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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생들이 가득한 대학가의 원룸촌. 그 틈새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작은 책방.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서점 '51페이지' 얘기다.

오프라인 서점이 계속 줄어들고 책 판매량 역시 감소하는 가운데, 동네의 자그마한 독립서점이 살아남기란 만만치 않다.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시도를 모색해야만 하는 처지에서, 51페이지는 이채로운 기획을 내놨다. 인근에 위치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이하 문창과)와 함께한 토크콘서트가 바로 그것이다.

개근상? 개나 줘 버려!

'개근상 개나 줘라!' 토크콘서트 포스터
 '개근상 개나 줘라!' 토크콘서트 포스터
ⓒ 김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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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후 7시. 작은 책방에 스무 명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메인 MC를 맡은 문창과 김진영 학생회장이 토크콘서트의 막을 열었다. 토크콘서트 이름은 '개근상 개나 줘라!'. 다소 엉뚱해 보이는 이름에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


"개근상은 학교를 단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나와야 받을 수 있는 상이에요. 교육 제도에 충실한 학생들만 받을 수 있다는 뜻이죠. 대학에 와서 문득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과연 학교를 지금까지 열심히 다녀서 얻은 게 뭐지?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스스로 책 읽고 배운 게 더 의미 있었던 것 같아요. 집에서 심심해서 꺼내든 책 한 권이 더 마음의 양식이 됐죠."


김진영씨는 오프닝에서 제목의 뜻을 이렇게 설명했다. 입시 공부 열심히 해서 막상 대학에 와 보니, 사회 나가서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 사회라는 버스에 탑승하려, 그러니까 제도권 안에 안정적으로 정착하려 아등바등 살게 된다. 그럴수록 저항하려는 노력, 제도권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제목의 함의다.

'개근상 개나 줘라!'라는 외침은 그래서 나왔다. 토크콘서트를 준비한 이들에게 개근상은 부조리한 사회 제도의 표상이다. 그러니 개근상 같은 건 개나 줘 버리고 피로한 일상에서 탈출해 보자는 게 토크콘서트의 주제였다.

일상 탈출, 문학과 함께

'개근상 개나 줘라!' 토크콘서트에서 소개된 책 세 권
 '개근상 개나 줘라!' 토크콘서트에서 소개된 책 세 권
ⓒ 김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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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콘서트 패널을 맡은 문창과 학생들은 세 권의 책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었다. 학과 내 시 동아리 부회장을 맡고 있는 김혜원씨가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소설 동아리 회장 권혁준씨가 장강명의 <표백>을, 희곡 동아리 회장 전승욱씨와 이호령씨가 <고양이는 내게 행복하라고 말했다>를 각각 소개했다.

얼핏 공통점이라곤 없어 보이는 세 책들은 토크콘서트의 주제에 걸맞게 해석됐다. 각각의 패널들은 책에 대한 소개와 함께, 책들이 어떻게 개근상을 개나 줘 버리는지를 설명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진영 씨의 오프닝 ▲김혜원 씨의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소개 ▲전승욱, 이호령 씨의 『고양이는 내게 행복하라고 말했다』 소개 ▲권혁준 씨의 『표백』 소개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진영 씨의 오프닝 ▲김혜원 씨의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소개 ▲전승욱, 이호령 씨의 『고양이는 내게 행복하라고 말했다』 소개 ▲권혁준 씨의 『표백』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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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시인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소개한 김혜원씨는 본인의 이야기로 서론을 꾸몄다.

"개근상이라는 게 어떤 '틀'을 말하죠. 저는 굉장히 틀에 잘 박혀 사는 사람이었어요."

김혜원씨는 자신에게 토크콘서트 기획이 일종의 '틀 깨기' 기회였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시 '묵념'을 소개했다. '5분 27초'라는 한 행만으로 이뤄진 시. 낭송이 끝나고 놀라는 관객들에게 김혜원씨는 그 놀람이 바로 시에 대한 자신만의 틀을 가지고 있었다는 반증이라고 이야기했다.

시집에 대한 소개를 마치고 김혜원씨는 5·18 민주화운동과 현대 고등학생들의 야간 자율학습을 비교했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제도가 잘못됐다고 생각해 나가 싸웠다면, 지금의 야간 자율학습 제도에 저항해 소위 '땡땡이를 치는'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김혜원씨는 두 쪽 모두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제도에 저항하는 사람들인데, 야간 자율학습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만 부정적인 시선을 보낸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권혁준씨가 장강명의 <표백>을 들고 나왔다. <표백>의 스토리는 특이하다. 소재는 자살이다. 소설 속 인물은 자살을 '삶의 중요한 성취를 이뤘을 때 실행하라'고 말한다. 자살이 사회적 저항임을 분명히 전달하려면 그래야 한다고. 삶이 힘들 때 자살하면 그건 그저 패배자의 개인적인 도피가 된다는 얘기다. 권혁준씨는 이를 토크콘서트의 제목과 연결했다.


"일단 개근상을 타 보라는 얘기예요. 개근상을 개한테 줘서 반항하려거든 일단 개근상을 타고 반항해야지, 개근상을 못 타고 놀다가 반항하면 그건 그냥 날라리의 변이다 이거죠."


