로 벌써 도착하여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수산 지사님은 뭐라고 할까요? 굉장히 꼼꼼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이걸 보시면 알게 됩니다."

전수산 지사가 하와이로 떠나기 전 모습, 1916년으로 추정
▲ 전수산2 전수산 지사가 하와이로 떠나기 전 모습, 1916년으로 추정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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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대담에 함께한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소장은 전수산 지사님의 유품이 담긴 커다란 상자 속에서 누렇게 빛바랜 각종 졸업장이며 흑백 사진을 꺼내 보여주셨다. 한자와 한글이 섞인 평양 진명여학교 졸업장은 융희 2년(1908) 7월 8일 발행으로 되어 있었는데 졸업장에는 생년월일 대신 '15세'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는 '독서, 생리(生理), 창가, 산술, 작문, 지지(地誌), 습자(習字), 역사, 수신(修身)을 배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덕희 소장의 말은 이어졌다.

1908년 평양진명여학교 졸업증서
▲ 졸업증서 1908년 평양진명여학교 졸업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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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명여학교에서는 당시 진급을 위해 각 학년 이수 시험이 있었다.
▲ 이수증서 진명여학교에서는 당시 진급을 위해 각 학년 이수 시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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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상 지사는 성적 우수상을 받았다
▲ 성적 우수상 전수상 지사는 성적 우수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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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산 지사님은 평양에서 하와이로 건너오시기 전 여학교에서 받았던 졸업장이며 수업증서(각 학년 진급 시에 받는 증서), 성적 우수상장 등을 꼼꼼하게 챙겨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전수산 지사 덕에 우리가 당시 진명여학교에서 이뤄졌던 수업 과목 등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하와이로 건너오셔서도 당시 하와이에서 발행하던 <신한국보>와 <국민보> 등 신문을 구독하며 꼼꼼하게 모아둔 덕에 오늘날 사료로서 크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개화기 신여성으로 조선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던 전수산 지사는 평양 출신으로 1916년 무렵 하와이로 건너왔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공채를 발행하게 되자 전수산 지사는 당시 돈으로 15불 상당의 공채를 매입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이어 1919년 4월 1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창립된 하와이 부인단체인 대한부인구제회 회원에 가입하여 국권 회복운동과 독립전쟁에 필요한 후원금을 모아도 상하이 임시정부들 돕는 데 앞장섰다. 대한부인구제회 회원들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뿐만 아니라 조국의 애국지사 가족들이 어렵게 사는 것을 보고 그 가족들을 돕는 구제금을 송금하는 등 조국애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하와이대학 한국학연구소 전경
▲ 한국학연구소 하와이대학 한국학연구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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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산 지사는 1942년부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한인부인구제회(大韓人婦人救濟會) 회장으로 있으면서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적극 도왔다.

"할머니의 독립운동은 굉장히 적극적이셨는데 특히 독립자금을 억척스레 모아서 임시정부를 지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할머니가 남기신 유품 가운데는 당시 임시정부에서 받은 각종 증명서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요. 저는 할머니의 유품을 모두 한국학 연구소에 기증했습니다."

외손자인 티모시 최 선생은 안타깝게도 한국어를 잘하지 못해 이덕희 선생의 통역으로 대화가 이뤄졌다. 티모시 최 선생처럼 한인 3세들은 현지에서 어떻게든지 살아남기 위해 영어 위주의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미국 본토로 건너가 펜실바니아 주립대학에서 석박사를 마친 뒤 무어헤드 주립대학에서 교수로 정년을 마치고 현재는 할머니가 잠든 땅 하와이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75살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젊어 보이는 티모시 최 선생은 전수산 할머니와의 추억이 유독 많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티모시 최 선생의 나이 27살 때까지 살아계셨으니 말이다. 전수산 할머니와는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숨지기 전날까지 일기를 쓰셨습니다.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하루하루를 성실히 사셨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부지런하시고 활동적이셨으며 그리고 우아한 모습을 잃지 않았던 분이셨습니다."

왼쪽분이 전수산 지사의 외손자인 티모시 최 선생이다. 가운데가 기자이고 오른쪽은 하와이이민연구소 이덕희 소장
▲ 티모시 최 선생 왼쪽분이 전수산 지사의 외손자인 티모시 최 선생이다. 가운데가 기자이고 오른쪽은 하와이이민연구소 이덕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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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제대로 통한다면 몇 시간이고 전수산 할머니에 대한 대화를 나누련만, 영어가 짧은 기자로서는 통역을 통해서만 알아들어야 하니 안타까울 뿐이었다. 하지만 허리 수술로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는 상황인데도 티모시 최 선생은 고국에서 전수산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달려온 고국의 기자를 위해 1시간여나 되는 장시간의 대담에 응해주었다.

헤어지기에 앞서 하와이에 묻혀있는 전수산 지사의 무덤을 찾아 가보고 싶다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SUSAN SHUN LEE'라는 영문 이름과 함께 전수산 지사가 잠들어 있는 메모리얼 파크(공원묘지)의 약도를 그려 주었다. 하와이를 떠나기 전 기자는 꽃 한 다발을 사 들고 전수산 지사의 무덤을 찾아가 볼 생각이다.

머나먼 미국 하와이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자금을 모으는 한편, 조국의 애국지사 가족을 돕기 위해 열악한 이민 환경 가운데서 부단히 노력한 전수산 지사의 삶은 외손자 티모시 최 선생의 가슴속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슴속에서도 영원한 횃불로 남아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신한국문화신문에도 보냈습니다.



태그:#전수산, #여성독립운동가, #항일운동, #키모시 최, #하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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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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