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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늦겨울, 남편과 함께 회사에 사표를 내고 10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싱가포르에 왔다. 1년간 어학 공부를 하겠다는 목적이었다. 이 연재는 육아와 공부를 병행하며 싱가포르에서 생활하는 젊은 유학생 부부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담는다... 기자말

싱가포르에서 아빠와 아기가 함께.
 싱가포르에서 아빠와 아기가 함께.
ⓒ 김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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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서 맞는 생일은 쓸쓸하지만 우리가 함께 맞는 생일은 따뜻하다.

새벽 5시 반, 달그락달그락 남편이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내일 생일이지? 아침상 차려줄게"라고 호언장담을 하던 남편은 식기를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간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제길, 가스레인지에 가스가 떨어졌어."

셰어하우스에 방 한 칸을 빌려 사는 신세에 공용 주방 가스레인지 가스가 떨어지는 것은 예삿일이다. 가스가 떨어졌다는 남편의 말에 생일날 미역국 한 그릇 못 얻어먹은 서러움보다 '아기 이유식은 어떡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가산을 탕진하며 시간을 보내는 유학생활은 부족한 것투성이다. 전자레인지 하나 없어 무더운 날씨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가스레인지로 이유식을 데운다. 세 사람 살림에 냉장고는 한 칸만 사용할 수 있다. 주인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는 자기도 사람인 양 꼭 화장실 변기통 앞에 똥을 싼다.

배낭 하나에 트렁크 두 개 달랑 들고 싱가포르에 와 요즘 유행한다는 '미니멀라이프'를 제대로 즐기고 있다.

"너희 사는 것을 보니 밤에 잠이 안오더라."

멀리 타국까지 자식들을 보겠다며 찾아오신 아버님은 한숨을 쉬며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실상 우리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고 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큼지막한 친환경 아기 욕조가 없어도 싸구려 플라스틱 세숫대야만으로도 아이를 충분히 깨끗하게 씻길 수 있다. 저렴한 아기 기저귀를 채워도 아기 엉덩이는 무사하다. 굳이 책으로 가득 찬 서재가 없어도 열 뼘 남짓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아 늦은 밤까지 공부할 수 있고, 방에 텔레비전이 없어도 적막한 빈 공기를 라디오 소리로 채울 수 있다.

볕 잘 드는 널찍한 방 한 칸에서 아기는 이제 막 비틀비틀 걸음마를 시작하며 쑥쑥 잘도 자란다.

"우리가 살면서 진짜 필요한 것들은 얼마나 될까?"
"글쎄... 한국에 돌아가서 널찍한 원룸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늦은 저녁, 학원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 책상 위에 미역국에 제육볶음, 김치까지 곁들여져 한 상 '거하게(?)' 차려져 있다. 뒤집어진 세숫대야 위엔 두 개의 조각케이크까지 올려져 있으니 이 얼마나 완벽한 생일상인지. 핑크색 왕리본을 머리에 두르고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있는 아기는 오늘 생일상의 하이라이트다.

"우와, 이거 진짜 한국에서 먹는 미역국 맛하고 똑같아! 어떻게 만든 거야?"
"음...그냥 먹어.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마!"

그렇다. '한국의 맛'을 느끼게 해 준 남편의 미역국은 사실 집 인근에 있는 한국 마트 '고려마트'에서 산 방부제와 조미료가 듬뿍 담긴 인스턴트 미역국이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한국 음식이 그리우면 인스턴트로.

그 어느 순간에도 우리 삶을 대체할 대안은 있기 마련이다.


태그:#싱가포르, #가족, #꿈, #어학연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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