권혁준씨는 또 다른 화두를 제시하기도 했다. 소설에 따르면 지금의 세대가 힘든 이유는 사회가 안정됐고 이전 세대가 자리들을 모두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정된 구조 속에서 지금의 세대들이 아래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더불어 소설 속 인물은 그런 구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자살 선언'을 하자고 주장한다. 권혁준씨는 구조 타파를 위한 이런 틀 깨기에 관해 오랜 시간 관객들과 대화를 나눴다.

토크콘서트가 진행 중인 51페이지 전경
 토크콘서트가 진행 중인 51페이지 전경
ⓒ 김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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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서는 전승욱씨와 이호령씨의 <고양이는 내게 행복하라고 말했다>였다. 소설 속에서 고양이는 불행을 겪는 주인공에게 행복해지는 방법을 조언해준다. 조언은 요약하자면 이렇다. 당장의 행복, 하던 일에만 집중하라는 거다. 다른 것들에는 신경 쓰지 말고.


"이 책의 키워드는 위로예요. 토크콘서트 이름과는 좀 안 맞지 않나 생각도 했죠. 그런데 다 읽고 나니까 그게 맞더라고요. 일상에서 우리와 붙어 있음에도 느끼지 못했던 걸 느끼게 해 주는."


일상에서 쉽게 할 수 있지만 시도할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고양이는 제시해준다. 철길을 따라 죽 달려가다가 멈춰서 풍경을 보는 일, 걸으며 색깔 하나하나를 진득히 감상하는 일… 위에서 소개한 두 책과는 다른 방식의 틀 깨기였다.

모든 패널이 책 소개를 마치고, 토크콘서트는 박수와 함께 막을 내렸다. 토크콘서트를 보러 온 전신래씨는 "책을 읽고 쓰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참석했다"며 "내 자식 또래 학생들의 생각과 고민, 답답함을 알았고 이들이 방법을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깨달았다"고 소감을 남겼다. 손은정씨는 "쌍뱡향 토크가 이뤄져 서로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며 "의외로 다양한 학과와 나이대의 사람이 있어 좋았다"고 전했다.

문화공간으로서의 동네 서점도 바란다

토크콘서트가 끝난 직후 51페이지 김종원 사장(종)과 문창과 김진영 학생회장(진)을 함께 만났다. 짧은 시간 동안 토크콘서트에 대한 소회, 독립서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래는 두 사람과의 일문일답이다.

- 먼저 토크콘서트를 마친 소감을 듣고 싶다.
: "행사 하시는 분들이 처음이라 미숙할 수도 있었고, 참가하시는 분들도 이런 행사가 익숙하지 않으셨을 거다. 그럼에도 벌써 몇 번씩 행사가 진행됐던 것 같은 분위기였다. 후반부로 갈수록 분위기가 유해지기도 했고. 서로 할 얘기가 많으면 분위기가 부드러워지기 마련이다. 좋게 봤다."

: "공간 제공해주신 사장님께 너무 감사드린다. 이렇게 (문학으로) 소통하는 장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로 너무 의미 있었던 것 같고,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 토크콘서트를 기획하며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면?
: "제 입장에서는 서점을 알리는 게 첫 번째였고, 두 번째로는 우리가 동네 서점이니 그 정체성에 맞게 동네에서 할 수 있는 행사를 고민하고 찾고 있었다. 동네 서점이 할 수 있는 적절한 행사를 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런 행사를 찾아나갈 생각이다."

: "문창과 안에서뿐만 아니라 좀 더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문학이 이렇게 재밌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학교 안이 아니라 밖에서 소통할 수 있는 장이 마련돼 있으니까, 문학의 재미를 알릴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 행사 후 아쉬운 점이 남는다면 무엇인가.
: "주인 입장에서는 어떻게 하면 (행사 후) 책 구매로 이어지게 만들까 고민을 많이 했다. 고민에 비해 부족했던 것 같다. 추후에 문창과와 또 이런 행사를 한다면 책 하나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한다든가, 어떤 현상을 키워드로 잡고 이야기한다든가 할 생각이다."

: "객석에 문창과 학생이 많이 보였는데, 오늘 오셨던 아주머니처럼 일반인들이 좀 더 많이 왔으면 어땠을까 싶다. 더 소통하고 싶으니까.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런 자리 아니면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 아닌가."

- 마지막으로 주민이나 학우들에게 자유롭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 "오래 전부터 독립서점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앞으로 이곳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책을 집어들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서점에서 책만 파는 게 아니라 이렇게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해 주면, 이공계생이 다수인 과기대에서도 책을 접할 기회가 늘지 않을까."

: "다양한 책을 많이 보셨으면 좋겠다. 내가 어떤 책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는 먹어 봐야 아는 거다. 다양하게 읽어 보고 실패도 해 봐야 한다. 많이 먹어 본 사람이 결국 전문가가 되는 거니까. 평소에 지금보다 책을 더 많이 접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고 인쇄 매체의 힘이 점점 떨어져 가는 요즘이다. 서점들의 주머니 사정도 어려워지고 있지만, 이색적이고 조그만 동네 독립서점들은 그 가운데서도 꿋꿋이 버티고 서 있다. 51페이지를 비롯한 많은 독립서점들이 보다 참신한 자기들만의 색을 갖춰 자생하길 바라 본다.



태그:#동네서점, #문예창작학과, #토크콘서트, #대학생, #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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